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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0)화 (20/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0화

“레일라.”

레일라는 소네트의 손에 이끌려 1층의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를 3층 복도에서 부른 사람은.

“새어머니.”

“백작 부인.”

“잠시 레일라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레일라는 차라리 소네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갈까 하다가 지금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며 애써 웃었다.

“네, 새어머니.”

“따라오렴. 브루스 소후작은 미리 내려가 있어도 좋아요.”

“예.”

소네트도 떨떠름하게 말하고는 천천히 레일라의 손을 놓았다. 그가 꽉 쥐었다가 놓는 바람에 레일라는 손에 압박감이 남은 채 그에게서 떨어졌다.

레일라는 새어머니가 또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꺼림칙했다.

그렇게 둘은 백작 부인의 집무실이 아닌 다른 방에 들어갔다. 앉으라며 손짓하는 새어머니의 지시에 레일라가 천천히 따랐다.

그러자 백작 부인이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소파의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들며 레일라에게 말했다.

“요새 아주 건방져졌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당돌하기까지 해.”

저번 생의 레일라는 그녀의 이런 말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 한 번 죽었기 때문인지 레일라는 죽으면 죽는 거지, 라며 두려운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실상 죽음이 정말로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죽고 나니,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아비에르 백작가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도 제 죽음에 슬퍼하지 않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자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예전처럼 당하고 살 바엔 죽더라도 복수하고 싶었다.

제 죽음을 가장 바라는 자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휴고가 널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더구나.”

“아, 네. 그래도 전 휴고를 다시 만날 생각이 없어요.”

“왜?”

“그야…….”

시베르가 휴고를 뺏어갔으니까.

레일라는 휴고에게 더는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교제 초에는 정말 다정하고 무조건적으로 제 편을 들었던 그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는 레일라 몰래 시베르와 밀회를 즐기고 시베르와의 관계를 숨기지도 않았다.

거기에 시베르가 재밌길 바란다는 이유로 레일라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질 못했다. 오히려 미안하다고,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는 이전 생의 레일라를 조롱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시베르와 헤어지고 제게 돌아왔을 때에도.

‘시베르는 너처럼 아프지 않아서 좋았는데.’

‘시베르는 너처럼 겁이 많지 않았어. 키스가 뭐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두려워해?’

‘시베르가 너보다 이 드레스에 더 잘 어울렸는데.’

시베르 이야기만 어찌나 했던지.

“저는 휴고에겐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했지만,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어금니도 너무 꽉 물어서 턱이 저리다는 걸 깨닫고는 힘을 풀었다.

“왜? 휴고가 어때서?”

레일라는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저를 떠보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의도든 제게 좋은 의도는 아닐 것도 뻔했다.

“저는 시베르 언니가 정말 좋아요. 그러니까 언니가 행복하길 바라서 휴고도 정리한 거고요.”

레일라의 가련한 대답에 백작 부인이 옅게 웃다가 다리를 꼬았다.

“휴고는 네가 가지는 게 어떠니?”

“예?”

“내가 보기에 넌 휴고를 완전히 정리한 게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휴고가 널 계속 찾아오는 것도 그래서겠지. 네가 계속 여지를 주니까.”

“새어머니.”

“휴고랑 약혼하렴.”

레일라는 당황했다. 자신과 소네트와 약혼하길 바라던 사람처럼 굴던 백작 부인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소네트가…….”

“소네트는 너와 결혼하기엔 과분한 사람이더구나.”

“그게 무슨…….”

백작 부인이 잠시 일어나 제 침대 옆 탁상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 레일라에게 건네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레일라는 백작 부인이 뭘 보라고 한 건지 모르겠어서 천천히 위에서부터 읽었다.

그것은 청혼서였다.

“제일 아래를 보렴.”

아래에는 소네트가 그녀와 결혼할 시에 지급하기로 한 것들에 대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베릴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이란다.”

“아.”

“결혼하게 되면 네 이름으로 넘겨주겠다고 하더구나.”

레일라는 문득 쥐고 있던 종이에 청혼 대상의 이름이 빠진 걸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네트가 작성한 건 분명했다. 그의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까.

“브루스 후작가에선 딱히 널 지목한 건 아니란다.”

“하지만 시베르 언니는 소네트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베르는 아직 어리단다. 브루스 후작가가 가진 게 얼마나 큰지 잘 못 보는 거겠지.”

“아…….”

레일라는 일부러 곤란한 척했다. 어차피 소네트와의 결혼도 죽음을 피하기 위한 목표에 불과했다. 자신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 시베르가 가지고 싶어할 걸 알았기에 장단에 맞춰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소네트는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요.”

“아직은 브루스 소후작도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그렇단다. 네가 시베르보다 잘난 게 하나라도 있니?”

레일라는 새어머니가 또 저와 시베르를 비교하려 들자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또 쓸데없는 말로 기분만 상하게 할 테니까.

“네가 시베르보다 건강하기를 해, 예쁘기를 해. 거기에 사교계에서 넌 아무런 입지도 없지. 후작이 될 브루스 영식에겐 레일라 너보다 시베르가 어울려. 그리고 중앙 귀족인 브루스 후작에겐 사교계의 입지가 있는 영애가 필요하지.”

레일라는 그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잘 알아들었으리라고 믿어. 그럼 다이닝 룸에서 보자꾸나.”

백작 부인은 자애롭게 웃는 낯으로 레일라에게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레일라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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