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 #200 빛바래지 않을 (2)
* * *
"아, 비다."
뺨에 닿은 차가운 감촉. 어둑어둑해진 하늘과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비. 먹구름이 잔뜩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 잤다고 한결 나은 기분이었다.
머리에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이은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뜬금없이 산중에서 깨어난 셈이지만 별로 당황스럽진 않았다.최악의 경우라도 백두산이라면 혼자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럴 일은 없다. 저 멀리서 알파가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어두컴컴한 웬 밤중에 붉은 눈을 가진 집채만한 늑대가 다가오는 건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그렇지 않다.
높게 팔을 들어 흔들고 보란듯이 부르려다가.
"알……!"
그 등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클랜에서 보았던 때와는 조금 모습이 다르긴 해도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둘도 없다. 절로 손을 모으게 만드는 신성함은 타고나야 하는 종류의 것. 무엇보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이은하는 안 그래도 뒤죽박죽 복잡한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려야만 했다.
'사, 사과해야하나? 아니면 감사부터 드려야하나?'
어느 쪽이 먼저여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잘 생각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만남이기도 했고 마지막에 그녀를 만났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녀가 꾸밈없는 미소로 오랜만이라고 말을 걸어오자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
산에서 내려왔을 땐 이미 아침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활을 느끼고 다가온 환수들이 잔뜩 몰려왔으니까. 환수들이 그녀의 자식이라면 반대로 여왕은 환수들의 어머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산을 가득 덮을 만큼 잔뜩 몰려온 환수들을 달래주고 나서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으니까. 환수 사냥으로 인해 숫자가 줄었다고 들었는데 산을 매우고도 남을 만큼 남아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겨우 산을 내려온 거였지 아직도 몰려들고 있다.그리고 그 중에선 이은하가 알고 있는 얼굴도 있었다.
"흠. 수고했다."
근엄한 얼굴로 연신 나무 막대를 바닥에 찧으며 끄덕거리는 후운이 있었으니까. 한국 땅에 있었으니 백두산까지는 가까웠을 터. 그가 여기까지 온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 나름대로 뛰어다닌 모양이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됐을진 몰라도."
서화의 머리 위에 올라 타 얄밉게 말했지만 이은하는 오히려 웃어버렸다. 그 옆에서 요정들이 재잘거리고 있었으니까.
"후운은 거짓말쟁이야!"
"은하가 도왔다는 말에 헤벌레 좋아했으면서!"
"잔뜩 감동해서 모아 둔 열매도 다 까먹어놓고선!"
"이, 이것들이!"
휘적휘적 휘두른 지팡이에 요정들이 나부끼듯 팔랑거리다 까르르 웃으며 달아났다. 한방 먹었다는 얼굴에 이은하는 뺨을 긁었지만, 멋쩍어 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구태여 말을 걸진 않았다.
그보다도, 그녀였다.
되살아난 여왕. 알파가 죽음에서마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됐음에도 이렇게 부활시켰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고야 말았다.
혹시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그 따스한 언동. 언젠가 듣기를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 했던가. 물론 그때도 놀라웠지만 지금은 아예 자칫 잘못했다간 넋을 잃어버릴 것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은은한 빛으로 비춰주는 밤하늘의 달처럼 멀고도 가깝게 느껴지는 그러한 존재. 손짓과 몸짓.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품격에 눈을 빼앗기고 만다.
잠깐 따라해보려다 혀를 빼물고 그만두었다. 저건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야 할 기품일 테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도 열에 아홉은 그녀가 신이라는 말을 듣고도 끄덕일지도 모른다.
자식들을 쓰다듬으며 웃는 모습에 그만 이은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시, 심장에 안 좋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분위기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음심보다는 감탄이 나오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과연 신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살갑게 말을 걸어주셨을 때, 악의에서 구해준 일에 대한 감사로 횡설수설하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괜찮다고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라고 말해주셨을 땐 정말로 같은 여자인데도 반할 뻔하고 말았다.
분명 깊이와 도량부터가 한참 다른 거겠지.도리도리 고개 저은 이은하는 그보다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환계는 다시 만들어지는 걸까?'
연금진을 통해 알파가 만든 가짜 환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다. 미처 듣지 못한 환수들은 아쉬워할지도 모르나, 이젠 필요 없다.왜냐하면 진짜 환계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래. 다시 만들어질 테지."
"알파?"
"알고 계실 터. 서로 공존할 수 없단 사실쯤은."
어쩌면 종말에 의해 셀 수 없이 환계가 부숴지는 동안 몇 번인가 경험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시험해보았을지도 모르고 적어도 모여든 환수의 숫자에서 이미 깨달았으리라.자식을 모르는 부모가 없듯이 지금의 그녀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고 있을 터.
"서로 떨어져 살아가는 게 제일이다."
개인이라면 모를까 집단으로서의 인류는 결코 다른 집단과 공존을 이룰 수 없다. 이미 불씨는 불길로 번져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당장 마찰을 빚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환수들의 눈동자에 분노가 사그라진 것은 어디까지나 이 자리에 그녀가 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허나, 그녀가 돌아와도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갈등의 불씨는 언젠가 다시 커지고 말리라. 그것만으로 환계를 만들어야 할 이유로는 차고 넘친다 할 수 있었다.
"왠지…… 섭섭하네."
"섭섭하다고?"
"그렇잖아? 페리는 몰라도 다들 떠나갈 테니까."
늑대는 가만 끄덕였다. 분명 백록도 더는 현계에 남아있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요정들도 전부 떠나가면 한동안 빈 자리를 느낄 정도로 조용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홍유리도 말로는 속이 시원하다고 할테지만 쓸쓸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 그러니까 있잖아…"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 이은하는 말할까 말까를 생각하며 주저하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맘 속으로 멘토로 삼은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곤 힘껏 숨을 들이켰다. 이왕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은 달라.'
이미 알파로부터 '평생 지켜보겠다.' 는 말을 들은 뒤였다. 물론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닐 테지만 홍 팀장님도 소율이도 한참 앞서나가 있는데 언제까지 자신만 뒤처져 있을 순 없다.
그래. 이번엔 다를 거야.
최악의 경우엔 뻔뻔하게 철면피를 깔아보겠다는 심정으로 목울대를 넘기고 두 주먹을 단단히 쥐곤 있는 힘껏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소리쳤다.
그렇게 용기를 쥐어짜낸 이은하의 말은,
"쿠우웃!"
요정들을 쫓아내느라 후운이 휘두른 지팡이가 서화의 콧잔등을 건드린 순간, 크게 재채기하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
기껏 했는데. 어떻게 겨우 꺼낸 말이었는데?! 멀뚱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았을 때, 비친 자신이 울상 짓고 있는 모습에 이번에도 글렀다고 생각했지만.
"그래. 다음에."
"……?"
"환계. 같이 가자는 말 아니었나?"
곧 어느 때보다 힘차게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 수 있었다.
***
그 길로 여왕과는 곧바로 헤어졌다.
돌아가자고 했던 말이 무안하게도 도시로 가면 그녀의 존재를 느끼고 세계 곳곳에서 속속들이 모여드는 환수들의 탓으로 소란이 날 게 분명할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소동이 벌어지고 말리라.
게다가 이 소식을 전하기도 해야했고 슬슬 백소율의 마력 또한 위험하게 차올랐을 테니까. 그리고 환수 사냥꾼들을 척살한 일에 대한 건이 어떻게 됐을지도 궁금하기도 했다.
이제 더는 걱정할 필요 없다. 환수 사냥꾼을 비롯한 위험요소는 박멸했고 만약의 경우에라도 지금의 자신보다 강한 여왕이 함께 있었으니까. 헌터들이 무더기로 습격한다 해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고 도리어 격퇴하리라.
그런 초월자인 여왕이 온전히 부활했으니 환계는 다시 세워질 터. 그 일로 환수와 영물이 전부 사라질 테니 인류는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으리라.
그게 나쁘다고 생각 들진 않았다. 정말 벌이가 없어진 헌터들은 차라리 몬스터가 남아 있는 바다에라도 눈길을 돌릴 테니까.
'전부 없애지 않아 오히려 다행일까.'
재앙급 몬스터는 없다지만 아직 남은 바닷 속 몬스터를 박멸하려면 고생 깨나 해야 하리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라리 환계에서 살아가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운 일 없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그 편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홍유리와 의견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많은 상념을 치워두고 늑대는 문을 두드렸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은 여기였으니까.
빛바래지 않을 추억은, 추억을 만들 이들은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