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화 〉 #194 판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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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줘야 할 일이 있다…… 그 말에 이은하는 선선히 끄덕였다.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고무되는 듯했다.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단숨에 정리돼 잡념을 밀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 더 생각이 뻗어나갔다. 환수들을 괜히 붙잡고 있는 게 아니리라. 이 끈적끈적한 불쾌감. 분명 마수화 계획의 일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이번에도.'
이번에도 한 발 늦고 말았다. 이처럼 알파는 진작부터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환수들과 인류의 갈등이 사라지긴커녕 정면대결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 혹시 처음부터 다 알고 움직인 건 아닐까? 말도 안 되지만 어쩌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줘야 할 일?"
"악의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 아직 도망치지 못했다."
"……."
"얼마나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지 확신이 없다."
"도망치고 있다고?"
"그래. 벽을 두르고는 있지만……"
어지간해선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전차를 가져오더라도 흔들리지도 않을 터. 제아무리 초인이라 불리는 헌터라도 어지간해서 부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허나, 부수지 않더라도 만약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다면 넘어가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거기까지 설명하자 둘은 잠깐 서로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끄덕였다. 일의 필요성에 대해 깨달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의외스럽게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알파. 들어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십중팔구……"
최대한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말해왔다. 마수화 계획.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끝냈다고, 매듭지었던 일에서 악의가 이어진 셈. 늑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렇게나 어설펐던가. 아니, 어쩌면 일일이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괜찮다고 덮어놓은 완결된 줄 알았던 일에서부터 다시 폭탄이 터지고야 말았다.
'더 파헤쳤어야 했거늘.'
마랑회의 남은 사람을 살려달라는 백소율의 부탁을 거절하면서까지 절멸시켰음에도 이 꼴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들 정도였다.
까드득 이가 갈렸지만 감정을 치워두웠다.
지금은 그보다 급한 일이 있다. 자기반성에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근원을 제거하고 원흉을 붙잡지 않으면 결국 이번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럼 더더욱 멈춰야겠군."
"그래요. 아직 움직일 수 있죠? 이번이 끝이에요."
명실상부한 마지막 일. 그 말에 이은하는 미미하게 끄덕였다.
"나도 함께 가겠네."
"백록."
"걱정하지 말게. 혼자도 아니지 않은가? 방해가 되진 않을걸세."
"……."
"환수들의 일일세. 내가 손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연한 의지를 보이자 늑대는 결국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건 백록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일을 남에게 맡기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그래…… 알았어. 조심하고."
이미 칠영웅의 영역. 즉, 이미 스승을 따라잡은 듯한 은자림과 어지간한 A급 헌터는 한참 넘어선 이은하까지 동행하고 있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
"너희도 마찬가지다. 악의에 잠식당하지 않게 주의하도록."
"응. 알았어."
걱정 섞인 말을 듣자 고작 그것뿐인데 아까 사라졌다고 여긴 잡념이 다시 떠오르려 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일의 우선순위는 명백하다. 우선 알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부탁한다."
이은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
정면을 가득 채운 광폭한 무리.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숲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수백 수천의 눈이 번뜩이며 노려보는 것엔 누구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부들부들 거리며 단단히 붙잡혀 고정된 환수들은 그 눈동자만을 데구르르 굴려 시선을 떼지 않는다. 집념마저 느껴지는 한기 서린 눈빛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따라오게."
하늘을 걷고 있는 백록. 이은하는 보이지 않는 길을 기꺼이 따라걸었다. 입구는 진작부터 환수들이 막고 있었기에 들어가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알파와 마찬가지로 발판을 만드는 마력의 사용 방식. 그러고 보면 알파가 백록에게 가르침 받았던 적이 있다고 했었다.
아주 예전에 자신이 환계에서 수련하길 바랄 때 분명 그렇게 알려줬었다.……아니, 백록이 말했었던가?
'그래서일까?'
힘의 역학관계는 이미 진작에 뒤집어졌지만 알파가 백록을 대하는 태도는 남들에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왕에게는 존경의 뜻으로 경어를 사용하지만 백록에게는 유독 편하게 말을 한다.
알았다. 그런가. 알겠나 같은 굳어있는 말투가 아니라.
'알았어…… 라니.'
듣고도 귀를 의심할 정도로 부드러운 말투. 도저히 알파가 말한 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혹시 전 팀장님과 단둘이 있을 때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까? 돌아가면 소율이한테 한 번 물어볼까?
"무슨 생각하고 있나요?"
어느새 소리도 없이 지척에 다가온 은자림이 묻자 화들짝 놀란 이은하는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리곤 이미 환수들을 지나쳐 숲 속으로 왔음을 깨달았다.
"그, 그냥 어떻게 쫓아야 할까 막막해서요."
"……."
"정말요!"
의심하듯 눈 사이를 좁히긴 했어도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만 고개를 주억거린 은자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맞는 말이에요. 정말 막막하군요."
"선자님도 그런가요?"
"네. 숲은 광활해요. 운이 좋다면 모를까 무작정 찾는다고 찾아지진 않겠죠. 하물며 알파의 말대로라면 이미 빠져나갔을지도 몰라요."
"그럼 설마 소용없다는?"
"그러기 전에 찾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죠."
문제는 쫓을 방법이었다. 어느정도 추종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변해있었으니까. 부러진 초목과 환수들의 난폭한 발자국만이 잔뜩 찍혀있을 뿐 어디에서도 흔적이라 할만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알파라면 냄새를 쫓았을지도 모른다. 초일류의 궁수라면 이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흔적을 찾았을 테고 홍유리가 있었다면 추적의 마안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나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는 쫓을 방법이 없다. 마력을 퍼뜨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악의로 흘러넘치는 숲을 전부 덮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며칠씩이나 밤을 새느라 엉망인 컨디션인 지금에선 더더욱.
"……벽을 짚으면서 돌아볼까요?"
어차피 탈출구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빠져나가려면 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에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라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 광활한 숲을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적지 않을 거라는 점과 만약 은신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말짱 도로묵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고심하는 사이 백록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악의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네. 따라오게."
"알 수 있다고?"
"환수니까. 감정의 요동침이. 그 중심부가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똑똑히 보이고 있네. 문제는 원흉이 있는지 없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이렇게 만들었다해도, 아니 만든 이상 위험성은 잘 알고 있을 터. 아무리 결과를 확인하고 싶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안전한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확인하고 있을 터다.
"조심히 따라오게."
***
알파가 자괴하고 있음과 함께 이은하는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이 좀 더 똑바로 했더라면 며칠 전 서화의 폭주에서 마수화 계획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전조를 보고도 전조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알량한 도덕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좀 더 제대로 했더라면. 하다못해 알파에게 제대로 알리기라도 했더라면 이 일에 대해 미리부터 알고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광폭화한 환수들과 그걸 붙잡고 있는 알파. 그 모습에 책임을 느끼지 않을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전 팀장님이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래서일지도 모른다. 이래서 알파는 자신이 아니라 전 팀장님을, 그리고 소율이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책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분명 선자님은 이런 상황일수록 일에 집중하라고 조언해주었는데.
한심하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생각의 딜레마. 스스로의 뺨을 때려 마침표를 찍고 심기일전한 이은하는 똑바로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득하리만치 끈적거리는 악의. 가까이 다가갈수록 호흡하는 것조차 어려운, 폐를 쥐어짜는 듯한 악취와 마주해야만 했다.
"……."
이미 마력의 막으로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한 악의. 머리가 지끈거리고 당장에라도 잠식당할 것만 같은 최악의 기분속에서 가까스로 자신을 지탱하며 마침내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조그마한 상자였다.
마냥 상상했던 거창한 방법이 아니다. 심지어 마법진을 통한 대규모 마법도 아니라 그저 조그마한 상자가 열려있을 뿐이지만, 고작이라고 치부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신화 속의 어느 상자처럼 열어서는 안 될 것이 열려있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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