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8화
“제 말이 틀렸나요? 아이히만 남작만 그런 줄 알아요? 데르온 영식도 그랬어요. 영애가 얼마나 쉬운지 티파티에서 다 털어놨다고요!”
“증거도 없는 그런 말을 믿어요?”
“휴고도 있어요! 휴고 영식을 불러와서 말하게 할 수도 있어요!”
레일라는 휴고가 무조건 시베르의 편을 들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시베르의 측근인 바르델 록펠이 하는 말이라면 그는 무조건 그녀의 편을 들 테니까.
“제가 왜 그런 근거 없는 모욕을 들어야 합니까?”
“모욕이라뇨? 영애가 한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해요!”
레일라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소네트가 소리쳤다.
“그만!”
소네트가 화난 사람처럼 소리치자 레일라도 시베르도 놀랐다.
“그만 하시죠.”
그가 이내 레일라를 바라보았는데, 어딘지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일라는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다 연기일 뿐일 텐데.
휴고와 친구인 그는 정말로 제 목숨을 노리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 수 있지?
그녀는 생각보다 가증스러운 그가 쉽지 않은 상대인 걸 깨달아 긴장했다.
“가죠, 레일라.”
“네? 하지만 저, 가면무도회에 가야하는데…….”
“소네트 영식! 시베르 영애가 저를 부탁한다고 했잖아요!”
소네트가 레일라의 손을 잡고선 가려 하자 바르델이 그의 손을 잡았다. 기차놀이를 하듯 팽팽하게 당겨진 팔에 놀란 그는 레일라의 손을 놓아버렸다.
지난번에 이렇게 세게 당겼을 때 휴고 때문에 그녀가 피를 토했던 것이 떠올라서.
“아…….”
레일라가 바닥으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미안, 레일라. 네가 다칠까 봐…….”
“아냐. 바르델 영애를 저택으로 데려다줘.”
“하지만…….”
“난 오늘 황후 폐하의 손님으로 온 거라서 지금은 못 가.”
레일라가 그의 눈을 보지 않고 대답하려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싸늘해지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흐윽……. 레일라 영애 정말 못됐어요. 천박하고 징그러워요!”
잘 보니 바르델은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레일라는 취객이랑 싸우고 싶지 않았다.
“부탁할게, 소네트.”
“……그래.”
그가 한숨을 쉬고선 바르델 록펠을 데리고 갔다.
레일라는 그제야 제게 눈치를 주는 시녀와 함께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궁으로 향했다.
이 무도회는 실상 그리 큰 의미가 있어 여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에서는 매달 무도회를 열었고, 그것은 무도회를 주관하는 황후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자선을 위한 무도회라고 명목은 화려했지만, 실상은 젊은 귀족 남녀들이 귀족파인 황후의 세력으로 붙을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재미있는 흥미 거리에 불과했다.
개탄스럽게도 이 가면무도회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뭣보다 황태자인 아나시스는 아직 약혼녀가 없었다. 그 빈 자리는 권세가에 딸을 둔 집안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자리였다.
게다가 황후가 주관하는 가면무도회에 아나시스 황태자가 나타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실상 이 안은 귀족파의 일원들과 황태자비 자리를, 아니면 후궁의 자리라도 노리는 여인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인들이 많은 곳에 몰리는 사냥개 같은 사내들이었고.
“하.”
레일라는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나가고 싶어졌다.
본래 초대받아 간 연회장은 샹들리에 불빛도 화려하고 환했건만, 지금 온 곳은 불빛도 암적색에 참석자들이 모두 가면까지 써서인지 어딘가 수상쩍어 보였다.
레일라는 이곳과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영애가 안에서 기다리면 전하께서 데리러오시기로 했습니다.”
“알겠어요.”
레일라는 차라리 피를 토하는 척하며 저택으로 돌아갈까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 뱀 같은 황후가 저를 의심해 제거하려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레일라는 어쩐지 제 처지가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까 언니한테 화내면 안 됐다.
더 참았다가 기회를 봤어야 했는데.
생전 처음 듣는 모욕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레일라는 그렇게 자책하며 사람들이 몰리지 않은 빈 소파로 가서 앉았다. 소파에 앉아서 내부를 둘러보니 역시 황궁답게 아주 화려했다.
샹들리에가 천장에 높게 달린 아까의 연회장과는 달리 이곳은 샹들리에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크고 천장이 낮았다. 붉은 빛이 반사되어서 그런지 요사스러운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꽃은 전부 장미였다. 그래서인지 들어올 때부터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장미향이 여기저기 그득했다.
레일라는 어쩐지 이곳에 있다가 나가면 이 장미향 때문이라도 사람들이 자신이 이곳에 왔다간 사실을 알아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머리색 때문인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본 사람은.
“너는 가면을 써도 티가 나네.”
“저리 가, 휴고.”
“내가 왜?”
휴고는 다른 파트너와 온 것 같았는데 지금은 혼자였다. 애초에 이런 파티엔 파트너 없이 노는 경우가 드물었다.
휴고가 옆에 앉았다. 그러자 소파가 기우뚱하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레일라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실상은 그가 싫어서 그런 작은 움직임조차 싫은 것이었지만.
“너, 술 마셨니?”
“어.”
“얼마나 마셨길래 냄새가 이렇게 심해? 저리 가. 정말 싫다.”
휴고는 마치 술통에 한번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아주 심각하게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레일라는 마치 마개 열린 럼주병에 코를 들이민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냄새 때문에 취할 것 같았다.
“야.”
“가라니까?”
“너 진짜 앙탈 그만 부려.”
“내가 너한테 하는 건 앙탈이 아니라 거부란다. 거부 몰라?”
“내가 잘못했어.”
“……지참금은 언니 거 빌리기로 했잖아.”
레일라는 뜬금없이 사과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휴고가 이상한 표정으로 웃더니 반밖에 없는 가면을 매만지다가 손짓했다. 근처를 지나던 사용인이 그에게 럼주가 든 잔을 주고선 이내 물러났다.
“하.”
휴고는 그것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잔을 ‘탕!’ 내려두었다.
“야, 내가 시베르와 키스했거든?”
“어, 그래. 안 궁금하니까 이제 사라져 줄래?”
“근데 X발. 아무런 느낌이 안 나.”
“어쩌라고?”
“너 때문에 시베르랑 키스하는 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
“안 궁금해.”
레일라는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다시 앉게 했다.
“궁금한 거 다 알아.”
“내가 미쳤니? 그런 게 궁금하게.”
“시베르랑 몇 번 키스했나 보자. 어제 열 번? 인가 했던 거 같은데.”
“미친. 그만해.”
레일라가 진심으로 경멸하며 그의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자 휴고는 더욱 세게 그녀의 팔목을 쥐며 끌어당겼다.
“근데 한 번도 기쁘질 않더라.”
“날 버리고 떠난 건 너야. 넌 그때 모든 기회를 잃은 거고.”
“그럼 기회를 다시 줘. 너랑은 이렇게…….”
레일라는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에 술 냄새가 더 심하게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손만 잡아도 좋네.”
“난 불쾌하거든? 좀 놓을래?”
“키스할까?”
“미쳤어? 놔!”
레일라가 주위에 도와달라는 듯 시선을 두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제각기 대화하느라 바빴고,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 그리고 그녀들과 대화하는 영식들은 구석 소파에 앉은 레일라와 휴고에겐 관심 없는 듯 보였다.
“야.”
“놓으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다시 받아줄 건데? 너도 나 좋아하잖아. 지금은 화나서 그러는 거 다 알아.”
레일라가 가까스로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를 택한 순간부터 너에겐 어떤 기회도 없어.”
“시베르 때문이야? 그래, 알겠어.”
휴고의 목소리가 예전에 교제했을 때처럼 나긋하게 변했다. 그 순간 레일라는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레일라, 네가 뭘 바라는지 알겠어.”
“내가 바라는 건 네가 내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거야.”
“시베르 때문인 거지?”
“내 말을 전혀 안 들으면서 뭘 알겠다는 거야?”
“네가 스스로 나한테 키스하게 될 거야, 레일라.”
“미쳤어, 넌.”
레일라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아예 그 자리에서 벗어나 멀리 가 버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문득 뒤돌아봤는데, 휴고가 혼자만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레일라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일부러 인파 사이를 지나갔다. 그가 더는 저를 보지 못하도록.
“저, 영애.”
“네?”
그러다 누군가 레일라를 부르며 손목을 잡았다.
상대는 남자였다. 키는 휴고 정도 되고 머리카락은 가발 같았다. 구레나룻의 색과 윗머리의 색이 달랐으니까.
“분홍 머리는 처음 봅니다. 가발인가요?”
“네.”
레일라는 애써 그렇게 말했다. 분홍 머리카락이 흔치 않으니 차라리 가발이라고 하는 게 나았다.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네요. 혹시 저랑 저쪽에서 대화라도 할까요?”
“아뇨,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레일라는 제 손목을 잡은 사내도 취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수도에 있었던가요? 혹시 타국에서 왔습니까?”
“아뇨, 저는…….”
“일부러 이런 드레스를 입었나요?”
레일라는 순간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 끝까지 천을 댄 디자인으로 입을 걸, 하고.
“좀 친해집시다. 저쪽 가서 서로 가면이라도 벗어 봐요. 저는 영애의 얼굴이 정말 궁금하거든요.”
“아뇨, 전 그리 안 궁금한데 놓으시죠.”
“그러지 말고 저랑 대화를 좀…….”
“일행 있다고 들었잖아.”
레일라를 끌고 가려던 남자를 막은 사람은.
“레인?”
“왜 또 이렇게 시끄러운가 했더니 또 우시는 겁니까?”
“아니, 저는…….”
“놔.”
레이니어의 경고에 레일라를 잡은 사내가 손을 놓았다. 레이니어의 새빨간 눈동자와 고압적인 태도, 그리고 낮은 목소리와 큰 키 때문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이대로 몸싸움으로 번지면 다칠 것 같은 위협까지 느껴졌다.
“일행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는 레이니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악어의 입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 것처럼 두려워졌다.
“알았으면 사라져.”
“……예.”
남자가 도망치자 레이니어는 한숨을 쉬며 레일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어딘가로 이끌고 있었다.
“어디 가요?”
“아주 중요한 곳이요.”
레일라는 레이니어가 제 손을 깍지 껴 잡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