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 #195 판도라 (3)
* * *
만약 판도라의 상자라는 게 있다면 이제야 열리고 만 것이리라.
온갖 재액이 쏟아져나와 검게 물든 숲은 이제 더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역병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방향성이 빗겨간 정신에 작용하는 부정. 그럼에도 실체를 가지고 현실을 침식하는 힘조차 결코 적지 않다.
"……실수였나?"
그래. 실수였다. 근원을 없애겠다는 일념하에 섣부른 공격을 감행하고 말았다. 좀 더 확인하고 천천히 보았어야 한다. 상자 안에 담긴 악의는 막연히 생각한 것보다 더한 무언가였다.
동시에 인간의 집념이라는 게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쯤되면 대체 어떻게 만든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다들 괜찮나요?"
이은하와 백록을 빠르게 살폈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다. 다만 백록이 두통을 호소하고 있단 게 문제가 아닐까.
"괜찮…네. 것보다 더 물러서야겠네."
검게 물든 땅은 점점 그 영역을 확산하고 있었다. 결코 빠르진 않지만 눈에 보일 만큼 확실하게. 저것에 닿으면 어찌 될지는 산천초목이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뚝뚝, 검은 액체가 물방울처럼 떨어질 때마다 많은 것들이 변해간다. 나무는 썩고 풀은 재로 화했으며 벌레는 사라지고 새의 지저귐은 악에 찬 울음으로 변했다.귓가를 어지럽히는 들릴 듯 말 듯한 환청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닿지 않았다. 닿지 않았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만약 직접 닿는다면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 심지어저항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기에 최선의 방법은 아예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물러나죠. 근원을 없애는 걸 실패했다면 원흉을 붙잡아야해요."
"이미 도망쳤을지도 몰라요."
"당연히 그랬겠죠. 하지만 벽이 있어요. 그걸 믿고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죠."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듯하군…"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미 탈출했을 터. 할 수 있는 거라곤 스크롤이 없다고 믿고 찾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악의를 만든 원흉을 찾아내 저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캐묻는 것. 가능하다면 막을 수 있는 방법까지도.
"……창은 두고 가야겠네요."
붉은 창. 화산각룡이 가졌던 살아생전의 굳건함을 그대로 지닌 창은 검은 악의와 맞닿았더라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하지만 창이 변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놓고 가는 게 현명한 판단이리라.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체력이 약한 몇몇 환수가 쓰러지고 늑대는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마력이 아닌 집중의 문제. 그 덕분에 눈을 돌릴 만큼의 여분의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늑대가 받아들이는 정보량은 여전히 터무니없는 수준이었지만 늑대는 대수롭지 않게 의식의 분산과 병렬 행동을 이어나갔다.
마력을 다루는 의식을 수천으로 분할하고, 그런 와중에 의식의 한 구석을 분리해 시각을 통해 받아들아 정보를 받아들이게끔 한다.
그런 늑대의 눈에 보인 건 검정으로 물든, 물들어가는 숲이었다. 분명 어딘가에 담겨있었을 그것이 엉망진창으로 풀려나와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즉, 실패. 근원을 없애는 것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영안에 보이는 그건 끔찍하리만치 역겨운 악의.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한 집념을 가지고 이뤄낸 것. 무지에서 비롯된 집념은 그렇기에 더욱 의심없이 순수한 맹신을 보일 수 있었다.
사람이 이루었다고 보기엔 한없이 순수한 악의. 직접 보지 못했기에 맡긴 것이었지만 직접 보았다면 포기하고 뒤늦게 원흉을 쫓기로 했으리라.
이은하와 은자림…… 아니, 지금의 인류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무리일지도 모른다.
'바포메트의 가죽.'
그도 그럴 것이, 악의를 담고 있었던 건 다름아닌 바포메트의 것. 처형자라 불리던 구획 보스의 가죽.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져가는 악의를 감당치 못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악의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지만 확실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환수들이 지쳐 쓰러지기 전에 이곳까지 도달하고 말 거라는 점. 그랬다가는 모든 게 허사로 변하고 말리라.
늑대의 눈은 악의의 근원을 지나쳐 조금 먼 곳을 바라보았다.
***
"오한이……"
오슬오슬 몸이 떨려온다. 포식자의 눈빛을 받은 먹잇감처럼 송두리째 벗겨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아니, 착각이 아닐 터. 애당초 이만한 벽을 세울 수 있는 존재는 그 밖에 없으리라.
"벌써 쫓아올 줄이야."
과연 신으로 칭송받을 만한 힘이요, 능력이었다. 당장 습격당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으니까. 이미 이 늙은 목숨에 여한은 없다.
'여태껏 운이 좋았지.'
마수화 계획. 한 때 자신이 속해있던 마랑회에선 불허했던 계획. 또 다른 마랑을, 신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쟁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해보지도 않고서 환수를 마수로 만드는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허나 자신은 그런 얼간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계에 내려오는 알케미스트의 피. 현존하는 그 누구보다도 연금술에 있어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장담할 수 있다. 마법사의 정점이 스퀘어 마스터라면 자신은 현자라 불릴 자격이 있다. 연금이라는 분야에 있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선택받았으니까.
과거의 먼 선조로부터 이어진 게 분명하다. 그 공간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지만 지식의 보고라고 불릴 법한 방대한 연금술의 모든 것이 적힌 책.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적힌 책. 여태껏 쌓아올린 지식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대한 지식을 기록한 '만상의 서'를 발견했으니까.
'그래. 그렇고 말고.'
그렇기에 확신이 있다.또 다른 마랑. 새로운 신을 만들 자신이 있다. 고작 마랑의 총애를 받았을 뿐인풋내기나는 여아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자신은 바로 그 신을 다룰 현자가 될 테니까.
'그래서였는데.'
마랑회가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탈퇴를 결의한 건 그게 이유였다. 진작 떨어져나와 자신의 길을 걸었던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자신이 잊혀졌던 모양.
어느 순간 사라졌던 신이 돌아와 그 자신의 이름을 빌려 악행을 저지른 마랑회를 물어뜯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숨어도 피해도 소용없다. 그 어떤 자비도 없이 자신이 알고 있던 마랑회의 모두를 물어뜯고야 말았다.
곧 자신의 차례가 올 거라며 자포자기하고 있던 연금술사는 그 때가 오지 않자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진작에 마랑회를 나왔기 때문이었을까?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막바지에 이르렀던 실험을 재개해 마침내 열매를 맺어갈 무렵.
'하필이면 지금!'
연금술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성과가 아직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순수한 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마랑이 움직임으로써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았다.
환수 사냥. 그에 얽힌 일이라면 분명 자신도 피해갈 수 없으리라.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에 암담해하면서도 연금술사는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끌어모았고 마랑이 움직일동선을 미리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하리라 여긴 곳이 바로 이 장소. 최대한의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연구의 성과는 정말 끝에 다다라 있었다.
하루 혹은 이틀. 그만한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분명 가죽 속의 내용물을 온전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터. 그러지 못한 게 사무친 한이었다.
100%였을 결과물이 그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5할의 확률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부디 환수들이 마수로 변할 수 있기를. 자신의 계획이 성공해 또 다른 신이 강림하기를.
"……그걸 볼 수 없다는 게 한이구나."
연금술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절망을 상징하는 듯한 드높은 벽. 수십 미터에 이르는 높은 벽을 타고 오르기엔 자신은 너무 늙고 병들었다. 만상의 서를 파고드는 시간은 더없는 지복의 시간이었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으니까.
비루한 몸뚱아리로 도망치는 건 도저히 무리.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한다는. 악의에 휩쓸려선 안 된다고 그 자리에서 스크롤을 사용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게 한이었다. 드높다고는 하나 두께는 얼마 되지 않을 벽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 신을 다루겠다는 비원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악의를 재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그리고 가능하다면 죽어서라도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오셨구려.음?"
발소리와 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린 연금술사는 눈살을 찌푸렸다.거기엔 자신이 생각했던 마랑이 아닌 하얀 사슴과 두 사람이 있을 뿐. 원하던 끝이 자신이 상상하던 모습이 아닌 별개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어안이 벙벙한 연금술사는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 이 잡것들은 도대체 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