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6화
레일라는 시베르가 은근히 적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시베르의 적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시베르가 가진 백작가의 재력과 그녀의 당당한 태도, 그리고 많은 사내들이 그녀를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겠지.
‘엘리아스 영애의 약혼자가 저를 좋아하는 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제가 그 영식에게 말을 걸기라도 했나요, 함께 춤을 추기라도 했나요?’
‘시베르 영애!’
‘누군가 저를 흠모한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다만 그건 제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죠. 엘리아스 영애야말로 제게 이런 같잖은 질투는 그만하시고, 본인이나 돌아보세요.’
‘……!’
‘영애가 그렇게 촌스러운 드레스나 입고 다니니 약혼자가 제게 빠진 게 아니겠어요?’
레일라는 시베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베르는 아주 뻔뻔한 사람이었다.
처음 빙의했을 때는 시베르의 말이 맞다고 믿었다.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고, 주위의 사내들이 그녀에게 빠져서 곤란해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베르는 자신이 홀리면 누구라도 넘어올 걸 아는 것처럼 당당하게 남의 약혼자를 유혹하고 다녔다.
만만한 레일라의 연인은 더 서슴없이 뺏었고.
정말 원하는 일은 꼭 해야 하는 흑막 악녀였다.
“레일라, 그 드레스는 뭐니? 왜 바르델 영애와 드레스가 같아?”
바르델 록펠. 갈색머리의 그녀는 시베르의 절친한 친구이자 오른팔이었다. 시베르가 뭘 시키든 다 하는 행동대장이기도 했고.
소네트와 팔짱을 낀 시베르가 충격 받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일라가 소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네트는 팔짱을 풀려 했다. 그러나 시베르가 옷깃을 잡아 그러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가 걸으면서 시베르의 손을 놓기 위해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것을 떼어내려 했다.
“레일라?”
그러자 시베르는 오히려 와락 그의 팔을 안으며 여전히 놀란 얼굴로 레일라를 다시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레일라 아비에르 영애? 왜 영애의 드레스가 저와 같은 거죠?”
그때, 바르델 록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레일라를 향했다. 그녀는 시베르의 근처에 서 있었다.
“설마 또 시베르 영애를 따라 하려던 건가요?”
“바르델…….”
시베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르델 록펠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해 봐요, 레일라 영애. 저는 이 드레스를 시베르 영애에게 선물 받아서 입고 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은 옷이라니. 또 시베르 영애가 이 드레스를 입을 줄 알고 따라 한 거죠?”
바르델 록펠의 소리치듯 내지른 말에 연주가 갑자기 멈추었다. 왜냐하면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둥글게 모이며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머리색을 보니 저쪽이 그 레일라 영애인가 봐요.”
“맞네요, 분홍 머리카락. 그런데 왜 바르델 백작 영애와 옷이…….”
“푸흡…….”
다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고 있었다.
레일라는 예전이라면 울며 뛰쳐 나갔겠지만, 지금은 그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레이니어가 골라준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의심했어야 했건만.
다만 그의 선택은 조금 잘못된 듯했다.
레일라는 문득 자신이 입은 드레스와 바르델 록펠의 드레스를 대조해 보았다.
레이스로 된 드레스는 무척이나 우아하면서도 가슴을 강조하는 도발적인 디자인이었다.
바르델은 단아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레일라에 비해 육감적인 느낌은 부족했다.
그 말인즉슨 레일라에겐 지금 입은 드레스가 퍽 잘 어울렸지만, 바르델에겐 마치 억지로 입은 듯 보였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시베르가 선물하지 않았으면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레일라 영애 옷 좀 봐요. 또 어느 사내를 유혹하려고.”
“헛소리가 심하시군요.”
누군가의 속삭임에 거칠게 대답한 것은 소네트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뿌리치듯 시베르의 팔을 풀려 했다. 그러나 그가 크게 뿌리쳤음에도 시베르가 아주 세게 매달려 그러질 못했다. 이 이상 세게 풀면 시베르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것 같았으니까.
“메르카스 영애는 언제나 입조심을 못 하는군요. 저번에도 그렇게 입을 놀리다가 자작께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런데 또…….”
소네트가 무언가 더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레일라,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내가 저번에 그 드레스를 고르는 걸 봤어? 그래서 일부러 그런 드레스를 맞춘 거니?”
“하, 세상에. 또 시베르 영애 걸 뺏으려고 그랬다니.”
바르델 록펠은 시베르의 말에 더 성을 내며 씩씩거렸다.
소네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있던 그는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레일라는 그가 저보다 연기의 고수라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에는 연민과 약간의 분노, 그러면서도 혼란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한편 레일라는 무표정했다. 그녀는 주위에 자신을 이미 비웃으며 저들끼리 말을 나누는 사람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은 히죽거리며 재밌는 볼거리를 즐기는 관객처럼 들떠 있었다.
“레일라, 너.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언니.”
“레일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자꾸 내 것을 탐내려는 건데. 이러면 바르델 영애에게 드레스를 선물한 내 입장은 뭐가 되니?”
레일라는 기가 막혔지만 입이 막히진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네가 입은 그 드레스. 그 드레스가 왜 내가 선물한 거랑 똑같아? 심지어 색상까지…… 어쩜 이렇게…… 정말…… 내가 입을 줄 알고 따라한 거 아니니?”
시베르가 충격 받은 사람처럼 말하며 입을 가렸다.
“또 레일라 영애가 언니 걸 탐냈나 봐요.”
“하긴 남자들만 탐낸 건 아닐 테니까요.”
“바르델 영애만 불쌍하네요.”
“시베르 영애도요. 좋은 마음으로 선물했을 텐데.”
시베르는 사교계를 들락이며 레일라에 대한 소문을 냈다. 시베르가 관심을 보이는 남자에게 레일라가 천박하게 달려든다고.
그러면 레일라가 먼저 그 사내들과 잘 지낸다. 그러다가 이내 사내들이 레일라에게 질려 본래 마음이 있던 시베르에게 돌아가면 처절하게 매달린다고.
모두가 그 소문을 믿진 않았다. 하지만 레일라가 시베르보다 약자였기에, 그들은 약자를 더 조롱하는 게 더 쉽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레일라가 저택에만 칩거하는 것도 그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며 떠들어 대곤 했었다.
그 소문의 실체를 더한 건 휴고였고.
“게다가 저 장신구를 보세요.”
“어머나! 대지의 심장!”
“불길해라.”
“저걸 모르고 걸치고 온 걸까요?”
“모르니까 하고 왔겠죠. 얼마나 무식했으면…….”
혀를 차는 소리가 레일라의 귀까지 들리고 있었다.
“다들 아무렇게나 입을 놀리시는군요.”
소네트가 경멸하듯 그렇게 말한 뒤 이내 시베르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소네트도 봤잖아.”
“뭘 말하는 겁니까.”
“나랑 레일라가 같은 의상실에 있던 걸.”
시베르의 말에 소네트는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말해 봐, 레일라. 정말 일.부.러. 내 드레스를 따라했니?”
시베르의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조롱조인 목소리에 레일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매번 내 걸 따라한 건 언니 아니야?”
레일라는 본래 연기하던 가련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왜 네 걸 따라하니? 너야말로 그동안 내 걸 다 따라했잖아.”
“언니, 내가 왜 언니 걸 따라하겠어? 이 드레스는…… 내게 더 잘 어울리는데.”
“뭐?”
레일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면서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바르델 록펠의 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히려 언니야말로 왜 바르델 영애에게 이렇게 안 어울리는 드레스를 선물했어?”
“뭐라고요?”
바르델 록펠이 경악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역시 시베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레일라.”
“응.”
“그럼 왜 내 장신구를 다 따라했니? 내가 오늘 루비로 장식하니까 너도 비슷한 장식을 쓴 거 아니야?”
공교롭게도 그랬다. 시베르는 검정 머리칼에 벽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어울리지도 않게 붉은 보석이라니.
다들 입을 막은 사람처럼 그저 재미있다는 듯 지켜만 볼 뿐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레일라가 드레스는 더 잘 어울렸지만, 루비로 된 장신구와 드레스는 정말로 시베르가 착용하는 줄 알고 따라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길함의 극치인 대지의 심장을 굳이, 오늘 같은 날 사용한다는 걸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기에.
다들 레일라가 훨씬 더 잘 어울리지만 그녀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루비보다는 사파이어가 더 잘 어울리잖아. 그러는 언니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색의 장신구라니.”
“레일라.”
레일라의 말에 관람하던 귀족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너야말로 날 따라하고 싶으니까 그런 저주받은 장신구를 달고 온 거 아니야? 네게 루비로 된 보석이 어딨니?”
“언니, 나한텐 이 보석들이 소중해. 그런데 저주라니, 정말 너무해.”
레일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시베르가 이겼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본 바르델 록펠이 입을 열었다.
“아마 싸구려 잡화점에서 샀겠죠. 누가 그런 저주받은 보석을 쓰려 할까. 아비에르 백작께서 영애에게 비싼 보석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이래서였겠죠. 보석 보는 눈도 없으면서 아무거나 하고 다니니까. 거기에 언니 걸 따라하기나 하고.”
“바르델 영애.”
“대지의 심장이 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 알아요? 예전에 그 귀걸이와 목걸이를 매일 착용하던 왕비가 나라를 멸망하게 한 뒤에 그 피가 뿌려져서예요. 땅에 묻힌 왕비의 심장처럼 불길하다고.”
“바르델 영애는 그런 미신을 믿어요?”
“미신이 아니랍니다.”
바르델 영애의 옆에서 시베르가 턱을 들며 레일라를 하대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승리에 취한 사람처럼 우쭐대고 있었다.
그녀의 소리 없이 벙긋대는 입 모양이 보였다.
‘넌 내게 안 돼.’
“그걸 바르델 영애가 어떻게 알아요?”
“레일라 영애. 방에만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나 봐요.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그냥 시베르 영애가 부러워서 드레스를 따라하려다가 이런 꼴이 된 걸 인정하시라고요.”
그 말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시베르와 친한 귀족 무리들이 키득키득거리며 말을 거들었다.
“어쩜. 언니가 부러웠나 봐요. 저주받은 보석인 것도 모르게 걸치고 나온 걸 보니.”
“저도 어릴 적엔 제 언니가 부러웠었죠. 그래도 전 선은 지켰는데.”
“레일라 영애는 저택 밖으로 잘 안 나와서 지켜야 할 선을 잘 모르시나 봐요.”
레일라는 이들이 좀 더 저를 모욕해 주길 바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이 보석들이 소중해요. 이걸 제게 주신 분에게도 그렇고요.”
“푸흡……. 누가 줬겠어요? 영애가 직접 싸구려 잡화점에서 샀겠죠.”
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영애가 그렇게 말하고는 시베르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잘했다는 듯 웃는 시베르의 눈빛에 갈색 머리의 영애가 영광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제가 한 장신구들이 싸구려란 말씀이세요?”
“싸구려라고는 안 했어요. 다만 싸구려들과도 안 바꿀 물건이라고는 생각해요.”
바르델 록펠도 턱을 치켜들고는 거만하게 말했다.
“푸흐…….”
“크흠.”
“어머나, 바르델 영애도 참, 그런 말을. 아무리 바른말이라도 조금만 착하게 해요. 레일라 영애가 또 울겠어요.”
“저런 말을 들어도 싸죠. 제가 바르델 영애였으면 뺨이라도 쳤을 거예요. 어디 뻔뻔하게 거짓말을…….”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며 깔깔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 장신구는 제가 보낸 건데요.”
이윽고 레일라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싸구려 물품과도 안 바꿀 물건이라.”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 말에 기분이 나빠진 듯 표정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기분이 더러운 듯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