〈 384화 〉 #191 입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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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 같네요."
해당 주소지의 헌터들은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보고가 들어온 이상 의심할 여지는 없다.
현관에 놓인 신발의 갯수만 보더라도 십수 명은 족히 있었을 텐데 거짓말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귀신같은 솜씨. 그러면서도 어떤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로 확실한 일처리.
거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다수의 헌터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압도적인 실력을 가졌다는 뜻. 그게 가능한, 그리고 그렇게 할 만한 인물을 달리 떠올릴 수 없었다.
"생각보다 더 빨랐네요. 설마 벌써 여기까지 왔을 거라곤."
즉, 정보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뜻.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예상을 훨씬 웃도는 속도였다.
"……이미 여긴 선수를 쳐진 모양이네요. 둘러보면 헌터라는 걸 알 수 있는 물건들은 있지만."
"네. 환수와 관련된 게 없어요."
이미 늑대가 처리한 것이리라.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깔끔하게. 즉, 이곳에 있던 이들은 역시 환수 사냥과 관련된 이들이었단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이은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있다. 있어! 알파가 주변에 있을 거란 사실에 감정이 고조돼갔다.
만나면 어쩌나하는 불안인지 혹은 다시 만날 수 있는가하는 기쁨인지 어느 쪽인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숨소리가 거칠어져갔다.
혹시라도 만나버리면 뭐라고 해야할까?아니, 그 이전에 정말 만나지 못한 걸까? 혹시 자신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건 아닐까?
사실, 이미 싫증이 났다던가…….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가. 조금이라도 알파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쓸데없는 생각보다는 최선을 다하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게 며칠간 선자님과 함께 하면서 배운 점이었으니까.그러자 착각이었는지 일순이나마 이채가 스친 듯한 눈빛을 본 듯했다.
"좋아요. 판매처 두 곳을 확인했으면 이제 남은 일은 하나겠죠."
***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 일부러 인터폰은 망가뜨려 놓았거늘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두드리면 그렇게 해둔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마침 백소율이 페리와 함께 산책나간 김에 즐기고 있었거늘, 누가 찾아왔단 말인가? 이를 갈면서 무시하고 있으면 금세 사라지겠거니 했건만 벌써 십분째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저걸 콱 그냥 죽여버릴 수도 없고……"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컨트롤러를 조작한 홍유리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뭐니뭐니해도 밖에 있는 사람은 끈질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 그래도 미친 척하고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으리라.
"문자만 보내둘까."
산책나갔던 백소율과 페리가 혹시라도 돌아와 저 인간과 마주치지 않게끔 천천히 오라고 말이다. 시선은 TV화면에 집중한 채로 한 손으로 핸드폰을 두드린 홍유리는 콧바람을 뿜으며 게임에 집중했다.
최근 종류를 늘려 여러 장르를 섭렵하고 있었으니까. 일일이 오는 사람을 전부 상대할 필요는 없다. 뭐니뭐니해도 휴가가 아닌 퇴직이었으니까.
"안에 없냐? 진짜 없다고?"
이상하다는 것처럼 흉내내는 말투, 연극톤으로 중얼거린 그가 들으란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부지런도 하다. 맨날 책상에 엎드려 자던 그 홍유리가 맞냐?"
"정말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만. 그래… 감회가 새롭지. 지금 알파랑 같이 살고 있단 거. 그걸 누가 믿겠냐? 재작년까지만 해도 죄다 개소리라고 할 텐데."
"어, 그래. 넌 모르냐? 아~ 출장? 그래. 그럼 그럴 수 있지. 으허허. 사람이 모르면 들어야지. 그러니까 아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말이다."
"그 왜 전에 한 번 유리가 강화도에서 혼자 깝죽거리면서 알파한테 덤볐다가 발리곤 물 빠진 생쥐꼴로 바닷물에 흠뻑 젖어서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거 왜 그렇게 됐는지 알겠냐? 그 이유가 말이다……!"
순간, 활짝 열린 문이 안면을 강타했다. 현관문에 얻어맞은 강태호는 억 하는 소리를 내며 아파했지만 홍유리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대체 그게 언젯적 일이란 말인가. 다 끝나서 잊어버린 일을 끌어내 들춰내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 쌍심지를 켜고 눈을 부라린 홍유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니나다를까 강태호 혼자뿐이었다.
역시나 능청스런 연기였다는 뜻. 솥뚜껑만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엄살피고 있었지만 홍유리는 알고 있었다. 고작 문짝에 얻어맞은 정도로는 간지럽지도 않았을 거란 것을.
"이게 안 아프다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어이없어하는 강태호가 보란 듯이 손잡이를 쥐고 문을 되돌렸을 땐 그의 얼굴형태가 현관문에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수리해야 하리라.
"아, 뭐요."
와짝 인상을 찌푸린 홍유리가 그렇게 묻자 눈두덩이를 비빈 강태호는 이제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알파가 움직이고 있단 건 당연 알고 있을 터. 어떻게든 멈출 수 없겠냐는 말을.
"내가 왜요."
짤막한 단답. 자신이 왜 그래야하냐는 퉁명스런 되물음에 강태호는 찬찬히 설명하려했다.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 일을 납득하건 아니건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고. 자신 또한 알파가 하는 일의 정당성을 이해하곤 있지만 여기까지 했으면 충분하니 일단 멈출 수 없겠느냐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그래야만 한다고.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홍유리는 질겅거리던 오징어 다리를 씹어삼켰다.
"막을 생각 없거든요? 그냥 곱게 돌아가죠?"
머리를 벅벅거리며 오히려 자신이 왜 그래야하냐는 듯한 태도로 문에 기대어 섰다.
"뭐 어디까지 해달라고요? 환수랑 싸우는 것도 막았지. 무고한 사람 죽이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어디 폐 끼치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잘 하고 있잖아요."
"……."
"뭐 어디까지 참아줘야 해요? 그리고 애당초 내가 징징거린다고 들어줄 것 같아요?"
여태 그렇게 봐놓고도 모르겠냐며 홍유리는 짧게 혀를 찼다.
"어차피 끝까지 할걸요?"
설령 자신과 갈라서는 한이 있더라도 뜻을 관철하리라. 늘 자신보다는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렇기에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그 자신을 용서치 못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환수뿐만이 아니라 알파를 위해서라도 막아선 안 된다.
"그건 나도 안다. 아는데 인마! 그 뒷감당은 할 수 있겠냔 거다!"
서로가 말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립하는 의견을 가지고서 어느 한쪽도 물러나지 않았다.
"뭔 뒷감당?"
"결국 이러다 재앙으로 낙인찍히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거든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
"지랄. 윗대가리들 생각이야 뻔하지. 서로 눈치만 살살 살피겠지 누가 미쳤다고 총대 멜 건데요?"
질병이나 역병과는 다르다. 맹목적으로 살육을 일삼던 그것들과는 달리 알파에게는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다. 명분이 있다는 건 알파의 행동에 어느정도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대립하는 이들이 눈가리고 아웅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했다.
"마랑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지만 먼저 선을 넘은 건 저들이니 참작의 여지는 있다……"
기껏해야 그 정도이리라. 뒤에서 수군거리긴 하겠지만 그런 말까지 일일이 신경 쓸 생각은 없었고. 실제로 총대를 메고 움직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이 꼴을 보았기에 본보기로써 더더욱 움직이지 못하리라.그렇다고 새삼 개인이 품은 원한 따위가 무섭지도 않았고.
원래부터가 법과 규율을 한참 넘어선 초법적인 존재. 자기네들의 잣대로 어떻게 할 방법 따윈 어디에도 없으리라.
"결국 너도 안 된다고."
"아무도 못 말려요. 그냥 냅둬요.……아. 그렇지. 자수하면 안 죽였단 것 같은데 자수나 시키든가."
"……."
"신전이 소집했다면서요? 거기서 지껄인 개소리들. 그걸 왜 했겠어요? 뇌 비우고 달려드는 놈들 있을까봐 확인차 상기시켜둔 거겠지. 현상금 건다고 해도 다들 입 다물었다면서요. 그럼 끝이지."
"완전히 귀 닫고 산 건 아니었구나."
"때려친 지 뭐 며칠이나 됐다고? 삽질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에요. 아님 나 말고 환수들이나 찾아다니던가."
충고하듯 말을 쏟아낸 홍유리는 아까 부딪친 충격으로 뻑뻑한 현관문을 억지로 닫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일 얘기로 찾아오지 마요. 나 그만뒀으니까."
그렇게 아예 문이 닫히고 현관 앞에서 멍하니 있던 강태호는 금세 다시 문이 열렸을 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그리고 씨발. 그것 좀 그만 우려먹고."
한참을 혼자 서서 웃다가 조금은 풀린 듯한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거, 성격 더러운 건 낫지를 않는구만."
애당초 찾아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연에게 그렇게 말했다시피 개인적으로는 알파가 하는 일에 찬성이었던 차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반박당하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일 얘기로 찾아오지 말라고……"
그럼 조만간 집들이겸 술이나 사서 애들이랑 와봐야지. 왔던 목적은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음에도 아까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