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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90화 (390/407)

〈 390화 〉 #194 판도라 (2)

* * *

잘 찾아낸 모양이다.

움직일 순 없지만 볼 순 있다. 비록 집중을 흐트릴 수 없어 제대로 볼 순 없지만 확실히 근원지에 가까워져 있음은 느껴진다.

근원지. 환수들의 감정을 지배한 부정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순 없었으나 마랑회가 얽혀있다고 하면 짐작가는 곳이 있다.

이단의 탕아. 이젠 누구 하나 남지 않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조직이었지만 놈들이 새긴 잔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침공으로 부서진 서울이 그랬고, 목숨을 잃은 창선과 무노를 비롯한 칠영웅이 그랬다. 거기다 하필이면 키메라라는 끔찍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모조 엘릭서의 미완성품이라는 터무니없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거기서 비롯된 악의가 대체 얼마만한 것인지 적어도 늑대 자신만큼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끝없는 집념으로 이루어진 기적과도 같은 존재인 악의 태동이 어떠했는지를.

"……아마 그쪽 계열."

혹여 흑린으로부터 비롯된 악의는 아닐까 생각했지만, 놓치지 않았다. 여왕의 정수마저 거두어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하물며 신역에 들어섰던 본신으로 행한 일이었으니 거기에 실수는 없었다.

즉, 다른 쪽의 악의다.

마랑회는 비록 탕아들을 계승하진 않았지만 그 방법은 알고 있었을 터다. 백소율을 마녀로 만들었다면 모조 엘릭서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재생을 빼놓고 악의쪽으로 특화시켰다면 이런 결과도 이상하지 않다. 모조 엘릭서의 미완성품. 거기에서 비롯된 악의를 한곳에 모은 것. 십중팔구는 그런 것이리라.

"……."

당연 그만한 악의라면 존재 자체만으로 환수들에겐 더없는 독이 되는 것. 이렇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문제는 다른 환수들이 아니라 요정용이 섞여있다는 것.

부정을 먹어치우고 그 상극에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요정용들조차 집어삼킬만큼 강한 악의. 아무리 뛰어나다곤 하지만……

'정신을 놓으면 그 순간이 끝이다.'

그리고 결국 실패한다면 자신이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환수들의 다리를 모조리 부러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

판도라의 상자.

과거, 가장 높은 신이 결코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함께 판도라에게 주었다는 상자. 여러 설화들이 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온갖 재악이 쏟아져나왔다고 한다.

병과 죽음을 비롯한 해악들이 쏟아져나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온갖 부정한 것들이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적어도 이은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안에 들어있던 것, 그 악의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부정함이라고.

척 보기에는 그리 대단치 않아보이는 상자다. 갈색의 상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그 재질이 뻣뻣하게 연마된 가죽임을 알 수 있었다.어떤 종의 가죽인지까지는 몰라도 주머니와 상자 중간쯤의 형태였다.

'열려있는 가죽 상자?'

마수화 계획에 대한 서류에도 모든 내용이 적힌 건 아니었다. 그저 어디까지나 개요와 일부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바로 이것이야말로 마수화 계획의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렸어.'

마수 그 불길한 어감에서 느껴지는 건 두려움일 뿐이다. 마랑을 같은 맥락에서 생각했기에 벌인 일이겠지만 정말 모르고 하는 일이다.

알파는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누군가의 인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로 올라선 영역. 악의가 아닌 신념을 가지고 도달할 수 있었던 기적이었다.

알파가 새로운 영역으로 발돋움하기위해 대체 어디까지 노력했는지 알고 있는 이은하로서는 고작 이런 짓으로 알파와 같은 존재를 만들 수 있다곤 도저히 생각지 않았다.

무지에서 비롯된 틀린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이미 풀려나온 악의는 암운처럼 떠올랐고 환수들의 감정 속에 깊게 스며들었으니까.

"보이나요? 상자의 내용물."

이은하는 작게 끄덕였다. 열린 상자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연기와 그것보다 더욱 짙은 검정이 심연처럼 들어차 있었으니까. 마치 상자의 바닥에 구멍이 나 그대로 지면 깊숙한 곳까지 무저갱을 만들어놓은 듯하다.

"저걸 없애야 해요. 이미 풀려난 악의는 어쩔 수 없더라도 더 풀려나면 주변 마을이 어떻게 될지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 말씀은."

"오는 동안 봤잖아요."

두통에 시달리듯 머리를 감싸쥔 사람들. 은자림이 말하는 건 바로 그들이었다.

"환수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은자림은 뒤를 흘겼다.

괴로워하는 백록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고개는 떨구어져 있었고 질끈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더욱 뒤엔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대한 마력. 차원이 다른 터무니없는 힘으로 붙잡고 있는 수천의 환수. 차라리 몬스터였더라면 전부 없애버리고 이미 일을 끝냈을 테지만 지금의 알파에게 그런 여력은 없다.

"……사람에게도 영향이 있는 건 분명하군요."

조용한 수면과도 잔잔한 평온을 깨는 불청객. 자꾸만 파고들려하는 부정한 감정에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한 순간이라도 침투를 허용했다간 파도처럼 밀려와 단숨에 집어삼켜지고 말리라.

평온을 유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간의 수양과 가진 마력으로 인해 저항할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피로하긴 해도 이은하 또한 견디고 있는 모양이었고.

"더 말할 필요는 없겠죠. 혹시 모르니 부탁할게요."

즉,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게끔 해달라는 말. 결계를 펴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마력을 짜낸 이은하가 몇 겹이나 되는 벽을 만들었을 때소매로 코를 막은 채로 은자림은 마찬가지로 창 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하얀 빛무리가 모여드는 건 열린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적어도 이은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선향이라 했지?'

후운은 그렇게 말했다. 은자림, 선자인 그녀에게선 선향을 맡을 수 있다고. 그게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는 몰라도…… 이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선자의 창은 마를 멸한다는 것을. 하얀 빛무리를 잔뜩 서린 창끝. 어깨 뒤로 당긴 팔이 비록 도약은 하지 않더라도 투창의 요소를 지킨 채로 움직였다.

한 걸음 내딛음과 동시에 허리를 비틀고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일직선이 되는 순간, 손목이 움직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석적인 그 움직임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동작이었다.

그 한번의 동작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반복했을까. 셀 수도 없는 땀과 노력의 결정.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움직임이 저것이리라. 마침내 그녀의 손을 떠난 창은 쏜살같이 날아가 문자 그대로 상자를 저격했다.

그 재질을 알 순 없지만 알파가 세운 벽마저 꿰뚫었던 창이다. 설령 그 어떤 재질이라도 견딜 수 있을 리 없다……그렇게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상자는 쉽게 꿰뚫리지 않았다. 1초를 10으로 나눈 만큼의 시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전력으로 쏘아낸 창을 막아낸 것이다.곧 꿰뚫리기는 했지만 저항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저만한 악의를 담고 있었던 상자다. 평범한 재질로는 감당치 못할 거란 건 주지의 사실. 하지만진짜 문제는 그 다음 순간, 가죽을 꿰뚫은 창이 내용물과 맞닿은 순간에 일어났다.

"……!"

은자림은 황급히 이은하가 미리 펼쳐둔 마력의 장막 안으로 몸을 던졌다. 슬라이딩하듯 몸을 던지고 그 뒤를 이어 폭발이 일었다.하얀 빛무리와 맞닿은 검은 악의가 폭발하듯 확산된 셈이다.

그리고 시야를 검게 물들이는 사태가 지나갔을 때, 모두 말을 잃고 말았다.

부정 혹은 악의. 자주 그렇게들 부르지만 두루뭉실한 감정의 집합체나 마찬가지인 그것들. 비록 상자 안에 담겨 실체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되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뚝, 뚝. 덜 잠궈진 수도꼭지 끝에서 흐르는 물방울처럼 녹아내린 마력의 막을 타고 검은 부정이 흘렀다.

마력의 막은 모조리 돌파당했다. 수겹으로 겹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뒤늦게 추가하지 않았더라면 휘말리고 말았으리라.

그건 달리 말하자면 마력의 막이 펼쳐지지 않은 곳은 전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는 뜻. 셋을 아연실색하게 만들듯,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숲은 어느새 검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흙은 타버린 직후의 재처럼 검었고 꽃과 풀 그리고 나무들마저 화마가 휩쓴 것처럼 변색돼 있었다.

쉽게 없앨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고작 악의. 어디에선가 비롯됐을 뿐인 부정이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은자림은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가죽 상자를 꿰뚫은 창은 지면 깊숙이 박혀 있었지만 저 창을 다시 쥘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으니까.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는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 있었던 게 아니라, 이제야 열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해야만 했던 일이지만 실수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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