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93화 (393/407)

〈 393화 〉 #196 드리운 것

* * *

"오, 오오."

연금술사는 멈춘 환수들을 보곤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자신의 성과에 만족한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을 신기하게 느끼는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은자림의 재촉에 빠르게 걸으면서도 연금술사는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한참이나 이어진 길. 쓰러진 환수와 멈춘 환수들을 지나치며 도착한 곳엔 당당히 대지를 딛고 선 한 마리의 늑대가 있었다.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털빛을 지닌 늑대. 흔히 떠올리는 모습과는 그 크기도 생김새도 달랐지만 그 무엇보다 늑대라는 말이 어울렸다.

당장에라도 달릴 것처럼 길게 뻗은 다리는 그 어떤 사냥감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만 같다. 사자와도 같은 풍성한 갈기는 위엄과 함께 제왕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붉은 눈과 마주쳤을 때, 심령을 제압당한 듯한 압박에 숨이 멎고 말았다.

송두리째 벌겨벗겨진 듯한 착각. 아니, 실제로 그러하리라. 걸치고 있는 옷이나 품 속에 든 것들 따위는 전부 다 꿰뚫어보고 있을 테니까.

꼭 한번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러했다.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어 있다. 고작 한 번 대면한 것만으로 자신의 바닥 따위는 이미 진작에 꿰뚫어 보았으리라. 이것이 마랑. 두말할 것 없이 세계를 뒤흔드는 힘을 가진 마수.

'그럴 만도 했구먼.'

연금술사는 뒤늦게 이해했다.

비록 이해 관계에서 비롯된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했던 마랑회가 왜 그를 신으로 떠받들었는지를. 듣고도 믿을 수 없던, 단순히 신화라고 생각했던 몇몇 일화를 이제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공손히 모을 뻔한 두 손. 가까스로 참아낸 그는 마랑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러나 자신의 감상과는 달리 마랑은 그리 말했다. 마주본 눈동자에는 공허하리만치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다. 그야말로 무념. 생각도 감정도 일절 읽히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말소리에 섞여 귓가를 맴돌았을 때,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그를 만나러 온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역시 모르고 있군."

확정지어 말하는 그. 무엇을? 이란 생각은 쓸데없는 것. 쉽게 속여넘긴 둘과는 달리 자신의 거짓부렁따윈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미 진실따위는 우습게 꿰뚫고 있단 강한 직감. 이렇게까지 대화가 성립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자신따위는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사실에 너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과연, 정답이오. 저걸 멈출 방법 따위 내게는 없소."

"."

그 으르렁거림에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만 연금술사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래봤자 통째로 먹히고 말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지만 그 행동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3초. 기껏해야 그 정도가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리라. 연금술사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소리쳤다.

"기, 기다리시오! 분명 멈출 방법은 없소. 하지만 지연시키는 정도는 가능하지!"

"……."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외까?! 이 방법이라면 그 시간을 벌 수 있소!"

그 생각은 대면한 뒤에 더 강해졌다. 저만한 존재에게 불가능한 게 뭐가 있겠는가? 광폭화한 수천의 환수를 제압하고도 여력이 남아있는 존재를.

그 광대한 마력을 보았을 때, 심해와 같은 깊이를 보았을 때 맞선다는 생각 따위는 진작에 포기해버렸다. 다만, 여기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신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열망에 찬 꿍꿍이를 숨기고 연금술사는 자신이 아는 것들을 성실히 토해냈다.미약하게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에게 협조하는 것뿐이었으니까.

***

만상의 서. 연금술사가 섭렵한 지식의 대부분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본래도 연금술사였던 그는 만상의 서를 읽음으로써 새로운 영역에 손을 뻗었다. 틀림없이 다른 연금술사와는 차원이 다른 지식과 실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적혀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작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종이가 닳고 닳을 지경이 되었더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순 없다. 하물며 그렇게나 고차원적인 지식을 실현시키는 일임에야. 실제 연금술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가진 지식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자칫 잘못하면 뒷감당조차 못했을 일조차 지금은 얼마든지 실현시킬 수 있다. 마랑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정말 많았지만 이 또한 그런 이유들 중 하나였다.

사철 가루를 뿌리고 연금술을 위한 진을 그린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존재가 굽어 살펴주기를 바라며 그려넣은 기하학적인 도형과 문양, 문자는 사용하고 있는 연금술사 본인조차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허나, 단순히 따라하는 것만이라면 어렵지 않다. 변형이 아니라 서에 적혀있는 그대로의 원본을 곧이곧대로 사용한다.

시간과 장소의 좌표. 그에 해당하는 술식만을 바꿔놓고 나머지는 전부 그대로. 그리고 연금술사는 완성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준비를 청했다.

"부, 부탁하오."

잠깐 자신을 꿰뚫어보듯 하던 눈빛은 이내 마법진을 향한다. 무언가를 검증하기라도 하듯 보고 있지만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아득한 차원 너머의 존재라한들 한계는 존재한다. 배우지도 않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알 수는 없다는 점. 연금술사는 그가 자신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돌풍에 눈을 뜨지 못했을 무렵. 연금술의 진은 여태 본 적 없었을 만큼 아름답고 찬란한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연금술사가 지식의 절반도 채 활용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연금술의 기초가 되며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절대적인 대원칙. 무언가를 바랄 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비해야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

만상의 서에 적힌 연금술의 지식은 하나같이 궤를 달리할 만한 위대한 지식이었던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들어본 적조차 없는 무언가를 대가로 요구하기까지도 했다.

허나, 지금이라면 괜찮다. 왜냐하면 그 대가를 바치는 건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능히 하늘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를 터무니없는 마력이 연금술을 움직이게끔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가였으나 연금술사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마랑 스스로가 자신의 앞발을 물어뜯었기 때문에.

그가 대가로 지불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자 연금술사로서의 시꺼먼 탐욕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았다.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러하리라.

그 가치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분명히.

"무, 무슨?!"

허나 그 피가 연금진으로 스며들었을 때 연금술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하다. 과해도 과해도 너무나 과하다. 모래 한 줌을 얻기 위해 보석을 바친 것이나 다름 없다.

과유불급이라. 넘치는 건 모자르는 것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 연금술사는 지금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분명 연금진이 감당하지 못하고 부서지고 말리라. 십중팔구 폭발해 사방팔방이 초토화되리라.

죽었다, 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가 걱정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랑이 들어올린 앞발에서 떨구어진 피가 찬란한 푸른빛으로 빛나던 연금술의 진을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충분한 대가는 바쳤다. 마력을 주입한 시점에서 연금진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더한 대가를 바친 순간, 변했다. 변하고 말았다.

더는 연금술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 내에 있지 않았다. 마랑이 바친 피는 연금진이 요구한 대가를 훨씬 초과했다.

피라는 것은 존재를 나타내는 증명이기도 하다. 고작 한 방울의 피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지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아룡의 피조차 같은 값의 금조차 비싸게 거래된다. 용에 더 가까울수록 가치가 높아진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둘도 없는 촉매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허나, 용 따위가 아니다.

마랑의 피는 존재하지 않는 것. 왜냐하면, 그에게 피를 흘리게끔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없으니까. 세상에 없는 물질을 머금은 연금진은 여전히 망가지지 않았다. 희소성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피를 촉매로무언가를 이루고 있다. 이미 자신의이해를 한참이나벗어난 무언가를.

'설마 연금술의 지식이 있었다고?'

연금술사는 침을 삼켰다.

어느샌가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름돋는 악의가 몰려오는 것에 맞서 흔들리는 땅은 점차 진동을 거세게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금씩 갈라지는 대지. 서 있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와중에 연금술사는 기어코 그 틈새 속에서 보고야 말았다.

바로 그림자가 드리웠음을.

땅 위가 아니라,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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