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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5)화 (25/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5화

“황가의 피를 마시면 그대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걸 알 테지.”

“예.”

“그럼.”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턱을 들며 레일라를 하대하듯 바라보았다.

“내 말을 잘 들어야겠지?”

“예.”

레일라가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레이니어 이외의 보험이 생긴 건 기뻤지만, 이렇게 건방진 사람일 줄은 몰랐다.

하긴 황태자로 오냐오냐 자란 그에게 자신은 그저 그런 귀족들 중 하나로 보이긴 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제게 오늘 온 것도 자신과의 친분 때문이 아니라 라미엘라 황후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가 전하를 위해 무엇을 하면 될까요?”

“나와 가까워져. 그리고 앞으로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알겠습니다.”

“말을 잘 들으면 브루스 후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지.”

“감사합니다.”

레일라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거만해질 때의 휴고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리 잘생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눈매가 레이니어와 닮았건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없이 황궁까지 도달하자 그는 먼저 내려서 아까처럼 다정한 표정의 가면을 쓴 채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황궁은 처음이라고요.”

“네, 전하.”

레일라는 적당한 때에 빠져나올 생각을 하며 그의 손을 잡고선 마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웃는 얼굴의 아나시스 황태자를 따라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연회장에 도착하자 화려함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놀랐군요?”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어딘지 원작에서 봤던 것과는 조금 다른 듯했다.

그녀가 원작에서 봤던 연회장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분명 원작의 연회장은 둥근 이슬람 사원처럼 생겼었다고 했었다. 라미엘라 황후가 동쪽에 있는 모 왕국의 양식을 따서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본 연회장은 마치 고딕 양식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이 뾰족한 느낌의 모양.

분명 레이니어가 혁명 당시에 부서진 건물을 재건했을 때 사용한 양식이었다.

언제 이렇게 바뀌었지?

회귀해서 공사할 당시의 기억이 없는 걸까?

레일라는 그간의 일 때문에 자꾸 무엇이든 의심하는 습관이 생겨서인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벌써 피곤한 건가요?”

“아뇨. 너무 예뻐서 긴장했어요.”

연회장은 외부부터 아주 찬란했다. 삼각뿔로 된 지붕과 흰 벽, 그리고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여기저기 달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위엔 완벽하리만치 정갈하게 깎여 있는 덤불과 장미들.

 백작저가 화려하다고 여겨 왔지만, 황궁에 비하면 그저 유치원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입장하자마자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곧장 황후 쪽으로 이동했다.

“어머나. 어서 와요, 영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호호호. 데뷔탕트 이후로 처음 보는 거 같네요.”

황후는 여전히 위엄 있는 눈매와 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황태자는 웃으며 똑바로 섰는데, 누가 봐도 엄마와 아들처럼 닮아 있었다.

“그나저나 레일라 영애. 요새 집안에 새로운 의사를 들였다던대요.”

“아, 네.”

“그 의사와는 많이 가까운 사이인가요?”

“아뇨. 제가 낯을 가려서요.”

레일라는 이곳에 온 이유를 드디어 알 것 같았다.

황후는 어쩌면 수도에 신분을 숨기고 사는 레이니어에 대해 눈치챈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저를 황태자를 붙여 초대했다는 걸 보면. 원작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랑 관련이 있는 듯했다.

원작에서는 시베르가 비슷한 사건에 휘말렸다. 레이니어가 제자리를 찾기 전,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녀에게 관심 있는 척 접근했다. 그러면서 레이니어에 대해 의심하고 견제했었다.

시베르에게 했던 행동을 자신에게 그대로 하는 걸 보면 아직 확신은 없는 상태고,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의사가 붉은 눈을 가졌다고 하던데요.”

“예, 맞습니다.”

“혹시 등에 화상 자국도 있던가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의사의 등을 볼 일은 없어서요.”

레일라가 당황한 척하며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에클레르에서 함께 있던 사람도 그 의사였나요?”

“아…… 네.”

황후는 그녀의 순종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왜 이렇게 떠는 거죠?”

“아……. 죄송합니다.”

“호호호.”

황후가 기껍게 웃으며 레일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영애는 참 귀엽군요. 마음에 드네요.”

“아, 아닙니다.”

“그 의사와는 좀 더 가까워지는 게 어떤가요?”

“예, 알겠습니다.”

레일라는 굳이 묻지 않았다. 황후는 제게 복종하는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레일라는 차라리 그들과 적당히 치대다가 빠진 뒤 피를 얻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들은 레이니어가 황궁으로 돌아오는 순간 수세에 몰리게 될 자들이니까.

“어머나, 귀여워라. 조건도 없이 말을 듣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황후 폐하께서 바라신다면요.”

“좋아요. 마음에 드네요.”

황후가 부채를 접더니 레일라의 머리카락을 슥 훑던 손을 쇄골에 내려두었다.

“그 의사에 대해 제게 모든 걸 보고해요. 그러면 영애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일라가 긴장한 척하며 가슴께에 손을 꽉 쥐고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황후가 입매를 예쁘게 올리며 웃었다.

“황후 폐하, 곧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실 거 같습니다.”

“알겠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레일라 영애.”

“아, 네!”

레일라는 고개를 팍 숙이며 떠는 척했다. 그러자 옆에서 아나시스 황태자가 코웃음을 치며 레일라에게 팔짱을 끼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레일라는 여전히 떠는 척하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황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첫 춤은 제가 시작해야 합니다.”

“네.”

황후가 여는 무도회였기에 황후가 없을 경우, 가장 먼저 춤을 추는 사람은 황태자여야 했다. 그렇다는 건 레일라도 그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레일라는 문득 춤을 추다가 피를 토하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하지만 요새 건강해진 몸 상태를 보면 한 곡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럼 가죠.”

“네.”

그는 그녀를 배려하는 척 웃으며 팔을 당겼다. 황태자가 홀 중앙으로 오자 악단이 노래를 바꾸어 우아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레일라는 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추었다. 데뷔탕트 이후로 누군가와 춤을 춘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숨통을 틔워 주는 무언가가 된 것 같았다. 다만 그 기분은 아나시스 황태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조해졌지만.

숨이 차지 않을 정도의 느린 곡으로 연주가 끝날 때까지 추었다. 그랬더니 그가 웃으며 그녀를 테이블 쪽으로 데려갔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잠시 다녀오죠.”

아나시스 황태자가 레일라에게 함께 가자는 듯 묻자 레일라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저는 잠시 여기서 기다릴게요.”

“피곤한 건가요?”

“숨이 조금 차서.”

“알겠습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놓고는 웃었다.

“빠르게 다녀오죠.”

“네, 다녀오세요.”

다들 레일라가 황태자와 어떻게 함께 온 건지, 그리고 왜 함께 춤을 추었는지 궁금해했지만 다가오진 않았다.

그녀의 소문이 워낙 흉흉했으니까. 게다가 그녀에게 말을 걸 정도로 황태자와 대단한 사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는 일부러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고 매 무도회마다 파트너를 바꾸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제 입지를 위해서였다. 누구든 그의 옆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환상을 이용해 황후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좋은 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났건만 황제도 황후도 황태자도 나타나질 않았다. 사람들은 저들끼리 떠들며 어울리고 있었고, 레일라는 벽의 꽃처럼 그렇게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차라리 휴게실로 가서 쉴까 했지만 휴게실에 있을 승냥이 같은 영애들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걸 떠올리자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로 가서 커튼을 내리자 연회장의 소음이 차단되는 것 같았다.

하늘은 벌써 별이 보일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연회장의 불빛 때문인지 멀리 보이는 별보다 등 뒤로 비치는 빛이 더 세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연회장 1층이 무도회장이라 그런지 테라스는 옆과 차단이 잘 되어 있었다. 울창한 덤불로 옆을 막아 둔 것처럼.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네요.”

그 순간, 레일라는 소리치려다가 이내 몸을 떠는 것으로 그쳤다.

그녀의 앞으로 나타난 것은.

“레인이에요?”

“예.”

가면을 쓴 레이니어가 검은 정장 차림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가면을 두고 가셨더라고요.”

“이거, 가면 무도회였나요?”

“앞으로 2시간 뒤부터는 그렇다고 하던걸요.”

레이니어가 그녀에게 흰 가면을 건넸다. 레일라는 그것을 건네받고는 주위를 살폈다.

황후가 제게 레이니어에 대해 물었던 게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만나는 게 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왜 또 우셨을까요.”

“저 안 울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일라의 뺨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레일라의 대답에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믿어 드리죠.”

그녀는 대체 그가 왜 백작 부인에게 협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황제가 내정한 차기 황제였다. 그런 그에게 고작 백작가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백작 부인에게 협조하는 걸까, 하고.

그 순간이었다.

“거기 누구냐!”

“이런. 저는 이따가 다시 오죠.”

레이니어는 이내 다시금 뒤로 몸을 빼며 사라졌다. 레일라는 근위병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때.

“어머, 레일라?”

시베르가 소네트의 팔짱을 낀 채 들어오고 있었다.

“레일라 너, 드레스가…….”

하필이면 제 것과 똑같은 드레스 차림의 영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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