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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9)화 (29/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29화

레일라는 아나시스 황태자가 저를 안에서 기다리라고 한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저를 여기에 보내 놓고도 오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이곳까지 오는 데만 1시간은 넘게 걸렸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역시 자신은 레이니어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니어는 왜 자신을 만나러 왔을까?

그가 새어머니와의 모종의 관련이 있는 건 분명했다. 제게 이중첩자가 되겠다고 한 말도 그렇고.

게다가 레이라 자신 역시 레이니어에게 잘 보여서 그가 자발적으로 피를 줄 만큼은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은 어떤 이득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제 쪽에서 잘 보여야 할 사람이었지.

자신은 그리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닐 텐데.

“왜 또 우십니까. 안전한 곳으로 가려는 건데.”

그가 뒤를 돌아보자 레일라가 놀라서 말했다.

“안 울었어요.”

“네.”

그가 한숨을 쉬다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레일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아가씨는 어떤 차림이어도 예쁩니다. 여기 있는 어떤 영애도 아가씨만큼 화려한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분은 없을 겁니다.”

“갑자기요?”

“그거 때문 아닌가요?”

“아닌데…….”

레일라는 그가 준 옷을 입었다. 입었던 사람의 키가 너무 커서 어깨에 걸쳐진 외투가 발목에 닿을 정도였다.

“그럼 뭐 때문이죠?”

“안 알려 줄 건데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에게 가자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레일라의 푸른 눈을 다시금 보았다. 그리고 눈가를 엄지로 쓸어 보다가 말했다.

“갑시다.”

“……그래요. 근데 저 금방 돌아가야 해요.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녀의 말에 레이니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손을 잡고 싶은데요.”

“그래요.”

레일라는 그가 잡아도 된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장갑을 벗어 제 주머니에 넣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죠.”

그렇게 레이니어를 따라 레일라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황궁 근위병들 근처를 지나갈 때, 레일라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옆을 지나가도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턱을 꼿꼿하게 들고 있었다. 보통은 귀족이 지나가면 예의상이라도 시선을 내리는 게 정상인데.

레일라가 그들을 돌아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을 때, 그녀를 돌아보는 레이니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가면을 벗어 베스트의 앞주머니에 꽂더니 레일라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들어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레일라는 이 이상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근위병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같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렇게 그들은 한참을 걸어 외진 궁으로 들어왔다. 그 궁은 낡고 초라해서인지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는 황실의 자식이 많았던 때엔 계승 서열이 낮은 황자나 황녀가 살았을 수도 있을 법한 외관이었다.

안에 있는 물품들은 겉으로는 고급이었지만 다 낡아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어쩌면 본래는 누군가 사용했다가 이리로 보낸 것 같기도 했다. 모양으로만 본다면 예뻤으나 낡은 것뿐이니까.

레이니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새빨간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레일라는 자신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아무 경계 없이 따라온 걸까 싶어 긴장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이제 말해도 돼요?”

“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낡은 궁 안으로 들어오자 레이니어는 문을 닫았고.

“앞으로 1시간 동안은 밖으로 나가지 마시죠.”

“왜요?”

문을 가로막고 있는 레이니어가 레일라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의 휴고가 제게 화를 냈을 때나 제 의견을 마구잡이로 들이밀 때 그런 식으로 나갈 수 없게 하곤 했으니까.

‘넌 그냥 괜찮다고 하면 돼! 왜 매번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해?’

어쩐지 휴고의 목소리가 또 들리는 것 같아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강요는…… 아닙니다. 부탁입니다, 아가씨.”

그걸 눈치챘는지 그가 곧장 문에서 멀어지며 레일라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레일라는 그가 갑자기 제 뒤로 걸어와 더 놀랐는데 그 바람에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이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레이니어가 잡았다.

“그럼 왜 여기 있으라는 거죠? 여긴 불도 안 켜져 있고…… 어두운데.”

“숨어 있어야 해서요.”

“레인.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불법침입이라 숨는 거죠?”

“제가 숨는 게 아니라 아가씨가 숨으셔야 합니다.”

“왜요?”

레이니어가 그녀의 가면을 다시 씌워 주려다가 눈이 마주쳐서 그러질 못했다. 그녀는 그가 들고 있던 가면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를 마주했다.

“사정은 말할 수 없지만 가면무도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게 어떤 일이죠?”

“아가씨는 납치당하실 겁니다. 그리고 미끼로 이용되겠죠.”

“그게 무슨…….”

레이니어는 사실대로 말하는 것 같았다. 레일라의 눈에도 그가 진지하게 보였으니까. 왠지 아무 말이나 할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진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아는 원작이 너무도 많이 바뀌었는데 그의 본 모습도 변하지 않았을지는 알 수 없다. 아니, 그는 애초부터 시베르 한정 다정남일 뿐이지, 본래는 그리 다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신하들은 그가 황제가 된 후로 두려워했다. 그는 치국은 잘했어도 성정은 냉정하다 못해 비정했다.

그런 사람이 제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리 없었다.

“이중첩자라고 했잖습니까.”

“새어머니가 시킨 건가요?”

“아뇨. 이건……. 황후 폐하의 단독 소행입니다.”

“저를 이용해서 누굴 불러내려는 건데요?”

“저도 모, 모르…… 말 안 할래요. 거짓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레이니어가 눈꼬리를 내리고는 말하지 않았다.

황후가 떠보던 태도.

아무리 봐도 정체를 숨길 생각 없는 듯 보이는 차림.

레일라는 미끼였다. 그렇다면 레이니어의 말이 맞을 확률은 몹시 높았다.

그렇다면 왜? 저 같은 걸 납치해서 데리고 있는다고 해도 레이니어가 올 리가 없는데.

하지만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지?

그녀는 이 모든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답답했다.

“또 우시네요.”

“아니, 저는…….”

“저 위층엔 꽤 재밌는 도구들도 있습니다. 보러 가실래요?”

“지금 그런 걸 보러 갈 때가…….”

“보러 가면 기분이 나아지시겠죠. 아가씨 기분이 나아진다면 저는 뭘 물어도 딱 한 가지는 제대로 대답하겠습니다.”

레일라는 그가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먼지가 쌓인 계단을 오르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처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 긴장했다가 무슨 말을 해 풀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쩐지 몸이 정말 많이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그리 숨이 차지 않았다.

“레인이 주는 약은 정말 효과가 좋은 거 같아요.”

“제가 유능해서요.”

그녀가 계단을 오르며 감탄처럼 말하자 그가 웃었다. 레일라는 문득 그가 이번엔 진짜로 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기분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말하기 곤란한 거라 에둘러 말하려고 그런 거죠?”

“아뇨. 저는 아가씨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왜요?”

“제겐 중요해요. 무엇보다도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다가 옆으로 와서 나란히 걸었다. 레일라는 계속 그에 대한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자 그는 익숙하게도 방을 안내했다.

레일라는 자신들이 지금 있는 이 허름한 별궁이 생각보다 넓다는 걸 깨달았다.

2층 복도의 바닥은 깨진 대리석이었다. 그래서 구두를 신고 걸으니 또각또각 소리가 나고 있었다. 거기의 그의 묵직한 발소리까지.

그렇게 2층의 어느 방에 도착해 문을 열자.

“여기는…….”

레일라는 작게 당황했다.

그곳은 마치 어린아이의 방처럼 보였다. 위에는 설치된 모빌에는 색 바랜 인형들이 매달려 있었다.

침대도 하나 보였다. 다만 침대는 시트까지 아주 오래된 건지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침대 근처로는 가지 마세요. 먼지가 많습니다. 아가씨께 좋지 않을 거라서요.”

“네.”

레일라는 그가 말한 대로 침대 근처로 가지 않았다.

그녀가 침대 위에 달린 모빌을 보는 동안 그녀의 손을 살며시 놓은 레이니어는 방 한쪽으로 향했다. 책꽂이에도 낡은 책들이 거미줄에 싸인 채 꽂혀 있었다.

레일라는 어쩐지 이 방을 알 것 같았다.

원작에 나오던 곳이었으니까.

‘달각’ 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레일라를 향해 걸어왔다.

“제가 아가씨 어깨를 좀 잡겠습니다.”

“네.”

“그리고 좀 움직일게요.”

“그래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저도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레일라의 어깨를 양손으로 살며시 잡고선 천천히, 그리고 정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느 장소 위로 그녀를 세워 두려는 것처럼.

그 순간.

“어?”

레일라의 주위로 반투명한 나비들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뭐죠?”

레일라는 들뜬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레이니어는 깨달았다.

이렇게.

가깝게 잡고 있었을 줄은.

그녀를 옮기는 중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레인?”

레이니어는 그녀와 딱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거리를 둔 채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는 제 손이 떨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웃는 듯한 파란 눈이 보여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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