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7화
레일라는 문득 아나시스 황태자가 화를 낼 때 이복 형인 레이니어와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웃지만 실상은 화가 난 게 분명한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 누구도 그가 기뻐서 웃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화를 참는 듯 보일 뿐이었지.
“제 어머니가 보낸 선물이 싸구려 잡화점에서 살 물건인가요, 바르델 록펠 자작 영애?”
“아……. 전하, 그…….”
“쓸데없는 말을 할 거면 입 다무세요, 영애. 아니면 쓸데있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
“아, 아닙……. 송구합니다.”
바르델이 고개를 숙이며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가 떨 때마다 작게 물결치고 있었다.
“레일라, 한참 찾았잖아요.”
아나시스 황태자가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어디 있다 왔습니까?”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테라스에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대는 오늘 제 어머니의 손님이니 가능한 옆에 있어 주시죠.”
“네.”
레일라는 자신을 아낀다는 듯 어깨를 감싸며 데리고 가려는 그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저를 위기로 모는 것부터 구해 주는 것까지 전부 라미엘라 황후의 소행인 것 같았다. 그리고 레이니어에 대해 아는 것까지.
이런 일을 꾸며서라도 충성심을 만들 생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설마 황가에서 고작 백작 영애 옷을 따라했을 리는 없을 테고.”
“맞네요.”
“대지의 심장이 황후 폐하께서 보낸 걸 줄이야. 이 정도면 바르델 영애는 황후 폐하께서 진노하셔도 할 말이 없겠네요.”
먹이가 레일라에게서 자작가의 딸인 바르델로 옮겨갔다. 아까까지 레일라의 귀에 들려오던 조롱 섞인 음침한 목소리가 바르델의 주위로 가득 찼다.
“아니야. 난 결백하다고.”
바르델이 억울하다는 듯 레일라를 노려보았다.
레일라는 그런 그녀의 눈을 피해 움츠러든 척하며 아나이스 황태자의 옷깃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에스코트하듯 팔을 건네며 팔짱을 끼게 했다.
“우린 저쪽으로 가죠. 레일라 영애.”
“네.”
몸이 조금 멀어져도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어머, 어떡해. 시베르 영애, 너무 불쌍하다.”
“그러게. 이런 우연이라니.”
“근데 저렇게 안 어울리는데 정말 우연일까?”
“얘, 그건 말이 심했다.”
“우연이라도 저렇게 안 어울리는 드레스를 선물해서 입게 한 거면, 절교하려고 보낸 거 아니야?”
“얘도 참.”
그러면서도 저들끼리 킥킥거리며 신이 나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들은 말을 거들기만 한 시베르는 비난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아비에르 백작가가 있었으니까.
다만 자작가 영애이고, 시베르의 수족이었던 바르델에게는 가혹하게 굴었다.
바르델이 시베르에게 도와달라는 듯 바라보았지만, 시베르는 싸늘한 표정으로 바르델을 무시하고는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황태자가 레일라를 이끌고 계단 옆에 섰다. 내부에 있는 계단 옆에 섰는데, 아무래도 곧 황제가 입장할 모양인 듯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레일라가 아나시스 황태자와 자리에 서자 곧 문이 열리고 나팔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입장하십니다!”
황제와 황후가 2층의 내부 테라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귀족들은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두 태양을 뵙습니다.”
일제히 외치고선 그렇게 기다렸다. 황제가 손짓할 때까지.
그러다가 황제가 축사 없이 그대로 내려오자 다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어딘지 심기가 몹시 불편한 사람처럼 인상을 쓰며 황후와 팔짱을 낀 채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제 자리에 삐딱하게 앉았다.
그러자 황후가 손짓했다. 적막을 바꾸기 위해서인지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황제는 그리 건강하지 않을 터였다. 원작에서 보았을 때 그랬다.
물론 지금 원작과 바뀐 게 많은 상황이라 뭐가 똑같고 뭐가 다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황제의 표정과 눈 밑에 보이는 새까만 자국을 보면 그리 건강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원작에선 얼마 뒤에 레이니어가 돌아온다.
황제는 레이니어가 나타나자 그를 황자로 인정한다. 그리고 아나시스의 치부를 드러내 황태자 자리에서 박탈시켰다.
그런 뒤엔 레이니어를 황태자로 올리고 모든 정무를 맡긴다.
그렇다면 황제는 정말로 오늘내일하는 상태일 것이다.
자신처럼.
레일라는 같은 병자라고 생각하니 황제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사랑하던 황후는 누명을 써 죽었고, 그 황후를 죽인 사람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아 살았으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별말을요.”
아나시스와 눈이 마주치자 레일라가 수줍은 척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감동 받은 사람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앞으로 정말 황후 폐하를 위해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요.”
그가 만족스럽게 웃자 레일라는 눈시울을 더 촉촉하게 적시며 말했다.
“네, 꼭 그럴게요.”
레일라는 점점 연기가 느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