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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92화 (392/407)

〈 392화 〉 #195 판도라 (4)

* * *

고작 한 사람.

한참이나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건 초라한 차림의 노인. 잠깐은 휘말린 피해자일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다.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면 악의 속에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뱉은 말이 그가 악의를 만들어 낸 장본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왜 마랑이 아니라?"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는 그의 입에서 분명히 튀어나온 단어. 숨길 생각도 없는 듯한 그를 향해 은자림은 나뭇가지를 꺾어 겨눴다.

다듬어지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뭇가지. 누가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노인, 연금술사는 그러지 못했다.

막 꺾었을 뿐인 나뭇가지가 천하의 더 없는 명검처럼 보인다. 그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교과서적인 정석이 너무나도 완벽에 가까웠기에. 한 박자 늦게 연금술사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누군가 했더니 스승 잃은 제자였구먼."

"순순히 항복해. 그럼 죽이진 않을 테니까."

제법 달렸는지 숨을 헐떡이는 모습과 달리 당당히 선언한다. 흔들어보기 위해 건넨 말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태도였다.

"허, 죽이지 않는다라. 그럴 권한이 있는가?"

"……."

"환수들에게 해를 끼쳤다고? 인정하네. 하지만 그래서?"

연금술사는 품 속을 뒤적거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던 이은하는 만약 그가 꺼내는 것이 스크롤이나 총기같은 위협이 될 물건일 경우 곧바로 손목을 꺾어버리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꺼낸 건 생각지 못한 것. 여러 잔해들이었다.

이를테면 요정의 날개나 환수의 비늘같은 것들. 한껏 움켜쥔 그것들을 허공에 흩뿌렸을 뿐이다.

"대체 무슨 죄로 날 잡아가겠다고? 산천초목을 오염시켜서? 그도 아니면 밀렵죄인가?"

실소한 그는 다시 품 속을 뒤지더니 이번엔 금화를 꺼내들었다. 그걸 건네주는 듯하더니 다시 품 안에 갈무리했다.

"게다가, 경찰도 아닌 자네가? 한낱 타국의 헌터일뿐인자네들이 무슨 자격으로?"

궤변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자신에겐 아무런 자격도 없었으니까. 대표 클랜에 협조를 요청하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 확증도 없으면서 노인을 어떻게 할 자격은 없다. 하물며 이는 대표 클랜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일. 월권을 넘어선 괜한 참견이리라.

그딴 건 진작에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네가 신경쓸 일은 아냐. 항복하지 않으면 죽인다. 대답은?"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태도. 연금술사는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과는 다르구먼. 선자라 불릴 정도로 온화하다더니."

"대답은?"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연금술사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항복하겠네. 그래서,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가?"

은자림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반응한 이은하는 왜곡을 조절해 그의 양 손을 묶어놓았다. 보이지 않는 마력의 구속.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으스러뜨릴 수 있으리라.

"대답해. 저 악의를 만든 이유를. 그리고 어떻게하면 막을 수 있는지도."

"악의라…… 그렇게 보였는가?"

"논쟁할 생각 없어. 대답이나 해."

나뭇가지가 살갗을 파고든다. 날도 없는 나뭇가지에 불과하건만 예리한 날붙이에 베인 것처럼 생채기가 생겨 피가 흘러내렸다.

"흠… 없네."

"없다고? 그럴 리가."

"난 마법사가 아닐세. 일개 연금술사일뿐."

이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그의 몸 속에 담가 마력은 결코 우습게 볼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어지간한 마법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 내가 뭣하러 뒷일을 신경쓰겠는가?"

끌끌거리며 연금술사는 웃었다. 마치 뭘 바라냐는 듯이 조소하는 웃음에 은자림은 입술을 짓씹었다.

까놓고 말해 연금술사는 무시당한다. 마력이라는 힘을 만능에 가깝게 다루는 마법사들에 비해 그들의 존재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으니까.

청동을 금으로 바꾼다. 은을 금으로 바꾼다…… 원소의 구조 자체를 바꿔버리는 과학 법칙을 위배하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상식같은 건 깨진 지 오래였다.

마법사들은 부유섬을 띄워 인류를 수호했지만 연금술사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몬스터의 침공으로 당장 살아남기 급급한 인류에게 금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금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아름다운 쓰레기에 불과했다.

무시당하고 배척받는 연금술사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즉, 타인이 어떻게 되든 간에 신경쓰지 않는단 말을 돌려서 한 것이나 다름 없다.

실제로 자신의 연구에만 매진하는 그런 이들이 대부분. 은자림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책임이 없다고 할 생각인가? 바깥에선 이미 소란이 일어나고 있어. 이런 게 새어나가면 환수는 물론이고 인류에게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겠지. 그걸…… 아니, 됐어. 막을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대답해."

"흠. 이미 답하지 않았나."

듣지 못했냐는 듯한 말에 은자림은 나뭇가지를 당겼다. 연금술사의 목에 닿아있던 상처가 더욱 깊어지고 흘러내린 피가 상의 안쪽으로 흘러들어갔다.

"마지막 기회야.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걸."

이번에 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그 의지가 명백히 드러나있었다.

"끌끌, 그럼 난 초라하게도 죽겠군. 고작 나뭇가지에 목이 달아나는겐가?"

혼자 웃고 떠들고 묻고 답한 연금술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만상의 서를 익힌, 현자라 불려 마땅할 자신이 그렇게 볼품없이 죽어서야 될 일인가.

가만 고개를 들어올리니 새하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몰려드는 암운. 어쩌면 목적을 이루는 순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알려줌세. 그래도 공짜는 아닐세. 데려다주게나. 마랑과 만나게 해준다면 알려주지."

거래를 청하는 말에 은자림은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 웨이브치는 것처럼 좌우로 움직이는 두사람. 홍유리와 페리가 TV화면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 있는 소파에 앉아 지켜본 백소율은 슬슬 이런 풍경이 익숙해지고 있음에 가만 커피를 들이켰다.

설탕까지 넣어 달게 타 보았는데도 유독 쓰게 느껴진다. 홍유리와 페리뿐만이 아니라 두 손을 꽉 쥔 요정들이 마치 열기에 휩싸인 것처럼 응원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난장판이네."

그나마 다행한 점이라면 마당겸으로 삼은 곳이 제법 넓어 주변에 소리가 들리진 않을 거란 점일까. 그런 와중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백소율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속보로 흘러나오는 내용이 다소 터무니없었기에. 저도 모르게 동영상을 재생한 백소율은 그게 끝날 때까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더라도 주변 나무보다도 훨씬 큰 건축물. 아니, 과연 그걸 건축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작은 산이나 절벽이라 착각할 만한 벽이 서 있었다. 문제는 그게 왜 솟아올랐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기도 했다. 갑작스레 솟아오른 벽과 두통을 호소하거나 이성을 잃고 난폭해진 사람들. 마치 좀비처럼 물어뜯으려고조차 하는 모습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여주는 영상을 몇 번인가 돌려보며 백소율은 직감했다. 바로 저곳에 알파가 있노라고.

***

환수들이 지쳐 제 풀에 쓰러져 갈수록 늑대에게는 갈수록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의식의 분산이 한데로 모여 이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그러자 주변에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며 은자림과 이은하가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근원을 없애는 건 실패했지만 원흉을 붙잡은 것엔 성공한 모양. 사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알고 있었다. 저 먼 곳의 소리조차 늑대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으니까.

'방법을 알려주겠다라.'

마수화 계획이라고 했던가. 환수를 자신처럼 만드는 것. 터무니없는 발상이고 처음부터 전제가 틀려있다. 하지만 무지에서 비롯된 집념은 무진장한 악의를 만들고 말았다.

모조 엘릭서의 미완성품 수십 수백개 분량의 악의. 고작 한 사람이 저만한 악의를 만들기 위해 어떤 짓을 해왔을지는 얼추 상상할 수 있었다.

'만상의 서라고 했나.'

입안이 쓰다. 만상의 주인이 가진 기억을 모두 수습했지만 사실, 그건 본신에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식은 어느정도 가져왔으나 그 방대한 기억은 대부분을 놔두고 왔다.

고작 정신체의 몸에 그만한 기억을 담고 있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사념에 지배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탕아들은 궤멸했어도 그녀가 유산처럼 남긴 지식은 어딘가에 잔존하고 있음을.

영겁의 시간동안 연금과 강령술 그리고 주술에마저 시간을 쏟았던 그녀의 지식은 이미 비할 데 없는 영역에 다다라있다.

고작 읽고 따라했을 뿐인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허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일개 연금술사에게 저만한 악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으리라는 점.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가. 근원을 없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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