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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00화 (400/407)

〈 400화 〉 #200 빛바래지 않을 (4)

* * *

맨발에 양말을 신기듯이 환계는 현계를 덮어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거울같은 세계라 표현 했던가. 그 말처럼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게 아닌 원형이 있는 이상,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건 생각보단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수천 수만번이라면 모를까 고작 한 번으로 그녀의 격이 떨어질 리도 만무했고. 역시 연금진을 빌려 어설프게 만들어낸 조잡한 가짜와는 달리 안정성이 느껴진다.

또한, 그 영역이 넓어질수록 세계 각지의 환수들이 자연스레 환계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태연하게 자식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업이었다.

영락했던 그 때와는 달리 온전한 초월의 격. 만상의 주인처럼 쌓아온 게 아닌 태생부터가 신이라 불려 마땅할 존재의 힘이리라.

'왜 그러니?'

하고 입만 뻐끔거리며 상냥하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문제 없이 환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이상 자신이 손을 보탤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그보다는 다른 일이 더 신경쓰인다. 말할 것도 없이 환수들이 상당히 줄었음을 알고 있을 터. 그녀의 눈썰미나 통찰력이라면 모를 리 없다.

당장 이 자리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든 환수들 중에서도 날붙이에 당해 생긴 상처들이 흉터로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

배려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먼저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지금 분위기에선 그것마저 쉽지 않다. 환수들에게 있어선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 산통을 깨고 침울한 분위기를 만들긴 싫다.

그래서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페리 저거저거. 아주 그냥 지조도 없이 쫄래쫄래 가버리네."

건물 벽에 기대어 무릎을 끌어안은 홍유리가 투덜거리자 늑대는 피식 웃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고개가 삐딱하게 꺾여있는 걸 보니 제법 서운했던 모양. 어디 그뿐이랴.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찰싹찰싹 바닥을 내리치는 꼬리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늑대는 바로 그 옆에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요즘 취미라도 생겼나?"

"……?"

"게임기. 아주 널브러져 있던데."

굳이 보려하지 않아도 잔뜩 묻은 지문까지 맨눈으로 보고도 남는 게 자신의 시력이었다. 여전히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둔 그대로 끄덕거린다.

"어. 그냥 심심풀이로."

그 수준이 아니던데. 후각으로 맡은 냄새는 아예 그 앞에 눌러 앉아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래도 탓할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이제 일에선 정말 손을 뗐나보군."

"할 것도 없잖아.……아. 그러고 보니 누가 자꾸 술 사들고 온다고 지랄을 하더라."

일 얘기로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걸 대체 뭐라고 곡해했는지 아주 자기가 초대한 꼴이 됐다면서 투덜거렸다. 정말로 싫었다면 투덜거리는 게 아니라 그 본인에게 가 쥐어박아버렸을 텐데. 힐끔거리며 자신을 보는 게 영락없이 눈치를 살피는 꼴이었다.

"잘 됐군. 안 그래도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

"가끔은 머릴 식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숫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홍유리는 발끈해서 한마디하려다 잠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지막으로 집 밖에 나간지가 얼마나 됐는지 생각하다가 한 손으로 셀 수 없어지자 꾹 입을 다물었다.

백소율이 알게 모르게 한숨 쉴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늑대가 웃고 있는 것만 같자 괜스레 꼬집고 말았다.

***

감마에 이끌린 백소율이 찾아왔을 땐 시끌벅적한 환계도 조금은 조용해져 있었다. 도시 이곳저곳에 환수들이 제멋대로 누워 뒹굴고 있었고 서화같은 커다란 환수들에 이르러서는 도로 한복판에 길을 막고 있을 정도였다.

수는 줄었지만 몰려든 만큼 미어터질 것 같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감마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도 그러고 있다는 뜻. 한참 두리번거리던 백소율은 페리에게 무릎 베개를 해주고 있는 홍유리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여기 계셨네요. 혼자세요? 알파는요?"

"금방 온다고 아까 갔어."

"……."

그럼 기다리는 게 정답이리라. 그 옆에 앉은 백소율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은데 환계에서 있자니 한 술 더 떠서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마력이 넘쳐흐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안은커녕 마음이 편할 정도였으니, 참 이상했다. 환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홍유리와 페리가 서로 간지럽히며 싸우고 있었다.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워만 있었던 모양. 금세 참전한 감마까지 셋이서 뒹굴기 시작하자 싱겁게 웃은 백소율은 알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

드디어 시간이 나 여왕과 독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늑대는 이번에도 선수를 쳐지고 말았다.

"고맙구나.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단다."

"……."

"어땠는지 아니? 참 이상했지. 꿈 속을 헤매는 것 같았어. 정처없이 혼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단다."

사후의 기억은 없다. 다만 어렴풋한 기억은 남아있다고. 정수마저 흩어진 뒤에는 비춰지는 한 줄기 빛을 피해 의식도 없이 걷고 있었노라.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빛을 따라가면 전부 끝날 것만 같았거든."

죽음 뒤에 어디로 가게 되는지 여왕은 모른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것이 사라져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이젠 알 것도 같았다.

그 빛을 따라가면 분명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자신이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미련이었지."

그래서 고맙다고 여왕은 말했다. 이 미련을,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은 이들이 있다는 제멋대로인 미련을 이루게 해 주어서. 너무 많은 감정이 담긴 알에 늑대는 눈을 감고 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려고 하면 변명은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더 큰 일이 있었기에 돌아올 수 없었다. 환수들이 당한 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 그래서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혹은 바로 움직였지만 이미 늦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알게 모르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고 많은 이들이 자신을 손가락질 할 만큼이나. 그래도 늑대는 변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비난이나 받는 자신과 자식을 잃었을 그녀의 심정을 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부탁한 것도 아니잖니?"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홀했다. 이제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제멋대로 홀가분해지고 말았다. 한 번만 환수들을 살폈더라면 이렇게까지 지체하지 않았을 거다.

"자책하지 말렴.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순 없는 법이란다."

"그래야 했습니다."

또한,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은 셈. 다른 누구도 탓하지 않지만 늑대에게 있어 그 사실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자신이 좀 더 제대로 했더라면 이런 결과는 없었다.

지금 죽었을 환수들 중에서 제법 많은 수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바쳤고 거기에 더해 생명과 격까지 내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사소한 약속마저 지키지 못했다.

따라서, 죄인일 수밖에 없다. 뇌리에 새겨진 잔혹한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더더욱. 감정의 영역이 커져 생긴 일이겠지만 가끔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자신이 해온 일은 옳았는가.

과연 희생을 대가로 해서라도 구할 가치가 있었는가.

단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자신의 행적에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결과를 바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야…… 했습니다."

무겁게 떨어진 말 이후로 정적이 내리앉았다. 서로가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을 때, 별안간 웃음 소리가 들렸다.

둘만이 있는 자리에서 웃을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멀뚱히 고개를 든 늑대는 그녀의 웃음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후후. 우습구나. 서로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게."

"……."

"그 아이들은 분명 죽었단다. 슬픈 일이고… 아픈 일이야. 그래도 네가 모든 걸 책임 질 필요는 없어."

그녀의 손길이 닿자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실, 나도 화가 났단다. 그렇잖니? 내 아이들인걸. 하나하나가 전부 내게서 태어난 내 아이들인걸. 하지만 차마 화를 낼 수가 없더구나."

고해처럼 꺼내는 말. 늑대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자신이 보기에 그녀가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서.

"혼내주고 싶었단다."

혼내준다라고 쉽게 말은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여태 겪어본 그 무엇보다 큰 재앙이 되었으리라. 늑대는 아연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네가 바라지 않을 테니까.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걸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단다. 이제야 찾은 네 보물일 테니까."

환계가 그러했듯이 라고 마침표를 찍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떨구었다.

"죄를 청할 필요는 없단다. 대신, 살아가렴. 네가 말했지 않니. 영원에도 빛바래지 않을 추억을 쌓겠다고."

"……."

"가능하면 나도 그 추억 중 하나가 되고 싶구나. 그래서 네가 바라지 않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단다."

하늘, 아니 에메랄드 빛 바다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어느새 모여든 빛무리가, 아니 죽어서도 그녀를 찾아온 수많은 정수들에 늑대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러니까 괴로워하지 말렴. 누구도 널 탓하지 않는단다. 오히려 네게 고마워하고 있을 정도지."

그 마지막 말에 무겁게나마 늑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습니다."

겨우, 그럴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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