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4화 〉 #197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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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진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본래 연금술사가 하려던 것과는 달랐다.
본래 연금진이 세우려던 건 일종의 결계. 고도의 술식과 마력이라는 대가를 바쳐 악의에 저항할 시간을 벌어다줄 결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이런 걸 과연 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실제로 사용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지만 이건 절대 정상이 아니다.
감히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이건 차라리.'
결계라기보다는 세계. 별개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만 같지 않은가? 하물며 보통의 촉매도 아닌 마랑의 피를 이용하여 쌓아올려진. 한 가지 확실한 건 촉매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분명 무언가가 바뀌었다.
십중팔구 아까 바람이 불었을 때의 일이리라.
'……정말 알고 있었던 건가?'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을 지식을. 위대한 연금술의 지식을!
연금술사는 아연하게 마랑의 뒤를 쳐다보았다.
***
"아."
서서히 환수들의 눈빛에서 광기가 사라져간다. 광폭화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이 명백히 안정을 되찾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스며들었던 악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연기처럼 흘러나와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진다.
그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던 이은하는 주변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아아, 그래. 이건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이젠 무너져 두번 다시 올 수 없었을 거라 여겼던 환수와 요정의 고향이었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세상. 올려다보면 구름과 하늘 대신에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자리해있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세계였다.
'환계.'
여왕이 만들어 가꾸었고, 환수와 영물이 살아가는 터전. 그리고 이젠 기억 속에서밖에 남지 않은 멸망한 세계.……그럴 터인데, 어떻게 남아있는 걸까.
넋 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는 알파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환수들을 붙잡았던 속박을 풀어놓고 있었다. 더는 그들이 난폭한 짓을 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다는 것처럼.
"이, 이게. 대체 어, 어떻게?"
무척이나 당황한 것처럼 떠듬거리는 말소리. 믿을 수 없단 것처럼 눈을 크게 뜬 백록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허나,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환계. 사라져 없어진 고향을 다시 눈에 새겼을 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비단 백록뿐만이 아니다. 아까까지 날뛰고 있던 환수들 모두가 안식을 되찾은 것처럼 평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땅이야말로 다툼없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으니까.
"다신, 다신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네."
환계의 주인되는 여왕은 숨을 거두었다. 그 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실상을 알고 있는 이는 적었지만, 적어도 백록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런만큼 그가 느끼는 감상은 보다 각별한 것이리라.
투쟁속에서 아둥바둥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설령 늑대의 비호가 있더라도 인간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법. 언젠가 긴 삶속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 의심치 않았다.
허나, 이는 어떠한가. 이곳에서라면 싸움도 다툼도 없다. 그토록 바라던 평화를 가슴 속에 새기고 불안을 잊을 수 있을 터였다.
유일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건 은자림. 환계에 들른 적 없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일이었으리라. 이은하는 귓속말로 이곳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가 바로 환계이노라고.
***
진을 그린 연금술사 본인도 모르고 있는 듯했지만, 도형과 문자에는 당연 의미가 있다. 그건동양의 오행과 서양의 사대천사의 좌를 진 속에 새겨넣음으로써 시간을 지연시키는 연금술이었다.
연금술이라곤 했지만 사실 연금술이라고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신학과 강령술. 그리고 마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를 섭렵한 그녀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는 아직 만상의 서가 필요했던, 초월의 영역에 들어서기 전 만상의 주인이 만들어낸 고뇌의 증거이기도 했다.그렇듯 영원이라는 권능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필요와 바람에 의해 발현된 힘이었다는 뜻이다.
"떠올랐다."
기억을 잃은 건 아니다. 두고왔을 뿐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놔두고 온 지식이 떠오를 리 없다.
본신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떠올랐다.'
떠오르고야 말았다. 생생한 기억과 지식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가 물밀듯이 흘러들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말인즉, 무언가 이변이 생겼다는 뜻.
외우주에 있는 자신의 본신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
늑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사실, 그럴 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시력을 넘어선 영안이 저 하늘과 우주를 꿰뚫고 아직은 머나먼 차원을 읽어내렸다. 정수와 마력이라는 빛보다도 아득히 빠른 매개체가 늑대의 눈에 아른거리며 미래의 광경을 비추었다.
그렇게 시공을 초월해 무수히 쏟아져내리는 별무리 사이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시간과 공간을 격하고 서로가 서로를 인지한 셈.
'성공했…나?'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더는 이깟 일에 신경쓸 시간이 없어졌다. 한없이 0에 가까운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확률이지만 혹시라도 잘못됐다면 상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 벌어지리라.
그때는 설령 세계가 어떻게 되든 간에 본신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영향을 끼치더라도.
"……끝내야겠다."
밀려드는 악의. 한 사람의 인간이 만들어낸 집념. 만상의 주인이 쌓아올린 지식을 익힌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형언하기 힘든 악의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이어 몰려든 악의는 쓰나미처럼 파도치며 높게 치솟아 결계를, 환계를 때려부술 것처럼 덮쳤다. 허나 늑대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 세계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만약 그랬다면 모형정원을 증오했던 어느 호랑이의 손에 진작 무너졌으리라. 개인이 쌓아올린 악의가 무너뜨리기엔 너무나 견고했다.
설령, 그것이 임시로 만든 가짜라한들.
'그래. 가짜다.'
고향에 돌아왔다고 기뻐하는 환수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이 세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주춧돌을 쌓아올려야 이룰 수 있을까. 그 여왕조차 종말에 의해 세계가 무너질 때마다 새로이 창조하며 영락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지금의 자신이 유지하기엔 힘겹다. 어디까지나 피와 마력을 매개체로 연금진의 힘을 빌려 세계를 투영했을 뿐. 머잖아 무너지고 말리라.
"오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두 손을 감싸쥐고 무릎 꿇은 연금술사가 감탄을 흘리는 게 보였다. 파도치는 악의는 침범하기는커녕 닿지도 못하고 소멸했으니까.
물론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자신뿐이리라.
머잖아 모든 악의가 소멸했을 때, 늑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환수 사냥에서부터 시작된 일은 마랑회와 만상의 주인이 남긴 유산에마저 이어져 있었다.
이를 끝으로 환수 사냥꾼들은 전부 처리했다. 그 뒷감당으로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르나 늑대는 신경쓰지 않았다.
정의가 아닌 신념. 그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는 것뿐. 누군가의 평가나 칭찬을 바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일단락되었다.
"끝이다."
담담하게 선언함과 함께 늑대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을 떨구는 환수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백록이 고개마저 떨구었을 때, 늑대는 옆을 보았다.
아직까지 기도하는 노인. 비루한 연금술사의 표정은 환희에 들어차 있었다. 그 생각은 너무나도 쉽게 읽힌다.
비록 자신의 손을 빌렸다하나, 일시적으로나마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기초가 된 연금진을 그려낸 건 그였으니까. 만상의 서를 따라했다고는 해도 인류사에 유례없는 기적이었다.
염원을 이루었다는 듯이 만족을 품고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한 조각의 여한조차 없이 맑다. 죽일테면 죽이라는 듯한 눈빛에, 아니 오히려 그걸 바라는 듯하자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널 죽이지 않을 거다."
"……? 살려주겠다는 거요?"
늑대는 답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이미 여기서 지체할 시간따윈 없었으니까. 곧 무너질 거라 한들, 굳이 자신의 손으로 부술 필요는 없다.
잠깐이나마 환수들이 고향의 향수를 느낄 수 있기만을 바랄뿐.
***
지나쳐간다……
살 수 있다면하는 바람은 있었다. 마랑을 보았으니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 확률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희박할 터. 왜냐면 마랑은 자신의 속내 따위는 진작에 꿰뚫어보았을 테니까.
살 수 있을 리 없다고 체념했건만, 이는 무슨 일인가?
'살 수 있는 건가?'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적같은 게 아니다. 그가 자신을 살려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바라고 있다.
'그렇군. 외로운 게요?'
절대자의 고독. 연금술사는 자신을 살려둔 이유를 그리 해석했다. 그렇다면, 목숨 값을 보답해야만 한다. 반드시 또 하나의 마랑을 만들고 말리라.
가슴 속을 결의로 가득 채우고 불끈 두 주먹을 쥐었을 때, 연금술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모를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서. 수십 개의 시선이 화살비처럼 박히는 듯하다.
"……?!"
이윽고, 고개 돌린 그는 눈을 부릅떴다.
거기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환수들. 각기 다른 시선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살려준 게 아니다. 넘긴 것이다. 마랑 자신이 아닌 환수들에게 자신을 넘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연금술사는 도망치려 일어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어디로, 어디로 가란 말인가? 완전히 격리된 별개의 세계에서 대체 어디로.
허무한 웃음과 함께 스스로를 현자라 칭했던 초라한 노인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연구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누구 하나 알아줄 리 없는 쓸쓸한 최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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