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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6)화 (16/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6화

“레인, 어떻게 제 방으로 들어온 거죠?”

레일라가 당황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천장에서 내려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던 찻잔에는 홍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저걸 든 채로 천장에서 뛰어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에 제국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더라도 저건 말이 안 됐다.

“천장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금 제가 천장 봐서 그렇게 말한 거죠?”

“네.”

그는 레일라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말했다.

“왜 울고 계시죠?”

“무슨 소리예요?”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근처 탁상에 대충 올려두었다. 레일라는 그 찻잔이 다이닝 룸에서 종종 사용되는 다기라는 걸 확인했다.

그는 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차림 그대로였다.

“아까 식사도 제대로 못 하던데요.”

“……말 돌리지 말고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가씨가 우셔서 왔죠.”

“저 안 우는데요.”

레일라는 혹시라도 자신이 우는 건가 싶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은 건조하기만 했다.

“네, 우시네요.”

“저 안 울어요.”

“우시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가와서 그녀의 앞에 섰다. 레일라는 그가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건가 싶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긴장한 것보다는 수심에 잠긴 사람 같았다.

“속상하시군요.”

“독심술 하는 거예요?”

“아뇨. 아까 상황 때문에 아는 거죠.”

“아.”

레일라는 정말로 이 집안에 누구도 제 편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하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제 아버지란 작자는 제게 어떤 관심도 없었다.

“봐요, 우시잖아요.”

“안 울어요. 눈물도 안 나는데 왜 자꾸 운다고 그래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속이 답답하긴 했다.

“저랑 있으면 나아지실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일라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그의 손길에 놀랐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제 행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

“네.”

“이참에 요양할 겸 밖에 나갈까요?”

“저, 밖에 나갈 체력이 안 될 거 같은데요.”

“저랑 있으면 체력이 생기실 겁니다.”

레일라는 그가 정말 제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집 안에만 있고 싶진 않았다. 요즘 상태가 나쁘진 않으니 뛰지만 않는다면 기절하거나 피를 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디로 가게요?”

“저랑 함께 나가실 건가요?”

“아뇨. 레인을 믿을 수는 없어서요.”

레일라는 방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레이니어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비록 식사 때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호감을 사려는 걸지 모르니까.

“그럼 저를 믿을 수 있게 해야겠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의 손을 느릿하게 쥐었다. 그대로 그녀를 침대로 이끌자 레일라는 발걸음을 뗐다.

레이니어는 그대로 레일라를 침대에 앉힌 뒤 그 옆에 자리잡았다.

레일라는 자신을 웃으며 보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그가 또 눈을 피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눈을 피한다.

레일라가 사람들에게 번번이 속을 때마다 보였던 그 징조는, 지난생의 그녀가 믿지 않아 무시되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꾸 제 눈을 자꾸 피하는 레이니어와 지금껏 저를 속였던 수많은 사람이 겹쳐 보여 속상했다.

어차피 누구도 제 편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 때의 무게와 가슴으로 실감할 때의 무게는 또 달랐기에.

“그만.”

“네?”

레일라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레이니어를 놀란 눈으로 빤히 보았다. 그러자 그가 문에서 레일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백작 부인은 제게 아가씨를 감시하라고 이곳으로 보낸 거예요.”

“네?”

“그리고 저는 백작 부인의 사람입니다.”

“네?”

“하지만 이제는 아가씨 사람이 되어 볼까 합니다.”

레일라는 갑자기 늘어놓은 그의 말 때문에 당황해서 입을 벌린 채 굳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던 레이니어는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목 뒤를 긁던 그가 말했다.

“이젠 믿을 수 있으십니까?”

“아……. 음……. 네.”

레일라는 그가 대체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온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졌다. 정말 저를 죽이러 왔다면 그걸 말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이젠 안 우시니 좋네요.”

“아……. 네.”

드디어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레이니아의 얼굴을 보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이제 믿을 수 있는 건가요?”

“방금 새어머니의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이중 첩자라는 거죠.”

“저는 레인에게 바라는 게 없는데 이중 첩자인가요?”

“바라는 게 왜 없습니까?”

레이니어가 삐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레일라는 원작의 그가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조금 거리를 두고 싶었다.

원작의 그는 시베르 한정으로 다정했다. 평소에는 두려운 사람이었고.

물론 그에게 피를 얻기 위해서라면 친해져야 한다. 하지만 뒤탈이 없을 정도로만 친해지고 멀어지는 게 가장 좋았다.

“정말 제게 바라는 게 없습니까?”

그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레일라는 어쩌면 그가 제 병을 알고 피를 대가로 무언가를 거래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있어요.”

“어떤 거죠?”

그러자 그가 조금 물러나며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레인만 줄 수 있는 거예요.”

일단은 피가 필요하니까.

“그렇군요.”

그는 그제야 흡족하게 웃다가 침대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럼 같이 가죠.”

그녀는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죽는 걸 원치 않지만 어차피 한번 죽었던 삶이었다. 이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겠지.

그렇게 뻗어 온 그의 손을 잡은 레일라는 어딘지 우스워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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