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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96화 (396/407)

〈 396화 〉 #199 토로

* * *

"이제 좀 진정했나?"

페엥, 하고 눈물과 같이 흐른 콧물을 뱉어낸 이은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응… 미안."

"자꾸 사과할 필요는."

늑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입에 붙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해봤자 쉽게 고쳐지진 않을 테니까.

"그것보다 왜 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그러자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우러 왔다고. 그런데 별 도움은 되지 못한 것 같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었음 좋겠다고…… 종종 생각해."

무릎을 끌어안은 이은하는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어느새 궁상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한참 울어서 머리에 수분이 부족해진 걸까. 자질 않아서 머리가 몽롱해진 걸까. 아니면 사과해서 알파가 괜찮다고 해서 안심해버린 걸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을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선자님 발목이나 붙잡았고. 난 늘 그래. 차라리 혼자였으면 더 잘하셨을 텐데."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진심이었다. 자신이 선자님 같았다면 첫 만남부터 달랐을지 모른다. 혹은 홍 팀장님 같았다면 어디서든 똑부러지게 잘 했으리라. 만약 소율이였다면 설령 안 됐더라도 끝까지 독기를 품었으리라.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정말 하나같이 어정쩡해서 제대로 한 게 없다. 그게 싫어서 알파가 사라진 동안에 나름대로 노력해봤는데 실력은 늘어도 얼빠진 정신머리만큼은 도저히 고쳐지질 않는다.

그런 생각이 요즘따라 갈수록 강해져서, 환수 사건이 계기가 되어 폭발하고 말았다.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면 평생 제자리 걸음이나 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나라도 도움이 됐을 텐데."

"그런가."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게 아니라, 네가 그대로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 있겠냐며 손사래치며 웃는, 가짜로 웃는 모습에 말해주기로 맘 먹었다. 아마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위화감에 답해주기로.

"아주 오래 전에 사실, 세상은 몇 번이나 멸망했다."

"……."

"종말이라는 괴물이 찾아와서, 혹은 그 일부인 멸망을 막지 못해서."

거기까지는 익히 알고 있는 얘기이리라. 오래 전에 홍유리와 함께 들었을 테니까.

"아무 가망도 없이 멸망하고 지하에 숨어살던 사람들. 그리고 처음부터 바깥 세상을 모르던 어린 소녀가 있었다."

"……."

"아주 오래 전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았고 가까스로 생을 이어가던,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꺼낼 얘기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녀의 기억을 수습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주 머나먼 옛날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마력을 사용했고 깨달았던 보잘 것 없는 소녀."

"비극에서 태어나 평생 비극을 겪으며 살아갔고 괴물과 싸우다 자신마저 괴물이 되고 만."

"미약한 희망을 잡지 못해 몇 번이고 무너지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그녀의 삶은 비극 그 자체였다. 종국에는 처음에 지키고 싶었던 것마저 남지 않아 오직 증오로만 가득 차 종말을 죽이겠다는 뒤틀린 원념만이 남은 영겁의 망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죄를 쌓아버린, 변절자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했던 사람이었다.

던전에서 헌터. 마력에서 마법사까지 이 세계의 역사는 그녀를 떼놓고서는 도저히 거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알고 있을 거다. 만상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응."

그 존재마저 베일에 감춰져 아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불가해라 칭했다. 그 외견조차 거짓이라 하고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다. 누구보다 커다란 영향력을 행세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뒤에 숨어 암약하던 탕아들의 주인.

이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알고 있다. 알파의 가장 큰 적이었던 사람이니까. 아주 잠깐이지만 만나 본 적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왜 그 이름이 나오는 걸까.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쳐다보다가, 이어진 알파의 말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도 이은하였으니까."

***

동명이인…… 그런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을 터. 그랬다면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너와 그녀는 시작점이 같다. 아니, 뿌리가 같다고 하는 게 맞겠지."

뻗어나간 가지는 전혀 다르고 둘은 결코 서로가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태껏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은하가 만상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셀 수 없는 차원을 넘나들고 오간 뒤에야 영겁을 겪고 비로소 그녀처럼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야말로 가장 큰 숙적이었으니까. 종말보다도 까다로웠고 상대하기 버거웠던 숙적. 그래서 도저히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하고.……그 불안은 사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리라.

"네가 보았던 시간을 멈추는 듯한, 찰나를 영겁으로 늘리는 힘. 영원이라 칭하는 이 힘이 본래 그녀의 것이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영원 속에서 네가 날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래서였겠지."

"……."

"믿기 힘들단 건 알지만 사실이다."

만상의 주인에 대해 떠올리자면 지금도 여러 감정이 떠다닌다. 그건 연민이기도 했고 채 꺼지지 않은 분노이기도 했다.

"제법 오래 걸렸지. 너와 그녀가 다르단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어."

"그, 어. 내가…"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 것처럼 당혹해하는 모습에 늑대는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또 꺼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법의 시초였던 그녀는 누구나가 사용할 수 있게끔 수식을 적용해 학문의 형태로 퍼뜨렸지만, 우습게 됐지."

오히려 선택받은 엘리트만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까. 스퀘어라는 체계와 마법사라는 직종이 탄생하였으니. 저도 모르게 기억 속의 그녀가 자조하는 듯한 모습이 떠오르고 말았다.

"만상의 주인에게 있어서 마법은 오히려 가능성을 제한하고 누구나 익힐 수 있게 만든, 이른바 열화판이다. 네가 다루지 못할 리 없지."

"……미안. 못 따라가겠어."

아까까지 울적했던 모습은 어딜 갔는지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기야, 한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요는 다행이라는 거다."

"……?"

"네가 만상의 주인이 되지 않아서. 아직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서. 네가 그대로 있어줘서."

"……."

"앞으로도 난 그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할 거다. 평생 그런 불안을 품고 살아가겠지."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었을 그녀 또한 생각이 깊어지리라. 혹시라도 불안해져 돌다리를 수도 없이 두드리고 한 걸음 나아갈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멈춰설지도.

"그럴 것 같으면 말해라. 함께 있어주마."

그럴 때마다 자신 또한 작디 작은 불씨같은 불안을 떨쳐낼 수 있을 테니까.그러자, 홍당무처럼 화끈 달아오른 얼굴에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른다. 어쩜 좋을지 모르겠단 것처럼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등에 엎드리고 말았다.

"피곤하겠지. 지금은 자라."

"……응."

…….

곤히 잠든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찾았다.

그래도 여전히 가만 보기 어려울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얼굴에 묻은 흙이 아까 쏟은 눈물에 번져있자 얼굴을 닦아주었다.

척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반쯤 죽어있는 안색. 과장 조금 보태자면 미이라를 연상케하는 몰골. 평소의 활기는 어딜갔는지 마력도 바닥나있는 모습이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게 했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지친다는 말처럼 지금의 그녀가 딱 그렇게 보였다. 울었던 이유도 감정이 북받쳐왔을 뿐만 아니라 지쳐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등 위로 느껴지는 조금 식은 체온에 늑대는 그녀가 깨지 않게끔 달렸다. 앞으로 1시간 정도는 가만 자게 내버려둬도 될 테니까.

…….

푸르른 숲과 가파른 경사. 봄을 품고 있듯이 아름다운 경관. 수십 년간 인간은 물론 몬스터조차 발길이 닿지 못했던 금단의 땅.

왜냐하면, 바로 이곳에 검은 호랑이가 웅크려 있었으니까. 환계를 모형정원이라 비웃고 누구보다 여왕을 구하고 싶어했던 검은 호랑이가.

여왕이 강림한다고 하면 이곳 외에는 있을 수 없다. 그래. 그녀는 반드시 이곳에 강림하리라.

'백두산.'

오는 건 얼마만이었던가. 자색의 흑호와 겨룬 이후로는 굳이 찾아온 적 없었으니까. 늑대는 다시금 하늘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쏟아지는 별무리가 차원과 우주를 넘어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낱 정수에서 다시금 드높은 격을 되찾은 환계의 주인이, 뭇 환수와 영물의 어머니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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