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200 빛바래지 않을 (3)
* * *
여왕이 다시 환계를 만들고 있을 무렵, 잔뜩 상기된 표정의 요정들이 달려들자 늑대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달래주었다.
"안달났더라고 아주. 그냥 가라고 보내려다 잡아뒀어."
"그래. 잘 했다."
그냥 보냈더라면 제법 시끄러워졌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조금 기다리면 환계를 통해 여왕을 만나러 갈 수 있으리라. 찡얼거리는 요정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주고서야 조금 조용해졌다.
그런 대신에 머리 위에 잔뜩 올라 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다 끝났어?"
"그래. 전부 다."
"다행이네. 아…… 백소율 안에 있어."
끄덕거린 늑대는 요정들을 대동하고서 안쪽 방으로 향했고 문을 열었을 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환한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드물게 늦잠 자고 있는 백소율이 페리를 얼싸안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 중간에 끼어 뽈뽈거리고 있는 감마를 보고 있으면 더더욱.
"뭐 해? 그냥 지금 뽑아버리지?"
끄덕이곤 어깨춤에 발을 올렸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그녀의 안에 잔뜩 쌓여있는 마력을 가져와 삼켰을 때, 마침 졸린 눈을 비비며 페리가 눈을 떴기에 조용히 하란 제스쳐를 취하곤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직 마력에 취해 있을 테니 좀 더 자게 내버려두고 싶었으니까. 대신, 꼬리를 잡고 따라나온 페리가 그대로 뛰어올라 등 위에 타고올라 엎드려 잠을 청했다.
"얘도 새벽까지 안달내다가 겨우 잠든거야."
"얼마 자지 못했나보군."
"네 시간? 다섯 시간?"
"……수고했다."
그걸 알고 있단 건 홍유리도 자지 않고 기다렸단 뜻일 테니까. 어쩌면 날밤을 샜을지도 모른다.
"뭘. 하루 이틀 안 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대수롭잖게 받아치는 말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가 등에 엎드려 잠든 페리가 주르륵 내려오려하자 얼른 일어서고 말았다.
"푸. 고생은 네가 하네. 아, 그보다 어떻게 됐어?"
자초지종을 묻는 말에 늑대는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꺼내어 말했다.
***
여왕은 되살아났고 환계는 재건축 되리라. 당연 환수들도 현계에서 모습을 감출 테고 더 이상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그거 잘 됐네."
"감정의 골이 사라지진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그라질 거다."
"쯧. 그래야지. 하여간 좆같은 새끼들. 헌터라는 새끼들이 쪽팔린 짓은 죄다 사서 하고 앉았네."
땅만 파도 돈 벌 수 있을 새끼들이 헛짓거리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며 투덜거린 홍유리는 부드러운 소파 깊숙이 몸을 맡겼다.
"나도 사실 열받아서 들이받으려다…… 관뒀어."
천장을 올려다본 홍유리는 회한 섞인 말을 꺼냈다.
"이해는 하는데 나만 빼놓고 작당하고 있었단 것도 싫고. 때려 친 거랑은 별개로 짜증나잖아."
"음."
환수 사냥. 혹시라도 자신에게 알릴 가능성이 있는 홍유리와 이은하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제외했다고 하던가. 반평생을 여명에 소속돼 일했던 그녀로서는 모종의 배신감을 느꼈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늑대는 금세 고개를 옆으로 했다.
"이젠 어디 갈 일 없는거지?"
"그래.
적어도 지금은. 그리곤 고개를 내려 발등을 꼬집고 있는 손에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뭐. 너 나 존나 바람맞혔잖아. 너 오고 나서 집구석에 없었던 날이 더 길 정도거든?"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었던 늑대는 마랑회와 환수 사냥 때문에 외박한 날들을 떠올리자 꾹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성격 좋아서 이 정도지. 알아들어?"
성격에 대해선 전혀 공감할 수 없었지만 떨떠름하게나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만큼은. 게다가 안방에서 백소율이 자고 있다면 더더욱.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아주 각오해."
대담하게 웃는 홍유리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적어도 밤이 올 때까지는.
***
뒹구루루 뒹굴뒹굴.
한번 누우면 그대로 쭉 잠들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잠이 오지 않는다. 하도 잠이 오질 않아 든든하게 배까지 채우고 식곤증에 기대보았으나 여전히 잠이 오질 않는다.오히려 아까보다도 말똥말똥해진 것 같다.
산중에서 한 시간 잤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리라.
너무 많은 애기를 들었고,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뜬금없이 여왕님을 만났고 맘 속 깊이 묻어둔 일을 꺼내 털어낼 수도 있었으니까. 어디 그뿐이랴. 연금술사가 세운 마수화 계획이란 터무니없는 음모를 저지하기도 했고. 조금 현실감이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후련하다아…"
그 기분으로 가득했다. 무거운 짐을 전부 떨쳐낸 듯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면선자님은 슬슬 돌아오셨을까. 환수들은 이제 돌아갔을까. 그리고…… 후련함 속에 생겨난 의문 한 가지.
'만상의 주인.'
잠이 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여태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전부 떨쳐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알고 있다. 그래봤자 기껏해야 이름 정도였지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야, 알파의 숙적이었다고?'
달리 말해 그 알파를 몇 번이나 막아섰다는 뜻이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순 있었지만 실감은 들지 않을 만한 일이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 맞지?"
아무도 답해주지 않겠지만 답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다른 차원. 우주에서 보았던 그 사람. 외견도 분위기도 그리고 일신에 갈무리한 능력조차도 자신과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어보였지만 알파가 농담으로 말했을 리는 없다.
"……."
이것저것 생각해보던 이은하는 결국 침대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어차피 생각해봤자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이미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아무리 애써봤자 그녀처럼 될 수 없다고 했으니까.
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게 두지도 않겠다고 했다. 그럼 안심이다. 곧 뒤척이다 몸을 뒤집은 이은하는 천장을 향해 팔을 뻗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마력 덩어리. 어차피 앞으로 이 힘을 사용할 일은 정말 손에 꼽으리라. 그야, 위협같은 건 사라졌으니까. 게다가 그동안 클랜 내에서도 일이 없어 빈둥거리거나 수련만 해왔던 게 사실이기도 했고.
일각에서는 앞으로 뛰어난 헌터들의 힘이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향해. 더 정확히는 국가 간의 항쟁에 사용될 거라 하는 듯했지만 지금 들어봤자 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슬슬."
구 팀장님이 돌아오긴 했지만 그런다고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지금이야 환수 사냥에 대한 건으로 바쁜 모양이었지만.
"슬슬, 나도 퇴직할까."
혼잣말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지만, 홍 팀장님과 집요하게 대련하면서까지 수련했던 건 만약 알파에게 만약의 일이 있으면 하는 이유에서였으니까. 그럴 일이 사라진 이상 한 번쯤은 여동생과도 진지하게 상의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이은하는 잠들 때까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꼼지락 꼼지락. 답답했는지 껴안은 팔 사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던 감마의 꼬리가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백소율의 손등을 때리고야 말았다.
그제야 눈이 뜨였는지 부비적거리며 눈을 비벼댄 백소율이 길게 하품하자 얼른 날갯짓한 감마는 드디어 품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끼잇. 뀨우웃!"
그렇게 백소율이 깨어난 건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시계를 보니 15시간 가량. 오밤중에 한껏 쌓인 마력과 실랑이하다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그래서 잠깐 눈이나 붙일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래 잠들고 말았다. 그래도 아픔이나 괴로움은커녕 홀가분한 기분에 갸웃해하던 백소율은 자신의 안에 들어찬 마력 대부분이 사라졌음에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 말인즉, 한참 기다리던 사람이 드디어 돌아왔단 뜻이었으니. 그것도 모르고 새까맣게 잠들어있었단 사실에 부끄러워하던 백소율은 잠옷 차림에 가운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왔지만 생각보다 바깥이 조용해 의아해했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는 아무도 없다. 페리도 요정도 홍유리도 그리고 이젠 돌아왔을 터인 알파조차도. 그래서 다소 의아해하고 있었거늘, 빵빵하게 볼에 바람을 집어넣은 감마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밀고 있었다.
영락없이 잡으라는 제스쳐. 그래도 완전히 삐진 건 아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전에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아 언제였나 생각이 들었을 때,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름답기 그지 없다. 푸르스름한 안개와도 같은 것이 잔뜩 낀 마력이란 걸 깨달았을 때, 입을 벌린 백소율은 그 때가 언제였는지를 기억해냈다.
"환계……?"
무너져서 사라진 세계. 두 번 다신 발 디딜 리 없었을 장소였으나 자신이 이렇게 서 있다. 그 사실에 침을 삼킨 백소율은 곳곳에 만연한 영물과 환수들을 보고 또 한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라는 의문은 결국 하나의 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여왕. 바로 그 분이 되살아난 것이리라.
"그랬구나."
먼저 가 있었던 것이리라. 그건 감마도 마찬가지 심경이었을 텐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테고. 손목에 감긴 꼬리가 얼른 가자고 당기는 듯하자 대견함을 느낀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