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화 〉 #193 마수화 계획
* * *
"오늘따라 유독 반짝거리네."
보기 드문 날이었다.
창문에 기대어 올려본 밤하늘은 보고 있자면 콧노래가 절로 나올만큼 아름답다. 저런 별무리를 보며 한 잔 걸치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텐데. 그러다 별똥별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극락일 테고.
……참 아쉽게도 집구석에 있는 술이라곤 김빠진 맥주뿐. 지금이라도 사올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다 구름이라도 끼면 이 경치를 놓치고 만다.
고민이 이어지다가 결국 콧노래는 한숨으로 변했다.
"땅 꺼지겠어요."
슬그머니 눈동자만 굴려 흘기듯 본 홍유리는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저 하늘 아래 내 님도 있을 텐데~."
"……?"
"혹시 그런 생각이라도 하셨나 싶어서요."
"뭐야 그거. 아넬라 흉내?"
"금방 아셨네요?"
"같이 다니더니 원……"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요?"
그제야 고개를 돌린 홍유리는 백소율을 마주보았다.
"왜. 제법 하네. 성대모사."
"그게 아니라 알파요."
"……."
양팔을 교차해 턱 아래로 받친 홍유리는 물끄러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 더 빛나는 것만 같아서 정말 술 한잔이 간절해진다.
쩝쩝,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야, 이런 밤하늘을 같이 올려다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으랴. 기대고 있는 것도 창문이 아닌 까만 털뭉치였을 테니까.
"페리는?"
"아직 안 자요."
가리킨 곳엔 페리가 혼자 컨트롤러를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니, 잘 보면 혼자가 아니었다. 옆자리엔 아무도 앉아있지 않지만 남은 컨트롤러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너덧 마리의 요정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까르르 웃으며 조작하고 있었다. 나름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는 것 같기는 했는데 역시 이해하기는 어렵다.
"……요정어가 존나 난해하니까."
오히려 어떻게 이은하가 그걸 익힐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모이는 스퀘어의 특성상 나름대로 여러 언어를 습득한 홍유리였지만 요정어는 그 궤가 다르다.
글자가 소리를 뜻하는 표음문자나 글자 하나가 의미를 가지는 표의문자와는 달리 차라리 그건 마음을 표현하는 문자. 굳이 말하자면 표심문자라고 표현할 수 있으리라.
"아니 그딴 걸 어떻게 익히라고."
고개를 젖힌 홍유리는 푸념했지만 놀랍게도 그걸 정말로 익힌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알기에 딱 한명. 마침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백소율이 웃었다.
"은하 언니는 익혔잖아요?"
"지랄. 내가 보기엔 그년은 사람이 아냐."
"아니면요?"
"머리가 꽃밭이니까 그딴 걸 익혔지. 하여튼 그년도 정상은 아냐."
"……?"
"마법도 안 배우고 마법을 쓰는 게 어딨어? 반칙같은 년."
배우지도 않은 언어를 뱉는 게 정도가 아니라 배우지도 않은 개념을 알고 있는 셈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사람이 아가미 호흡을 하는 격이었다.
될 리가 없다. 그런데…… 했다. 물론 알파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었다. 정작 그런 이은하보다도 불가사의한 게 알파였으니까.
"그랬나요?"
까맣게 몰랐다는 듯 태평한 말에 홍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따지고보면 이은하도 이은하였지만 지금 얘기하고 있는 백소율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너도 마녀니 뭐니하면서 지금도… 쯧."
마정이라 했던가. 대마력 너머에 있는 마력의 결정체나 마찬가지인 스킬을 가지고 있단 말에 솔직히 마법사로서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은 괜찮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묘한 활력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알파가 말하기를 언젠가 익숙해질 거라 했던가. 착각인지는 몰라도 조금 적응한 것 같기도 했다.
"후후.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걱정까지야…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이상한 걸로 치면 선생님도 만만치 않잖아요?"
"나? 내가 뭐?"
자신을 가리키며 뚱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홍유리. 그 옆까지 천천히 다가간 백소율은 조심스런 손길로 길게 뻗은 뿔을 쓰다듬었다.
제법 길게 돋아난 루비처럼 아름다운 보석같은 뿔.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붉은 눈동자와 세로로 찢어진 동공까지. 길게 뻗은 꼬리와 제법 커진 날개는 머잖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용이시잖아요?"
"휴. 이젠 별 생각도 안 든다."
"질리셨어요?"
"아주 진작에. 망할."
휘적휘적 꼬리가 투덜거리듯 바닥을 두드린다. 이미 한숨밖에 쉬지 않고 있는 그녀를 보고서 쓰게 웃은 백소율은 그녀가 무엇보다 바라고 있는 것을 꺼내들었다.
짤랑
그러자 안 그래도 밝은 귀가 붉은 머리카락 너머로도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백자와도 같은 하얀 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 숙성된 백포도를 발효시킨 일품이자 와인이면서도 와인이 아닌, 본래 술을 빚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기묘한 술이자어지간한 애주가가 아닌 이상 더는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환상의 술이었다.
문제는 그게 이미 사라졌다고 여겨지고 있다는 것. 있을 리 없다. 있을 리 없는데도…… 그녀 자신이 가진 안목이 그 물건을 진품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너 그거 어떻게?"
"원래 곁들인 요리가 있어야한다지만 오늘은 괜찮을 것 같네요."
"야! 그거 어디서 났냐고!"
"아니면 지금이라도 만들까요? 잠깐 기다리실래요?"
홍유리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어줍짢은 요리같은 건 있어봤자 술맛에 끼어들어 방해만 할 테니까. 어느새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알려자 술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까맣게 잊고 꼴깍 침을 삼켰다.
"아, 떨어졌다."
"뭐?!"
"별똥별이요. 저기 떨어져 가네요."
드문 별무리의 날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특출나게 아름다운 별이 저 하늘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
……이제 마지막. 한동안 발품을 팔았지만 한국을 시작으로 중국부터 위로 아래로 내려와 하나의 원을 그렸다.
어디로도 도망칠 곳 없이 환수 사냥꾼들을 몰아붙이고 마침내 여기까지 다다랐다. 다만, 도착한 곳은 기묘하게도 건물이 아니었다.오히려 숲. 보기 드문 울창한 숲으로 흔적은 이어져있었다.
"도망이라도 칠 셈인가?"
갸웃거리며 백록은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이나 숲과 같은 자연의 영역은 환수와 영물의 영역이었으니까. 가라앉혔다고는 하나 사냥을 일삼았던 이들이 발디디는 걸 용납할 리 없다.
분명 수많은 환수들에게 둘러싸여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으리라. 그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실이었다.
"……도망이 아니군."
백록의 눈보다도 훨씬 깊은 곳을 본 늑대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
환수 사냥의 판매처로 의심되는 장소는 깨끗하게 비워져있어 실제 물증이 될 물건들은 무엇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류만은 남아있었다. 가죽을 비롯 형언하기 힘든 방식으로 '해체되어있던' 환수들의 행방이 적힌 서류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단 하나도 남겨둘 리 없다. 설령 이 자리에 없다고 한들 마찬가지. 집념을 가지고 추궁해서라도 전부 없애버렸을 터. 환수 사냥에 대한 기록조차 용납지 않고 불살랐을 터였다. 그런 기초적이고 아둔한 실수를 할 리 없는 늑대였지만 요정용들에 얽힌 일과 자책, 자괴로 인해 흔들리고 만 탓에 흔적을 남긴 셈이다.
물론 건물 안에 서류가 있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늑대의 눈이 만에 하나라도 놓칠 리 없었을 테니. 안이 아니라 밖.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어느 보관함 안이었다
그리고 그 서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끈질김 덕분이었다. 여명과 대표 클랜이 이잡듯이 뒤져 그들의 동선을 전부 뒤따른 결과인 셈이다.
"……."
덕분에 알았지만,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환수들에게 행해진 것이 단순한 사냥만이 아니었다는 걸 누가 알 수 있었으랴.
분명, 알파는 마랑회의 모든 이들을 절멸시켰다. 그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수 없는 위업을 실현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림자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던 거다.
"마수화 계획……?"
마랑이 환수라면, 환수를 마랑으로 만드는 것 또한 가능할 터. 미친 발상에서부터 시작한 어느 의미로는 엘릭서에 대한 탕아들의 집념과 같은 실험이 있었다고 과연 누가 알 수 있었으랴.
서화의 폭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던 자신을 제외하고서.
***
숲이 울고있다.
아니, 울부짖고 있다. 목청껏 소리높여 가지각색의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건 이미 환수라기보다는……
'괴수.'
그래. 차라리 몬스터처럼 보인다. 백록은 스스로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늑대를 찾기 전부터 이미 곳곳에 들러 환수들을 진정시켰었지만 그 땐 이렇지 않았으니까. 도시에까지 내려와본 적이 없어 몰랐지만 이미 발이 닿았던 장소였다.
"!"
악의가 들끓고 악취가 진동한다. 환수와 영물이 지닌 특유의 마력의 향취는 온데간데 없이 오로지 그런 부정한 것들만이 있는 듯하다.
……숨이 멎는다.
저도 모르게 호흡을 잊은 백록은 아연하게 숲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저, 아연해졌다.
그 힘의 총량보다도 악의에 아연해하고 말았다.
발굽 소리가, 날갯짓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불규칙한 하모니를 이루며 숲 바깥으로 맹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군세의 진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