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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04화 (404/407)

〈 404화 〉 #201 언젠가는

* * *

이렇게 안겨 있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품에 안겨있으니 눈만 감고 있으면 그냥 강아지처럼 보이리라. 다만, 앞에서 걷는 홍유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 특징적인 꼬리와 뿔과 날개는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없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염색으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강렬한 색채였다.

모자까지 깊게 눌러 썼지만 아무래도 효과가 없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나마 다가오지 않는 건 심기불편하다는 분위기를 몸에 두른 듯이 풍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 놈만 걸리라는 듯 사방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고도 다가올 간이 큰 사람은 없다. 적어도 그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한 술 더떠 신장에 비해 넓은 보폭과 빠른 걸음이 그런 분위기를 한층 더 가중시킨다.

그 옆에서 손잡고 걷는 페리가 없었다면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홍유리의 심기를 신경쓰지 않고 방긋방긋 웃고 있을 수 있는 인물은 달리 없으니까. 그렇게보면 붉은 머리와 푸른 머리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 듯했다.

"페리는 참, 볼 때마다 귀엽네. 나중엔 어떻게 되련지."

"잘 자랄 거다. 요즘엔 제법 말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벌써?"

놀랍다는 듯한 반응에 늑대는 실소했다. 고작 2주만에 체계와 개념 자체가 다른 요정어를 익힌 사람이 누구였던가. 물론 정말 놀라하는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키도 제법 자랐지."

"아~ 그러고 보니."

거의 2cm 정도.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전에 쟀던 것과 비교해 자신이 자랐음을 알게 된 페리는 무척 기뻐했었다. 부정을 먹어치우지 않아도 자라는 걸 보면 확실히 탈피한 지금의 몸은 사람에 근접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 또 한번 허물을 벗을진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소율이는 마이페이스네."

"……."

그와는 반대로 뒤에 있는 백소율은 태평해보였다. 이젠 정말 보기 드물어진 요정용. 사람의 모습인 페리와는 달리 유일무이해진 요정용인 감마의 콧방울을 터뜨리거나 하면서 유유자적 공원 거리를 걷고 있었다.

분명 오기는 여섯이서 왔는데 어느새 둘씩 나눠져 셋이 따로 걷고 있는 현실에 이은하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긴 한 걸까."

"이렇게라도 해야지."

"……홍 팀장님한테는 말도 못 걸겠는데."

"아직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 날 이후, 홍유리의 반응이 차가워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어느 밤에 나름 노력하기는 했지만 아직 다 마음을 풀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결국 그 부분은 끊임없는 사과와 시간으로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나……"

안 그래도 평소 무서워하던 사람이 종종 째려보는 시선에 오슬오슬 떨고 있는 그녀. 그래도 어쩌랴.홍유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버젓이 바람을 피고 있는 셈이었으니. 오히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한 것이리라.

그러다 화제를 돌려야겠다 싶었는지 떠오른 것을 물어왔지만.

"그러고 보니 그 날, 잘 들어갔어?"

완전한 지뢰였다. 앞뒤로 느껴지는 시선에 히익거린 이은하가 꼴딱 침을 삼킨 건 시선이 거두어지고 나서였다.

"……진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그냥 내려놓을까?"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대체 그 날, 뭐가 어떻게 됐던 거야?"

자신에게만 들리게끔 하는 목소리에 늑대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이은하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날의 기억을.

***

"왜 이리 늦게 와?"

시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8시에 향해있다. 그렇게 늦은건가 싶기도 했지만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으니 할 말은 없다.

안 그래도 들어오자마자 수상쩍어하는 눈초리에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선 모습은 영락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것도 그리 심기가 좋지 않은 모양새였기에 더더욱.

늑대는 알게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결국 올 게 왔구나싶은 심정이었지만그래도 먼저 말하는 것과 옆구리 찔려 말하는 데는 큰 차이가 있다.

"조금 늦어버렸다. 이래저래 있어서."

"그래? 그럼 잘 차고 왔겠네?"

난데없이 정곡을 찌르는 말.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의 눈 사이가 좀 더 좁아졌다.

"왜 대답을 못 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일에 한해서는 한없이 죄인이거늘. 점점 눈초리가 매서워지자 늑대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레 고갤 숙이고 사죄의 말부터 꺼냈다.

"미안하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고 교차한 팔이 풀어질리는 없다. 심지어 어느새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선 게 아니라 정면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죄를 청하는 말조차 거슬린다는 듯 눈썹이 꿈틀거리며 역팔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변명할 생각도 없다는 거네? 오~ 그래. 존나 막나가자 이거지?"

"……."

"씨발. 끝까지 다물고 있네?"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있으랴. 잠깐 페리가 듣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안쪽에서 백소율과 함께 있는 듯 싶었다.

……역시나 선수를 쳤던 모양. 십중팔구 이은하가 먼저 연락해 이러쿵저러쿵 토해낸 것이리라. 먼저 말할 테니 기다려 달라 했는데도.

'그나마 화살이 향한 게 나라서 다행일까.'

이쪽이 차라리 낫다. 그렇게 생각은 해도 막막하기는 했다. 대체 홍유리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그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쉽게 화를 가라앉힐 리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줄세워놓고 따먹게? 그럼 한 스무 명까지 늘리지 그래? 아니다. 기왕 하는김에 두 명 더 늘려서 서로 축구라도 하게 만들던가."

"미…"

"미안하단 소리 하지도 마."

그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결국 입을 다문 늑대는 이어지는 말에 다시 할 말이 사라지고 말았다.

"백소율 들어올 때도 그랬잖아. 근데 쟨 이해라도 해. 왜냐면 내가 삽질했으니까."

"……."

"근데 걘 뭔데? 받아 줄 이유가 하나라도 있었어?"

지당한 말이었다.

이은하를 받아들인 이유는 상처입히기 싫어서. 무서워서였다. 차라리 받아들이자고 그게 낫겠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상처주고 싶지 않다는 제멋대로인 이기심에 반대로 두 사람을 상처입힌 꼴이었으니까.

게다가 홍유리에게 있어서 이번이 처음도 아닌 두 번째. 처음은 실수였을지도 모르나 두 번째라면 그렇게 쉽게 넘어 갈 리 없다.

그녀에게는 화낼 권리가 있다. 비난할 권리가 있다.

이렇게 되리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그런 자신이 그녀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 또한. 결국 용서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상처 입히기 싫었다."

무언의 압박을 받다가 겨우 꺼낸 말에 돌아온 건 기가 찬다는 듯한 코웃음이었다.

"그럼 난."

"……."

"아니면 쟤는?"

받아치는 말에 돌려줄 말이 있을 리 없다. 긴긴 한숨을 내쉰 홍유리가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걘 상처입히기 싫었고 우린 괜찮다? 아니면. 잡은 물고기라서 상관없다 이거야?"

적나라한 말에 늑대는 번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허나 뭘 보느냐는 듯한 시선에 다시 눈을 깔 수밖에 없었다.

"……."

질식할 것 같은 숨막히는 공기. 어쩐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 한없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 뭐 하나 맞아들어가는 게 없는 상황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이어지던 무언의 압박은 마침 내밀어진 구원에 의해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안쪽에서 다다다 뛰어온 페리가 단번에 뛰어 안겼으니까. 볼을 부비기까지 하자 차마 여기서 쏘아붙일 수 없었는지 빠득 이를 간 홍유리가 안방으로 사라져가자 그제서야 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맙다."

페리를 뒤따라 천천히 걸어온 백소율. 페리를 먼저 보낸 건 그녀가 한 일이었으리라. 덕분에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게 됐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선생님은."

"……노력해봐야지."

"혹시나 했는데 놀랐어요. 은하 언니는 쉽게 받아주셨단 거에. 저랑 다르게요."

다시 늑대가 벙어리가 되자 백소율은 장난이라며 싱겁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전 불만 없지만 선생님은 아닐 거예요. 잘 달래주세요."

"고맙다."

페리의 손을 잡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백소율을 보다가 굳게 닫힌 홍유리의 방 문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봤자 쉽지 않을 터. 시간이 해결해주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동안 앞으로 행동으로라도 믿음을 보여야 할 터였다……

***

"수, 숨 막혀."

이야기를 들은 이은하의 반응이었다. 그 이후, 며칠간 고단한 노력으로 어찌어찌 조금은 기분을 풀어줄 수 있었다. 더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약속과 함께.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나란히 걸을 수 있지 않겠나."

무엇보다 바라고 있는 일. 진심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기는 할 테지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다소 회의적이라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은하와는 달리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분명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날이 오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과연 그 날이 가까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아마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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