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5화 〉 #202 앞으로도
* * *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말처럼 시간은하염없이 흘러 몇 번인가의 계절을 보내고 두 번이나 해가 바뀌어 다시 서늘한 겨울이 찾아왔다.
그래. 겨울. 이미 단풍과 낙엽마저 다 떨어진 겨울이 되고 말았다.그리고 그만큼 빠르게 흐른 시간은 곳곳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팀장님. 혹시 저번에 말씀하셨던 건 어떻게."
"다 끝났다며."
"네. 확보는 했는데 조사가 덜 끝나서요. 가능하면 빨리 좀 보내달라고."
"……조사, 조사라."
튕기는 손가락에 눈길을 주었다. 원래 그에겐 없었던 버릇이지만 지난 2년간 옮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그가 자신을 보더니,
"직접 가는 게 어때? 그게 확실할 것 같은데."
"아, 저 오늘 반차라서요."
"반차?"
"네. 약속있거든요."
"그랬지… 그럼갈 사람이 없는데."
이제는 제법 한적해진 3팀을 둘러본 팀장, 구진하는 짧게 한숨 쉬고 말았다.
"아무리 해체가 멀지 않았다지만너무 썰렁한데."
"많이들 그만두셨으니까요. 이브기도 하고요."
"큰 건물이 아까울 정도야."
이 커다란 방에 고작 둘 뿐이다.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3팀이 이제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실제로 지난 2년간 절반이 넘는 인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직했으니까.
비단 이는 여명에만 벌어진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여명이라 이 정도로 끝난 거였지 9할 이상의 클랜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더는 대표 클랜이라 해도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클랜이란 헌터들의 집합체.
헌터란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 반대로 말하자면 몬스터가 없다면 헌터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뜻. 즉, 헌터들의 집합체인 클랜 또한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우택이는 경특으로 갔다던가?"
"네. 그렇죠."
물론 그들의 쓸모가 사라진 건 아니다. 몬스터가 없어졌다고 헌터들이 약해진 건 아니니까. 답답함에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고, 헌터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마찬가지로 헌터밖에 막을 수 없다.
비록 클랜은 쇠락했지만 헌터들은 군이나 경찰로 소속을 바꾸었다. 부팀장이었던 전우택 또한 경찰이 됐고.
"시대가 바뀌는 거겠지. 좋은 일이야."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은 구진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조사는 내가 갈 테니 먼저 가 봐라."
"어…괜찮으시겠어요?"
"……지금 집에 들어가기가 좀 그래서."
"아,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자리로 돌아간 그녀가 먼저 가보겠다며 인사하고 사라질 때까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래. 잘 쉬고."
코트의 깃을 접고 단추를 잠군 구진하는 의자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점심 시간인데 오늘 밥은 혼자 먹어야 하나 생각하면서. 때마침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기에 고개 돌린 그의 눈에 산만한 덩치의 거한이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와 씨, 너 혼자뿐이냐?"
"2팀장님."
"징한 놈.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깐 말 존나 안 듣지. 근데 이 자식아. 넌 이브 날인데 집도 안 가고 뭐 하냐?"
"일이 남아서요."
"일이 남기는. 그냥 들어가기 싫어서 그렇겠지."
"……."
"쯧. 그렇게 헤벌쭉해서 돌아다닐 땐 언제고?"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럼 아니라고?"
"헤벌쭉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대놓고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는 모습에도 구진하는 이를 갈 뿐이었다. 실제로 집에 들어가는 게 제법 껄끄러웠으니까. 그래서 굳이 미뤄도 될 일을 하겠다고 나선 거였다.
"그나저나 3팀에는 왜 오셨습니까?"
"왜는 왜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왔지. 너 혼자 궁상떨고 있을 줄 알았거든."
"……."
"흐흐. 밥은 먹고 가라. 식당에서 콩나물 끓이더라. 국밥일 걸?"
떨떠름하게 끄덕인 구진하는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그사이 다가온 거한은 솥뚜껑만한 손으로 자신의 등짝을 팡팡 두드렸다.
"2년만에 참 변했다. 죄다 갈길 갔구나."
넓은 방에 책상은 많았지만 대부분은 빈 자리였다. 아까 말했다시피 클랜 해체가 며칠 남지 않아서였다.
"아픕니다."
"아까 나가던 애. 이름이 뭐더라. 복도에서 봤는데."
"은하요. 이은하. 까먹었습니까?"
"나이가 나이다보니 가물가물하다. 그래그래. 이은하. 부팀장도 쟤가 달았지 아마?"
"예. 없었으면 3팀은 이미 해체했겠죠. 이래저래 고생 많이 했습니다. 참."
"그럼 넌 평생 마누라 곁이고?"
"……."
"농담이다. 근데 너 인마, 언젠 죽고 못 살더니 크리스마스만 되면 대체 왜 이러냐?"
"셋째 가지자고 하지 뭡니까."
"……? 애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구진하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한숨으로 뱉어냈다.
"제 말이 그겁니다. 작년에는 둘째였는데."
품 속에 넣어둔 약을 물도 없이 삼킨 구진하가 한숨 쉬었다.
"……그래서 요즘 밤마다 죽겠습니다. 진짜."
그러자소처럼 멀뚱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거한은 이내 크게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고. 그 때마다 휘청거리거나 말거나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젖혔다.
***
크리스마스 이브.
몬스터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동안 신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현저히 줄었지만 빨간 날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했다. 집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쉬던 이은하는 시간이 흘렀음을 새삼 느꼈다.
그 여명이 해체 수순을 밟는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심지어 코흘리개였던 자신이 막바지라고는 하나 여명의 부팀장이 되고 말았다.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잊고 있다가 일벌레였던 우택이 클랜을 그만두고 경특으로 소속을 옮긴 탓에 바빠진 탓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끝. 올해까지는 있어도 내년부터 여명은 존재치 않는다. 더는 클랜과 헌터의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에 침대 위에서 옆으로 구르면서 멍 때리는 사이, 알람이 울렸다. 그 시간을 확인한 순간 이은하는 번쩍 일어나고 말았다. 뭣 때문에 반차까지 썼는데!
머리를 빗고 정리하면서 양치하고, 짐을 싸면서 티나지 않는 연한색의 립을 발라 화장까지 마쳤을 땐 지금부터 달리면 어떻게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문단속까지 마치고 나섰을 땐, 조금 두근거리고 있었다.
매년 있는 기념일이었지만 재작년엔 누구씨의 기분이 풀리질 않았었고작년엔 바빠서 즐기지 못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번이 첫 이브일지도 모른다.
"으, 근데 시간이……"
늦지 않을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정거장까지 달리는 와중 기껏 빗어놓은 머리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겨우겨우 붙잡아 탄 이은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라면 어찌어찌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겨우 자리에 착석한 이은하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핸드폰에 온 문자들을 확인했다.
[큰언니 : 너 늦냐? 알지? 늦으면 뒤진다는 거]
[소율이 : 혹시 늦으면 연락주세요]
아직 약속 시간은 안 됐을 텐데 왠지 자신이 늦을 거라 확신하는 사람들과.
[선자님 : 크리스마스 잘 보내요]
[우택 선배 : 메리 크리스마스]
[아넬라 : 이렇게 연락해서 미안한데, 혹시 오늘 출근했었어요? 그 사람이 연락을 안 받네요]
[은아 : 언니.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가. 친구집]
각자 사정으로 연락한 사람들. 일일이 답장해주던 이은하는 동생의 외박 예고 문자에 눈을 부라렸다.
"이게 진짜…!"
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 발랑 까졌을까. 얼른 전화해봤지만 핸드폰은 꺼진 상태였다. 아마 자신이 전화할 거라 예상한 거겠지. 결국 포기한 이은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설마 하루종일 꺼놓고 있진 않을 테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해보면 될 테니까.
그래도 늦지 않아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은하는 버스 위를 오르는 세 명의 복면 쓴 사나이들을 보곤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방법으로?
무슨 이벤트라거나 혹은 추위를 많이 타는 것뿐이리라. 이은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기대를 배반하듯 품 속에서 총을 꺼내들었을 때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
"도, 도착했다……"
오후 3시쯤 출발했었는데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긴 6시였다. 사건에 휘말리긴 했어도 그 자체는 별 것 없었다.
그냥, 헌터도 아닌 일반인들의 소행. 심지어는 시대착오적인 버스 납치. 성공할 리가 없다. 휘말린 자신도 운이 나빴지만 그 사람들도 하필 헌터인 자신이 있는 버스를 납치했으니 마찬가지이리라.
제압하는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버스 천장을 향해 쏜 첫 발의 총성도 들리지 않게 적당히 왜곡시켜 붙잡았으니까.
문제는 그 뒤. 사건에 관해 이런저런 정황을 얘기하거나 하느라 늦어버렸다. 하필이면 버스 배차도 꼬여버려서 택시를 잡았지만 설상가상 펑크가 나고 말았다.
이쯤되면 화가 나기보다도 그냥 우스웠다. 다 포기하고 겨우 도착한 지금이 6시 직전. 핸드폰에 가득 쌓인 문자를 읽을 용기가 차마 나지를 않았다.
어찌저찌 도착은 했는데,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말한다고 믿어주기는 할까.
망설이다 벨을 눌렀을 땐, 누구냐는 인터폰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곧 어렴풋한 한숨 소리와 함께 열린 대문. 조심히 밀고 들어가자 넓은 마당이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현관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늦을 것 같으면 연락해 달라고 문자드렸는데… 들어오세요. 겉옷은 주시고요."
어색하게 웃은 이은하는 백소율의 말에 코트를 벗어 건네주었다. 밖에선 몰랐는데 이런저런 냄새가 나는 걸 보아 요리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코를 찌르는 달콤한 향. 꿀과 버터를 섞어도 이런 향은 나지 않으리라.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을 땐, 이미 다들 모여있었다.
넓은 방에 빙 둘러 앉아있었다.
"너 뭐야. 왜 또 늦어?"
"이제 왔나."
리모컨으로 TV채널을 바꾸는 홍유리와 허벅지 위에 웅크린 알파. 반대쪽 소파에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페리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는 여왕님까지. 심지어 그 옆에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백록까지 있었다.
"순록 대신인가……?"
코는 빨갛지 않지만. 그럼 산타는 여왕님?
"이럴 줄 알고 늦게 시켰죠. 얼른 앉아요. 식겠어요."
어느새 건네준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놓은 소율이가 방석을 가져다주자 테이블에 잔뜩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잔칫상, 상다리가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잔뜩 있는 음식들. 치킨이나 피자는 물론이고 케이크에 과자까지. 심지어는 갈비까지 차려져 있을 만큼 종류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검은 비닐봉지에 쌓인 병의 형태. 모르긴 몰라도 저게 다 술이리라. 과연 얼마나 마시려는 건지. 이은하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얼른 들자는 말에 끄덕거리다 우연히 창 밖을 보았을 땐, 겨울이라 낮이 짧은 탓인지 어둑어둑해 져 있었다. 벌써 달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벌써 밤이네."
"됐으니까, 얼른 먹자."
늦었네마네 투정은 부렸지만,금세 왁자지껄해지고 술이 돌수록 시끄러워졌다. 어느새 음식이 사라져갈 때 즈음, 주정부리는 홍유리와 불쌍하게도 붙잡혀 시달리는 백록을 보고 한참 웃고 있다가 어느새 오늘의 불행을 벌써 잊었음을 깨달았다.
입가를 만지다가 어느새 자신이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별다른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모여서 먹고 떠들고 있었을 뿐인데. 고작 그것뿐인데.
문득, 달이 보고 싶어져 창 밖을 바라본 이은하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언니. 언니? 왜 그래요? 아, 눈 오네요오…"
크리스마스날의 눈. 아름답게 내려오는 눈송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멍하니 중얼거린 말에 누가 아직 이브라고 대꾸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기분좋은 가슴의 떨림을 느끼고 이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에 취한 여왕님에게 안긴 페리. 홍유리에게 시달리는 백록. 감마는 여왕님을 따라온 요정들과 술래잡기 하고 있었고 제대로 자리에 앉아있는 건 자신과 소율이 정도일까. 그나마도 제법 마신 소율이도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지 해롱거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얼마나 또 시간이 지났을까.
"눈은 좋아하나?"
"싫어하지는 않아."
조금 뜬금없는 물음이 들려왔지만 곧바로 답했다. 유일하게 자리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거의 마시지 않은 자신과 알파뿐이었으니까.
"아침에 치우려면 고생 깨나 하겠군."
그 말마따나 감마와 요정들이 술래잡기하느라 탁상 위에 놓인 술병이 데구루루 구르다가 베란다 문에 부딪쳤을 때 이은하는 어색하게 웃어버렸다.정말이지 난장판에 개판 오분 전인 상황. 아침에 뒷정리하고 치울 걸 생각하니 절로 골치가 아파왔다.
그 사이, 피곤했는지 휘청거리던 소율이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 조용히 잠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정각이 넘어 날이 지났노라 알려주는 시계를.
"이브 지났다. 그치? 이제 진짜 크리스마스네."
"메리 크리스마스."
뜬금없이 돌아온 말에 잠깐 멍하니 있다가, 웃어버렸다.
"…응! 메리 크리스마스."
앞으로도 이 같은 날들이 계속 되기를 바라면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