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화 〉 #193 마수화 계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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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둘러싼 거대한 벽. 그만한 벽이 갑작스레 솟아올랐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높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벽은 수 킬로미터의 둘레를 가지고 솟아있었다.
지각변동으로 인한 현상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인위적인 현상. 그 현상을 눈치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하나 둘 집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고 있었고.
"아, 알파일까요?"
거기엔 이은하와 은자림 또한 포함돼있었다. 반신반의하는 물음엔 마찬가지로 반신반의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십중팔구는요. 하지만…… 확신은 못 하겠네요. 어쩌면 다른 사람일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이라고요?"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이가 알파 말고 달리 있다는 걸까? 검지와 엄지로 턱을 쥔 은자림은 고심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직접 확인해보는 게 가장 좋겠죠. 얼마 멀지도 않으니까요."
안 그래도 주변의 헌터들이 정황을 살피려 달려가고 있었다. 몇몇은 고층 건물에서 배율이 높은 쌍안경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은자림이 달리기 시작하자 양손으로 뺨을 찰싹 때리곤 잠을 깨워 뒤를 따른 이은하는 머잖아 벽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애당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기도 했다. 그렇게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코를 찌르고 올라오는 강렬한 악취였다. 곧이어 뒤를 따라 전신을 붙잡는 듯한 진득하고 눌러붙는 듯한 불쾌함에 마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아. 이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언젠가 느껴보았던 악의. 그것과 극히 흡사하다.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어 여왕의 도움을 받고서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던 그곳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만큼 낮은 수준이기는 했지만.
"……악의로군요. 과연, 작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동의한다는 듯이 미미하게 끄덕인 이은하는 "Ascunde." 하곤 주문을 외워 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은자림의 곁으로 다가가자 물 속에 손을 집어넣듯 자연스레 그녀 또한 막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설마하니 그녀가 이런 악의 따위에 영향을 받진 않겠지만악의가 침투하지 못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주변의 상황이 이상했으니까. 마치 두통이라도 겪는 듯이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네요. 그리고."
중얼거린 은자림은 벽 위에 손을 얹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길고 커다란 벽은 두께와 견고함마저도 범상치 않은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스퀘어 마스터 클래스의 마법사가 얽혀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스퀘어 마스터라도 이만한 완성도의 벽을 쌓기 위해서는 마법진을 사용하더라도 몇날 며칠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따라서, 그를 초월하는 존재가 만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알기에 그런 존재는 알파외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추측을 뒷받침하듯 하늘이 무너지는 착각이 들었다.
정말로 움찔거린 은자림은 고개를 쳐들었지만, 거기에 보이는 거라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구름마저 찢어발겨버린 압도적인 마력이 있을 뿐. 바로 저 마력이야말로 착각의 원인. 고민하던 은자림은 소매를 당기며 재촉하는 이은하의 손길에 이끌려 마력의 근원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마력에 붙잡힌 환수들은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은 달리던 그대로 공중에서 붙잡혀 근육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균형이 어긋난 자세로마저 시간이 동결된 것처럼 멈춰있기도 했다.
위아래 사방팔방에서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뜻이다. 한둘도 아니고 저 많은 환수들을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전부 다. 심지어 다치지 않게끔 각자가 저항하는 힘과 완전히 동일한 만큼의 압박만을 가하고 있었다.
의식이 열개라도 부족할 일. 백록으로서는 새삼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신기였다.
"괜찮은가?"
"……그래. 괜찮긴 하지만."
늑대는 짧게 혀를 찼다. 압박을 가해 이대로 짓누른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환수들인 이상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으로서는 붙잡고 있는 게 최선의 방법. 환수들의 체력이 고갈돼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랬다가는 원흉을 쫓을 수 없다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이러고 있는 게 한계였다.본신이라면 모를까 이곳에 있는 자신. 즉, 정신체의 힘으로는 환수들을 붙잡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이대로 움직였다가는 마력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되고 말리라. 답답하게도상처입히지 않고 죽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게 한계였다.
"백록.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
"안으로 말인가?"
"그래. 아직 도망치지 못했을 테니까."
벽을 둘러친 이유는 환수들을 격리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직 원흉이 안쪽에 있을 거라는 말에 백록은 눈을 번뜩였지만 이내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악의를 보고서 잠식당할 뻔했다. 늑대가 깨워주지 않았더라면 늦던 빠르던 분명 그리됐으리라. 그런데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간 어찌 될지는 불보듯 뻔한 일. 그에 늑대는 담담히 끄덕였다.
"그래?"
실망이나 아쉬움. 그런 일말의 감정조차 섞여있지 않은 말에 백록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늑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설령 이 자리에서 놓치게 된다고 한들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뒤쫓아 물어뜯어버리면 그걸로 끝이니까.
그리고 그럴 필요조차 없다. 급히 달려오는 두 사람의 발소리에 늑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여기가 입구인 것 같아요."
입구라기보단 마력의 근원지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 숲을 두른 벽은 여전히 견고하고 두꺼운 채 그대로였다.
노크하듯 벽을 두드려본 은자림은 소리를 듣고 벽의 두께가 m단위라는 것에 속으로 실소했다. 두께는 둘째치고 벽의 강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어지간한 금속조차는 비견될 수조차 없고 거의 강철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두께가 미터 단위에 높이는 수십 미터. 길이는 가히 셀 수도 없는 정도였으니 중량은 물론이고, 이음매조차 없었으니실질적인 견고함은 성벽조차 비견되지 못할 수준이리라.
이런 걸 부술 수 있을 리 없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물러나세요."
그 말에 몇 걸음인가 물러난 이은하는 어느새 그녀의 손에 창이 들려있음을 볼 수 있었다. 언제 꺼내들었는지 알 수조차 없는 붉은 창이 반원을 그리고 공기를 가르더니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네 바퀴… 아홉 바퀴…
서서히 속도를 높여가더니 푸른 잔상이 창을 뒤쫓았다. 창 본연의 붉은 색과 그녀가 발한 푸른 마력이 뒤섞이며 회전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종국에 자색 원만이 남았을 때 기운이 움직이더니, 창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라색 기운을 한껏 머금고 기어이 창을 찔러넣었을 때, 아주 깊숙이 벽을 파고들었다.
"……!"
그동안 함께 달려왔음에도 여력을 남기고 있었단 뜻. 두 눈 뜨고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의 작용을, 원리를 파악할 수조차 없다.
마법과는 달리 복잡한 수식같은 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까다로운 듯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
저 견고한 벽을 손쉽게 꿰뚫었으니까. 마치 물체의 저항이 사라지기라도 한듯이 너무나 가볍게. 그리고 깊게. 실제로 창에 깃든 힘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었으리라.
"자, 이제들어가…?"
은자림은 얼떨떨하게 말을 잇지 못했다.들어가자고 말하기 전에 허물어진 벽이 두 사람이 통과할 만큼의 길을 터주고 있었으니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벽 너머로 보이는 흰 사슴과 검은 늑대를 보았을 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백록을 찾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그야 알파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면 산중을 뒤진다고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제야 상황을 좀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벽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본 광경은 참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허공에 붙잡히듯 떠있는 환수들. 하늘을 무너뜨릴 듯하던 마력은 절묘한 제어로 그들을 다치지 않게끔 붙잡고만 있었다. 심지어 한 마리 한 마리가 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왜 환수들을 붙잡고 있는 걸까. 하지만 곧 이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알파가 불필요한 일을 할 리 없으니까.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비슷한 방법으로 왜곡을 주로 사용하는 이은하로서는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부터 물어야할까. 아니, 사과부터 해야하는 걸까?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 속이 어지러운 가운데 알파의 낮은 목소리가 선수를 치듯 먼저 들려왔다.
"잘 왔다. 마침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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