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화 〉 #198 사과
* * *
가죽을 장갑처럼 둘러 그대로 창대를 쓸어내렸다. 너무 질겨서 좀처럼 찢어지지 않는 가죽. 상자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을 땐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눈에 익은 모습이다.
"바포메트……"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악의를 담기 위해선 못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할 터.네버랜드의 제 1구획을 담당하던 보스. 달리 처형자라 불리던 끔찍한 괴물의 가죽이라면야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음. 괜찮은가?"
"아무렇지도 않네요."
사실을 확인해보겠다는 듯이 오목하고 깊은 눈이 꿰뚫어보듯 마주해오자 은자림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만약의 사태. 악의에 자신이 침범당했을 경우를 대비해 동행을 부탁한 것이었으니까. 다행히도 그 만약이 벌어지지 않아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환수들의 고향이라던 세계가 구축되며 악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양. 터무니없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가?"
"……?"
"굳이 은하만 딸려보낼 이유는 없지 않았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던걸요. 계속 고민하고 있었으니 눈치껏 비켜줘야겠죠."
"고민?"
"……아마 쓸데없는 생각인 것 같지만."
짧게 한숨 쉰 은자림은 가죽과 창을 갈무리했다. 지치긴 했지만 이젠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개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과해야한다고 했던가……? 아마 마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지 않을까. 생각은 깊은 만큼 마음 또한 넓어 그런 사소한 일을 담아둘 사람이 아니다. 아마 혼자서 안절부절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번에 그를 만나며 그 생각은 더 강해졌다.
그래도 그건 알파의 입장. 이은하에게 있어선 떨쳐내지 않으면 다신 얼굴을 보기 힘들 만큼 안에서부터 좀먹을 만한 일이었다. 물론 십중팔구 해프닝으로 끝날 테지만 혹시나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입장상 자신은 이미 포기했다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그녀를 위함이기도 했다. 어쩌면 대리만족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저열한 감정에서 비롯된… 생각이 깊어지자 은자림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좀 더 고향에 있고 싶었을 텐데."
"걱정말게. 충분히 담아두었으니."
감정에 북받쳐 깨닫지 못했지만 환계 바깥에서 본 환계는 가짜에 불과했다. 한없이 흡사하고 유사하지만 결코 진짜는 될 수 없는 조그마한 가짜. 분명 머잖아 무너질 테지만 그래도 지친 심신을 달래기엔 더없는 쉼터가 되리라.
"그리고 도와줘서 고맙네."
"……."
"자네들 둘이 없었더라면 나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걸세."
이은하와 은자림이 없었다면 연금술사를 놓치고 같은 일이 반복됐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났을지도 몰랐고.
그나마 이번엔 늑대가 있어 망정이었지 그가 없었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진 상상만 해도 암담하다. 자칫 잘못하면 인류와 환수의 전면전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니까.
"정말이지, 고맙다고밖에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할 지경이군."
"자책하지 말아요. 백록. 당신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한 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음. 고맙네."
***
상념에 빠져 한참 달리고 있던 늑대는 꼬리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꽉 쥐고 붙들려있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봤더니 정말 매달려있는 이은하가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음속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니 들릴 리 없었지만 입모양을 보건대 같이 가자는 말이리라. 속도를 늦추는 대신에 꼬리를 휘둘러 등에 업은 늑대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따라왔나."
"호, 혼자 보내기 싫어서?"
"……."
"……사,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말해보라고 고개를 까닥이자긴장을 떨쳐내기 위해 크게 심호흡한 이은하가 한참이나 소리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에 늑대는 슬쩍 고개를 돌렸고, 마침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해해서 미안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아서. 그, 그런 주제에……"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쿵쿵거리는 게 들릴만큼 커다란 심장 소리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심호흡한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움도 안 되면서 발목 잡아서 미안해. 상처줘서 미안해. 내가 괜히!"
무언가 응어리진 것이었으리라. 구구절절한 감정이 전해지는 목소리에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해서가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말인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여기 있어 주었기에 연금술사를 잡고 일에 매듭을 지을 수 있었으니까. 혼자라면 아무래도 힘들었으리라.
'그나저나.'
난처하다.
내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그런 분위기가 아니게 됐다. 이대로 놔두고 갔다간 돌아올 때까지 혼자 울고 있을 것만 같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방해? 발목? 상처? 짚이는 구석이 없어 되묻고 싶을 정도였지만 창백한 안색이 척 보기에도 정상은 아니었기에 차마 그러질 못했다. 심신미약…… 그래. 딱 그렇게 보였다.
"일단 진정해라."
들리지 않은 걸까. 아직까지 자신은 생각나지도 않는 잘못을 제멋대로 쏟아내는 모습에 늑대는 황당함을 느끼고 말았다.
환수 사냥꾼들을 척살하면서 골치아팠던 건 사실이다.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던 적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수 사냥이란 행위에 대해서였지 그녀와는 하등 관련 없는 일. 엉뚱한 사과를 받아도 곤란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렇다기보다 환수 사냥으로 그녀와 자신이 얽혔던 일은 달리 없지 않은가. 환수 사냥꾼을 척살하기 위해 움직였던 자신과 그를 살리기 위해 움직였던 그녀가 대립했던 때이리라.
'…….'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소해도 너무 사소했으니까. 러시아 서쪽 끝에서 보았던 그 광경에 비하면 그야말로 실소가 나올 정도로나.
어느새 정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늑대는 생각을 정리했다. 여왕의 부활에 대한 건으로 일분 일초가 급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주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네가 틀린 게 아니다."
"……?"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는 듯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쏟아내던 말을 멈추자 늑대는 계속 말했다.
"서로 생각이 달랐고 하려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 먼젓번의 아주 오래 전 일과는 다르다. 이번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적어도 늑대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환수를 지키고 싶었다. 그건 내게 있어선 옳은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아니었을 거다."
약속이 있었다. 말로 꺼내지도 않았지만 여왕의 자식인 환수들을 지켜야한다는 의무. 그런 약속과 책임이 분명 자신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었으리라. 환수를 사냥한 이들의 이유는 대부분 같잖은 탐욕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겐 분명 그럴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 환수의 가치는 탐욕만도 못한 가벼운 추였으리라.
"수만 명을 죽였다. 그렇게 환수들을 살렸지만 이게 옳은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들은 가족이고 친구였으리라. 그럼에도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이 일은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었으니까. 설령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미움 받고 손가락질 당하더라도.
……그럼에도, 눈물은 보기 싫었다.
"너는 꼭두각시같은 게 아니지않나."
"……."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했다. 너 또한 그랬을 테고. 어쩌다 한번 부딪쳤을 뿐이다. 설령 생각이 바뀌어 그게 틀렸다고 생각해도 마음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난……"
"와줘서 고맙다. 도움이 됐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며 늑대는 멍하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고 있나.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다."
도리도리 젓는 고개에 눈물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결국 울지 말라고 했더니 목놓아 엉엉 울기 시작하자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
여기까지 등 떠밀려 왔는데도 차마 한 걸음 내디는 게 어렵다. 안에서 응어리진 것들이 단단히 눌어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따라왔냐고 들었을 땐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새하얘지고 말았다. 차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얼버무리고 말았다.
도대체 뭐라고 한 걸까. 어쩌다 쏟아낸 말들을 횡설수설하며 혼자 떠벌리고 있자니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었다.
대체 무슨 낯으로 따라왔을까. 이번에도 발목이나 붙잡고 말 텐데. 자신이 멀리서 보이는 듯하자,
'아.'
속으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이미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뒤에서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앞에 선 자신이 울먹거리며 무어라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어이없었으면 알파는 한숨을 쉬고 있었고. 쥐구멍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속에서 한 마디 말과 함께 번뜩 정신이 들었다.
"네가 틀린 게 아니다."
스스로를 부정한 자신을 또 한번 부정하는 말. 찬찬히 읊조리며 자신의 허물을 숨기지도 않고 인정하며 알파는 자신을 위로해주었다.
틀린 게 아니라 달랐을 뿐이라고. 마음 쓸 필요는 없다고. 가슴에 사무친 응어리가 봄날을 맞아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져간다.
고작 말 뿐인데도 간질거리는 바람이 불어와서, 그리고 진심이라는 게 느껴지고 말아서.
"……."
질끈, 입술을 씹고 말았다. 울고 싶지 않다. 울고 싶지 않은데…… 이미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작에 흘러내린 눈물을 그가 닦아주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머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차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보다도,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삼키자. 삼키자. 그렇게 다짐했건만,
"네가 틀린 게 아니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다."
끝까지 자신을 위로하는 말에, 그 진심에 결국 홍수처럼 흘러나온 물줄기에 엉엉 목놓아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