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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7)화 (17/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7화

“그 사람이 곧 후작이 될 거라 그렇습니까?”

“신분이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예. 백작가 영애에게 후작 부인이라면 꽤 구미가 당길 자리이긴 하죠.”

레이니어는 웃고 있었지만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게 느낀 레일라는 그가 삐딱하게 웃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자세히 보았더니 제대로 웃고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만 웃고 있고 화를 내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신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왜죠?”

“저는 아비에르 백작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제가 살아 봐야 얼마나 살겠어요?”

그러자 그가 웃는 표정을 천천히 풀었다. 마치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레일라는 그에게 동정심이 작전이 꽤 먹히는 것 같아 말을 이었다.

“죽기 전에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리고 소네트라면 저를 자유롭게 둘 거 같아서요.”

“고작 그런 이유랍니까?”

“네.”

레일라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손끝으로 레일라의 눈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이상하죠. 왜 우는 거 같지.”

“아까부터 운다고 그러는데 그만 해요. 저 안 우니까.”

“예.”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그녀에게 씌워진 로브의 후드를 걷고 로브의 단추를 풀었다.

“뭐 해요?”

레일라의 로브를 걷어간 그가 제 것도 벗으며 그녀에게 에스코트하듯이 팔을 내밀었다.

“들어가죠.”

“에클레르에요? 저를 알아 볼 텐데요.”

“알아 봐야죠.”

레일라가 건강해지려면 레이니어가 필요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는 제게 꽤 호의적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제게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줘야 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저도 무언가를 내놓아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냉정해지려 애쓰며 그의 뜻을 따르기로 다짐한 뒤 팔을 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제 부하들이나 동료들에겐 믿음직한 전우이자 상관이었으니.

“구색을 좀 맞춰 주시면 됩니다.”

“뭐 하려는 건데요?”

“아가씨를 기분 좋게 해 주려고요.”

그렇게 그들은 에클레르 상점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안은 백화점처럼 층이 나눠져 있었다. 1층은 드레스를, 2층은 향수를, 3층은 다기를 팔고 있었다.

“어머, 저 머리색. 레일라 아비에르 영애 아니야?”

레일라가 들어오자마자 안에 있던 영애은 자기들끼리 다 들리게 수군대고 있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크문드 제국 수도에서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적었으니까.

거기에 1층 매니저는 레일라를 보자 한숨을 쉬면서도 이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1층의 매니저는 레일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몇 번이나 이곳에 몰래 왔었으니까.

‘또 오셨습니까?’

‘휴고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로날드 소백작께서요? 그럴 리가요.’

‘정말인데…….’

‘일단 알겠으니 저쪽에 앉아 계세요. 주인님께선 오실지 모르겠지만.’

휴고가 저를 바람맞히는 일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매니저는 그녀를 무시하기 바빴다.

어차피 자신이 레일라를 어떻게 대하든 휴고에게 말하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아, 또 로날드 영식에게 매달리러 왔나 봐.”

“지난번에도 계속 기다리더니.”

“그렇게 기다려도 안 올 텐데, 어쩌나.”

영애들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 조용하진 않았던 내부는 레일라가 들어오는 순간 고요해졌고, 들리는 건 영애들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들은 시착용 드레스를 모아 둔 자리 근처의 아주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였으면 차라리 타국으로 간다. 그렇게 구질구질 매달려도 안 돌아오는데 뭐 하러.”

“그러니까. 심지어 로날드 영식이 잘생기길 했어, 키가 크길 해?”

“보는 눈도 없다니까.”

드레스를 시착하던 이들끼리의 대화를 들은 레이니어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옆에 저 사람은…….”

“애인입니다.”

레이니어가 웃으며 대답하자 영애에게 답한 걸 알고는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엄습해 몸이 떨렸다.

“휴고 로날드 영식이 생긴 게 볼품없긴 하죠. 역시 영애들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참 대단하시군요.”

레이니어의 삐딱한 말에 레일라는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그렇죠?”

“아…… 네. 레, 레일라 영애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벨리아 영애.”

레일라는 제게 말을 건넨 벨리아 이벨르에게 애써 인사했다.

“이벨르 영애. 영애가 보기에 지금은 어떤 거 같죠?”

“네? 뭐, 뭐가요?”

“지금도 레일라의 취향이 안 좋은 거 같나?”

“아……. 그…….”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레이니어는 아까 레일라가 느낀 것처럼 웃고 있지만 화가 난 듯했다.

벨리아와 함께 있던 다른 영애들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인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말투는 정중한데 묘하게 하대하는 느낌이라. 이 자리에 누구도 그가 평민으로 위장해 있다고 깨닫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입에 홍차라도 머금으셨나. 왜 말이 다들 없지?”

레이니어의 말에 그녀들은 뻔뻔하게 나갈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 그러지 못했다.

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서 있음에도 아주 어두웠다. 검정 머리카락은 빛을 받으면 붉게 보이거나 갈색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 많았건만 그의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검었다.

거기에 흔치 않은 붉은 눈 때문인지 두려운 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외모는 한번 보면 다시 보게 되는 이상적인 비율과 완벽한 이목구비였다.

키도 어찌나 쭉 뻗었는지 이곳에서 가장 컸다. 몸도 다부진 게 마치 기사 같기도 했다. 하지만 행색은 귀족처럼 입고 있었기에, 그녀들은 그가 타국에서 온 귀족이 아닐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지, 자기들을 하대하는 걸 보면 일반 귀족이 아니라 왕족이거나 황족일 것 같기도 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보단 지금처럼 입 닫고 있는 편이 훨씬 낫겠군.”

“아…….”

벨리아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다른 영애들도 자연스럽게 창밖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손님?”

그러자 매니저가 상황을 깨닫고는 놀라 튀어나왔다.

레이니어를 종업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벨론의 이름으로 예약한 물건이 있어 찾으러 왔어. 엔벨마크의 모피를 주문했지. 그리고 위층에서도 물건을 찾아와 주면 좋겠는데. 향수는 <꽃의 요정>이고, 서국에서 수입해오기로 했던 다기도 가져오도록.”

전부 수입품이었다. 본래는 경매로 내놓을 정도로 가격이 엄청난 것들이었고.

“애인에게 선물하기로 해서 직접 왔으니 서둘러.”

그가 비록 신분을 숨기고 있지만 지금도 엄청난 부자라는 걸 레일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비싼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에게 놀라진 않았다.

다만 그녀가 놀란 것은 예약을 몇 달 전부터 받아서 겨우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이미 예약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엔벨마크의 모피는 못 해도 6개월 전에는 예약해야 했다.

향수도 그랬다. <꽃의 요정>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조향사가 만드는 것이었다. 그 비밀의 재료가 바다 건너 로텐에 있었기에 이것도 3개월 전에 예약해도 받을 수 있을지 말지 하는 물품이었다.

그나마 서국에서 만들어진 다기는 1달이면 충분했지만.

“아, 그…… 손님,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그러기엔 시간 낭비 같군. 빨리 내 애인에게 물품을 보이도록.”

레이니어가 갑자기 표정을 다정하게 바꾸며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짓던 당혹스러운 표정에서 그와 똑같은 표정으로 바꾸며 웃었다.

“기대되네요, 레인.”

“기대해도 좋습니다, 레일라.”

다정하게 말하는 그가 바라던 대로 레일라는 사이가 좋은 척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그가 작게 떨다가 팔짱을 풀었다.

레일라는 그가 기분 나빠 하는 건가 싶어서 떨어지려 했다.

“빨리 가져와.”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가슴에 레일라의 어깨가 닿았다. 그의 가슴은 옷 아래에 있어도 너무 딱딱해서 마치 돌에 어깨를 밀착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손님, 정말 죄송하지만 VIP실로 입장 부탁드립니다.”

“내가 시간이 없다고 했지.”

레이니어가 차갑게 말하자 직원이 당황했다.

직원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마치 흑표범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서.

“아니면 또 물품이 아직 안 온 건가?”

그 순간 속닥이던 소리까지 전부 사라져 내부가 적막에 싸였다.

“듣기로는 카스피해에서 무역업을 하던 배가 난파됐다던데 혹시 로날드 백작가의 것이던가?”

“아, 그……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럼 왜 물건이 없지? 난 그저 물건을 받고 가려는 것뿐인데. 왜 VIP실까지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 그리고 물건이 늦는다면 편지라도 보내야 할 것 아닌가? 감히 물건도 오지 않았는데 날 방문하게 해?”

레이니어의 말에 다시금 속닥거리는 영애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세상에.”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얼마 전에 난파된 배가 이던 상단의 배였다니!”

그녀들의 반응에 레이니어가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일라가 그를 불렀다.

“레인.”

“예.”

“내일 다시 오죠. 제가 지금은 좀 피곤하네요.”

“그럴까요?”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던 손으로 뺨을 만졌다. 레일라는 간지러웠지만 움츠리지 않으며 웃었다.

“네.”

“아, 그…… 손님…….”

“내일 다시 오지. 내일까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

“아…… 네!”

매니저는 울상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영애들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벨리아 이벨르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매니저.”

“예, 아가씨.”

“저번에 보니까 서국의 다기를 예약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

“아……. 네…….”

“제일 빠른 걸로 예약하고 싶은데.”

그러자 매니저가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들 근처로 가서 말했다.

“그…… 지금은 사정이 있어 예약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매니저의 태도에 영애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으며 확신했다.

로날드 백작가의 무역선이 난파되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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