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5화
레이니어의 단호한 대답에 핑거 보울이 놓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레일라가 많이 아프다는 말인가?”
아비에르 백작이 당황하며 레이니어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작은 정말로 레일라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정황이 그랬다. 백작 부인도 시베르도 그리고 모든 시녀들과 하녀들, 그리고 주치의까지. 레일라는 마음의 병이 있을 뿐, 몸은 건강하다고 했으니까.
“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예요.”
레이니어와 눈이 마주친 백작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물었다.
“정말인가?”
“예.”
레이니어는 다들 멈춰 있는 가운데 홀로 품위 있게 핑거 보울에 손을 씻더니 하녀에게서 받은 수건으로 손을 닦아냈다.
“어, 어머! 레인도 참! 그새 레일라와 친해졌나 봐요.”
시베르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고 백작 부인은 싸늘하게 레이니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레일라에게 직접 물어봐야죠.”
“하지만 의사 말을…….”
“제가 그럼 지금껏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네? 여보?”
백작 부인이 슬픈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백작이 당황한 듯 레일라에게 물었다.
“의사가 농담한 거니, 레일라?”
“예. 제가 레인에게 꾀병을 많이 부려서요.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랬나 봐요.”
레일라는 백작이 제게 보이는 관심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제 자식이니 눈에 밟히는 것이지, 진정한 딸로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백작이 정말 그녀를 아꼈다면 그녀가 정말로 아프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매도하더라도 한 번 정도는 방으로 찾아올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같은 3층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무관심은 결코 애정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레일라는 체념한 듯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레인이 와서 다행이에요. 제가 답답할 때마다 찾아서 귀찮을 텐데.”
“정말 레일라가 건강한 게 맞습니까?”
백작의 물음에 레이니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레일라는 그에게 동조해 달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기엔 제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제가 집중해서 치료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말을 하려고 그렇게 말한 건가 봐요. 레인도 참.”
시베르가 친근한 척 말하며 레이니어를 노려보았다.
휴고도 레이니어에게 원한이 있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휴고는 레이니어 때문에 옷이 벗겨진 채 청소 도구실에 묶인 적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레이니어의 예상대로 하녀였고.
다만 둘 다 레이니어를 노려보면서도 그가 차례로 그들을 바라보자 육식 동물 앞에 초식 동물처럼 눈을 피했다.
“새어머니께서 레인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호호. 레일라 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레인은 정말 유능한 의사란다. 일전엔 나를 마차에서 구해줄 정도로 강하기도 하고.”
레일라는 저를 빤히 보는 붉은 눈동자가 신경 쓰여서 일부러 정면을 보았다. 그러자 소네트가 그녀의 눈을 피해 식탁에 있던 핑거 보울에 손을 씻었다.
레일라도 똑같이 했다.
소네트의 행동을 본 그녀는 쓰게 웃었다. 어쩌면 그는 휴고의 말처럼 자신이 죽는 걸 노리고 약혼하길 바라는 걸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고 보니, 휴고. 어제 청소 도구실에 있었다며?”
레일라가 휴고에게 물었다. 그녀는 휴고가 계속 저를 공격할 것 같아 이번에는 먼저 공격했다.
“뭐? 그걸 어떻게……!”
“하녀들이 그러던데 정말이야? 왜 청소 도구실에 있었어?”
“나랑 술래잡기 하고 있었어.”
시베르가 끼어들더니 휴고의 편을 들었다.
“아, 그렇구나.”
레일라는 시베르가 나서서 도와주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듣기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발견됐다고 하더군요.”
“너……! 뻔뻔하게 그런 말을!”
레이니어의 공격에 휴고가 부끄러움과 분노로 바들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저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는 레이니어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아비에르 백작이 ‘크흠’ 헛기침을 하며 모두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게 정말이더냐, 시베르?”
“저는 그거까진 몰라요. 숨바꼭질하다가 잊어버리고 레일라와 소네트랑 있었거든요.”
시베르가 도와달라는 듯 백작 부인을 보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백작의 손을 꽉 잡고선 말했다.
“사실 로날드 소백작의 옷에 뭐가 튀었었대요. 그래서 새 옷을 가져다주려던 사이에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지 뭐예요?”
“뭐라고요? 괴한이라니…….”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백작 부인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고는 제 말을 자른 백작에게 속상하다는 듯 입을 삐죽이자 말을 멈추었다.
“그 괴한은 잡아서 치안대로 보냈어요. 그래서 말 안 하려던 거고요.”
“아, 그렇군요.”
“휴고가 비록 시베르와는 헤어졌어도 오래 교제하던 사이니까요. 소문이 안 좋게 나면 시베르에게도 안 좋은 추문이 붙을 거 같아서 제 선에서 덮었어요.”
백작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백작을 보았다. 그러자 백작의 표정이 누그러들며 오히려 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해해 주시는 거죠, 여보?”
“물론이죠, 부인.”
레일라는 백작의 태도에 웃음도 나질 않았다. 익숙했으니까.
그렇게 애피타이저를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를 즈음 메인 디쉬가 나왔다.
“요새 레일라와 자주 만난다고요, 브루스 소후작?”
백작의 말에 소네트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는 아까부터 레일라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휴고가 묘한 표정으로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둘의 관계가 정말로 좋아진 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레일라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휴식 공간처럼 느끼고 있었으니까.
“여보, 브루스 소후작이 청혼서를 들고 왔지 뭐예요.”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니까요.”
백작 부인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백작이 화기를 띠며 웃었다.
“레일라,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구나.”
“처음 듣는 말이에요. 소네트, 그게 정말이야?”
그녀가 소네트를 보며 묻자 소네트가 그제야 레일라를 보며 대답했다.
“응.”
“나한테는 시간을 주기로 했잖아.”
“미안. 내가 마음이 급해서…….”
소네트와 새어머니의 목적이 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마 소네트가 백작 부인의 꼭두각시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 눈치를 보며 입을 완전히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그 확률은 높았다.
그 둘은 차이가 컸다.
결혼한 뒤 레일라를 내보내는 게 목적이라면 소네트를 이용해 목숨을 부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달랐다. 결혼 후에도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꼭두각시는 곤란했다.
“저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레일라.”
그녀를 낮게 부르는 건 백작이었다.
“그러면 소후작의 입장이 뭐가 되겠니. 식사를 마칠 때까지는 있거라.”
“……예.”
레일라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깨작이던 그녀는 이제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네트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소후작 영식이 그러던데 우리 레일라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정말이오?”
“아, 네. 제가 레일라의 데뷔탕트 때 그곳에 있었거든요.”
백작 부인의 말에 백작이 웃으며 소네트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네트가 멋쩍게 대답하며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꽉 쥐었다.
“레일라가 마침 교제하던 사람과도 헤어졌다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만나러 왔습니다.”
“그것도 우리 시베르 생일 때 만난 거라고 하더라고요.”
“장하구나, 시베르. 네 생일 파티인데 레일라를 생각해서 그렇게까지 하다니.”
“아니에요, 아버지. 저는 레일라를 위해 조금 양보한 것뿐이에요.”
시베르의 생일 다음 날은 레일라의 생일이었다. 백작은 그것을 잊었다. 레일라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저택에서 레일라 혼자뿐이었다.
그녀의 전 애인들도 알았을 테지만 휴고는 레일라의 생일을 물은 적도, 챙긴 적도 없었고.
“그럼 레일라 아가씨는 생일 선물을 미리 받은 셈이네요.”
레이니어가 불쑥 그렇게 말하자 백작이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본 레일라 아가씨의 신상명세서에는 시베르 아가씨의 생일 다음 날이 출생일이더군요.”
“아, 마, 맞아요! 그래서 제가 레일라에게 미리 선물했어요! 저택에서 누구도 우리 레일라의 생일을 모르는 거 같아서요.”
시베르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약간의 죄책감이 든 표정이었다.
“그랬었니?”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는 레일라를 보다가 시선을 이내 거두었다.
백작은 레일라가 불편했다. 레일라가 죽은 제 어미를 닮기도 했고, 그녀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드는 것 같았기에 그랬다.
백작은 레일라가 태어나지 않길 바랐다.
“왜 말 안 했니?”
“바쁘신 거 같아서요.”
“……그런 답답한 점은 네 어미와 똑같구나.”
백작의 말에 레일라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가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다. 내가 무심했구나. 다음부터는 시베르의 생일 선물을 보낼 때 네 것도 보내마.”
“감사해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한 이후로 더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웃는 척하며 자리에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