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7화 〉 #200 빛바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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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히 잠든 이은하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은 늑대는 은하수가 쏟아져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오고 있다.
그 옛날의 영락했던, 몰락했던 모습이 아니라 격을 되찾은 온전한 모습으로 이 땅을 향해 강림해오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 5분? 10분? 어쩌면 그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그저 기쁘기보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이상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기도 했다.
혹여나 악의에 물들어있다면. 힘은 되찾았어도 자아는 그렇지 못하다면. 혹시 그간의 기억이 사라졌다면. 희박하다고는 하나 변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늑대는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되살린 건 자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뒷감당을 해야하는 건 자신이다.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절대 실망해선 안 된다.
……그리고 면목없다고 했던가? 이은하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사실 정말 볼 낯이 없는 건 자신이다.그녀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럴 바에야 차라리 진작에 부활시키는 게 옳았으리라.
자신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마랑회의 잔재가 환수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자신을 믿고 기꺼이 환계를 붕괴시키기까지 했던 여왕은 지금의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그렇게, 별무리는 산의 정상으로 추락했다.
…….
백두산 천지. 고여있는 물이 작은 호수를 이룬 그곳에 쏟아진 별무리가 화산 폭발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충격을 일으켰다.
하늘에까지 닿을 것처럼 치솟은 물줄기는 낮은 구름에 스며들었고 혹은 다시 떨어져 비를 내리게 만들었다. 뜬금없이 내린 비에 털 사이가 젖어감에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분화구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자다가 물벼락을 맞았을 텐데 아직 자고 있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접어두고짙은 연기가 걷힐수록 드러나는 실루엣에 침을 삼키고 말았다.
***
천지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뉴스를 타고 간단하게 전해졌다. 통상의 속도를 훨씬 넘어선 별의 추락은 백두산을 가르고도 남을 만한 충격이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지만 그러기엔 한참 늦어있었다.
"요즘은 이렇게 속보로도 나오냐?"
그간 게임을 통달했는지 몇 단계 발전한 모습으로 소파에 옆으로 누운 채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컨트롤러만 조작하는 모습에 감탄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술을 마시는 대신 게임에 몰두하게 됐다는 점일까. 그나마 술 냄새가 나지 않는 게 어디일까. 대신 아침부터 새벽까지 시끄럽다는 게 문제지만.
"천지에 별이 떨어졌다네. 옛날 이야기에 비슷한 거 있지 않았나? 설화같은 거."
"글쎄요. 그것보다 진짜 별이라고 생각하세요?"
"미쳤나. 저게 별이면 다 같이 손잡고 죽게?"
타닥. 타다닥.
심드렁한 표정으로 컨트롤러를 연타한 홍유리는 아까부터 게임은 팽개쳐놓고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페리를 곁눈질했다.
"대충 예상은 가네."
요정들까지 마찬가지로 입을 벌리고 헤벌레하고 있다. 그럴만한 일이 달리 뭐가 있으랴. 듣지 못했다면 모를까 여왕의 일을 들어 알고 있는 이상 그녀가 부활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말인즉, 환수 사냥에 관련한 일은 전부 마쳤다는 뜻.
곧 돌아오겠지만 그건 여왕에 대한 일을 전부 끝마친 뒤가 되리라.
"뭐 어련히 알아서 할까."
여전히 심드렁하게 말하는 주제에 자꾸만 곁눈질하느라 화면 속 캐릭터가 죽어있음에 백소율은 티내지 않고 속으로 웃었다.
***
종말을 걷어낸 뒤 늑대가 하려고 했던 일은 하나같이 이 때를 위함이었다.
여왕의 부활. 그나마 남아있던 몬스터를 박멸하다시피 한 것도 마랑회를 절멸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
변수를 줄이고 온전한 부활을 이뤄내기 위해서.
그만큼 생각해왔다. 준비해둔 말들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하지만 전부 머릿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요근래 있었던 많은 일들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녀를 볼 낯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한심하게도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먼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그 청아한 목소리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목이 메이는 듯했다. 마치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혹은 자신의 시간만 하염없이 빠르게 흘렀던가. 사고만이 가속해 이런저런 생각을 제멋대로 집어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꽉 막힌 목에 침을 삼키고서야 가까스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개 숙인 늑대는 눈으로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정신체의 격으로 초월자를 엿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하여, 머나먼 외우주의 본신에 정신만을 연결하여 그녀를 보았다.
신역을 넘어선 유일무이한 눈이 시공을 격하고 내려다보자 손금 보듯이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한 줌의 실수도 없이과거의 기억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 그대로 되살아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억에 혼선마저 빚지 않았다. 우려하던 일들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본능적으로 그녀가 되살아났음을
"제법 시간이 지난 모양이구나."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그리 말했다. 겉으론 보이지도 않을 나무의 나이테같은 건 그야말로 한눈에 얼마든지 볼 수 있으리라.초월의 격이 어떠한지는 늑대 자신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또한, 그 통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한 번 보았던 광경이라면 정보로써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으리라. 순식간에 비교했음에 늑대는 혀를 내둘렀다.
"1년……? 그렇구나."
연기를 걷어내고 걸어오는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긴 천과 같은 별과 별 사이의 암흑 물질을 두르고서.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았단 건 정말 성공한거니?"
"종말은 사라졌고 진리는 잠들었습니다."
"……."
"작은 세계를 넘어, 우주 바깥의 외우주라는 더 커다란 가능성을 보고 아주 조용히."
"힘들었겠구나. 그리고……"
여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떨린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슬픔을 자아냈다.
"앞으로 더 힘들어지겠구나."
"……."
"견딜 수 있겠니?"
그 물음에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한 박자 늦게나마 대답하려했으나 이미 그녀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안타깝구나."
기어코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아래로 떨어진다. 한 방울이 바닥에 닿자 증발했던 호수의 물이 천천히 차올랐고 여왕은 그 위를 천천히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이는 물결이 서로 겹치며 사라진다.……그래. 그녀의 걱정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진리 또한 그랬고…… 어쩌면 너도 그럴지 모르겠구나."
어느새 머리에 닿은 손.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잘 깨어났느냐고 묻고 죄송하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되려 위로받고 말았다.
진리가 언제 다시 깨어날지는 모른다. 지금은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아니, 그 자리를 비워두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그처럼 통제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언젠가 별의 수명이 다하고 우주의 팽창이 멈춰 진리가 그리도 걱정하던 끝이 다가온다 해도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설령 이 우주가 끝나더라도 길게 이어진 선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가능성은 닫히지 않을 테니까. 끝은 완전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가져오기도 한다.
"네 나름의 해답이구나.……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겠니?"
모형 정원. 그리움으로 만든 세계처럼. 또한, 진리가 셀 수 없이 많은 좌절을 겪고 종말을 행한 것처럼 늑대 자신은 그러지 않겠냐고 묻고 있었다.
견딜 수 있냐는 물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십 수백억 년. 혹은 조나 경으로 셀 만큼 기나긴 시간이 지났을 때, 제법 먼 미래에 자신은 분명 혼자가 되리라.
지금 함께 걸어가는 이들마저 언젠가는 전부 흙이 되고 우주의 먼지가 되고 만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반드시 혼자가 되고 말리라는 건 너무나 명백한 진실.
진리의 자리를 꿰찼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럴 때가 온다는 것. 여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사실'을 만나마마자 꿰뚫어봐졌음에 늑대는 쓰게 웃었다.
페리도, 홍유리도, 백소율도, 이은하도, 백록도. 자신과 관계했던 모든 이들에겐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 수명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건 초월자인 여왕에게도 언젠가는 다가올 일. 허나, 신역을 넘어선 자신만큼은 다르다.
결코 끝은 오지 않는다. 얼마나 바라고 바라더라도 원하는 죽음은 맞을 수 없다.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를 여왕은 잘 알고 있을 터. 이해하고 있는 만큼 더욱 걱정했으리라.
"괜찮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웃었다.
언젠가 찾아올 피할 수 없는 때가 오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었으니까.
"설령 그 때가 온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상실의 아픔보다 더 많은 기억과 추억을 간직할 테니까. 앞으로 그런 일들을 쌓아갈 테니까. 영원에도 빛바래지 않을 빛나는 시간들을.
"돌아가죠. 아직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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