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30화
“레인?”
레이니어는 시간이 지나 그녀의 눈에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하자 곧장 어깨를 잡았던 손을 뗐다.
“나비를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요.”
“아, 네. 좋아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그녀에게서 물러나며 제 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비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이 묘하게 다른 의미처럼 받아들여져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예쁘네요, 정말.”
레일라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제 주위를 날아다니는 반투명한 나비들을 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진짜 나비처럼 날면서도 생긴 것은 진짜 나비 같지는 않았다. 나비라고 하기엔 몸통이 없었고 날개만이 팔랑팔랑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치 꽃이 겹쳐져 나비처럼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비의 날개는 흰색이었는데 오로라 색으로 빛이 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나비가 실존하지 않으니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신기해서 손끝으로 그것을 톡 건드리면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 그녀의 손길에 반응해 바르르 떨다가 이내 날아들곤 했다.
“이건 뭐예요?”
“웨스턴 드보르국에서 보낸 선물입니다.”
“아.”
레일라는 웨스턴 드보르가 레이니어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의 고향이란 걸 상기했다.
“제가 예전에 여기 살았거든요.”
“네?”
“저는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레일라.”
아가씨에서 바뀐 호칭에 레일라가 놀라서 나비가 아닌 레이니어를 보았다.
“레이니어는 황족인가요?”
레일라의 말에 그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여유로운 웃음을 애써 되찾은 뒤 말했다.
“아까 딱 한 가지 무슨 질문이든 대답해 드리기로 했죠. 그게 이 질문입니까?”
“……네.”
레일라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가 멀어졌던 만큼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일라는 높은 구두를 신고 있음에도 그와 키 차이가 많이 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그가 정말 크다는 걸 상기하고 있었다.
“네, 저는 황족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레이니어 이그나시오 지크문드입니다.”
그가 이렇게 모든 걸 쉽게 말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문이 막힌 그녀는 그렇게 가만히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커다래진 눈동자를 보던 그는 그녀의 눈에 비치는 감정이 부정적이지 않은 걸 깨달으며 안도했다.
“그런 걸 말해도 돼요?”
“이중 첩자라니까요.”
레일라가 눈을 깜빡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못 믿겠는데요.”
“예?”
그러자 레이니어가 당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때 그녀에게서 설마 못 믿겠다는 반응이 나올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왜죠?”
“이미 죽은 황자가 자기라고 하면 누가 믿어요? 그리고 어느 황자가 의사를 해요? 저라면 차라리 황자로 돌아가서 황궁에서 편하게 살 것 같은데요.”
“하하.”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은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정말 실소에 가까웠다.
“죽은 황자의 등에는 화상 자국이 있죠.”
“아, 그렇죠.”
레일라는 원작에서 본 그의 화상 자국에 대한 묘사를 떠올렸다. 그 자국 덕분에 황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 어렵지 않았다.
“보여 드리죠.”
“그래요.”
레일라의 말에 그는 베스트의 단추를 빠르게 풀었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풀려다가 멈추었다.
“제가 만약 죽은 그 레이니어 황자가 맞다면 어쩌실 겁니까?”
“맞으면 할 말이 있어요.”
“그게 뭐죠?”
“사실 황후 폐하께서 당신과 가깝게 지내라고 했거든요.”
사실 레일라는 그가 원작의 남자 주인공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의 편인 척 호감을 사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만 레이니어는 그것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에 비친 호의적인 감정과 태도를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할 말이라는 게…….”
“주의를 해 주려는 거죠.”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제 셔츠를 벗으려던 손에 힘을 줘 옷을 구겨 버렸다.
“안 보여 주시나요?”
레이니어가 굳어진 채 저를 빤히 바라보니 레일라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나오는 상태처럼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 있었다.
이윽고 셔츠를 다 풀자 그의 탄탄한 흉부가 보였다. 레일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를 보고 있었다.
셔츠를 다 벗은 레이니어가 등을 보였다.
“어머나.”
레일라는 그의 등 위로 크게 남은 화상 자국을 눈에 담았다.
날개뼈를 덮고 있는 그 화상 자국은 나비의 날개같이 생겼다. 마치 일부러 만든 것처럼.
“이거 혹시 일부러 만든 건가요?”
“저를 죽이려던 사람이 만든 거죠.”
레일라는 그에게 생긴 화상 자국은 현 황후가 그를 죽이기 위해 보낸 자객이 만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본래는 그를 괴롭히다가 죽게 할 생각으로 찍은 낙인이었다. 다만 이 자국이 막 생겼을 때는 죽지 않았다.
이후로도 암살 시도는 여러 번 있었으니까.
덕분에 그를 죽은 사람으로 위장할 때 구했던 시체에는 같은 문양을 새겨두기도 했었다.
“아팠겠네요.”
“징그러우십니까?”
“아뇨.”
“그럼 만져 보시죠.”
레일라는 굳이 만져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왜 그런 걸 시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체까지 밝힌 걸 보면 거절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게는 친절하고 뭣보다 도와주려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똑같이 우호적으로 굴어야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제게 이렇게 목적 없이 호의적으로 대해준 사람이 없었던 레일라는 그가 정말로 어떤 목적도 없는 건지 계속 의심이 들었다.
“징그럽지 않아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끝으로 그의 화상 자국을 만져보았다.
“근데 참.”
“…….”
“등이 너무 딱딱한데요.”
“크흡…….”
그녀의 실없는 말에 그가 웃었다. 그는 기분 좋은 듯 웃다가 그녀가 손을 떼자 옷을 입었다.
“혹시 레인이라는 이름도 본래 이름에서 딴 건가요?”
“예.”
“너무 대충 지었는데요. 누가 의심하면 어떡하려고요?”
“오히려 비슷해서 모를 줄 알았죠.”
레이니어가 단추를 잠그며 그녀를 보았다. 레일라는 어딘지 모르게 침착해 보였기에,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오히려 옷을 벗었다가 입은 당사자가 뺨이 화끈거렸건만 그녀는 그리 당황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그녀의 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저를 믿어 주시는 건가요?”
“네.”
레이니어는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건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안도감일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편안한 감정인 듯했다.
“황후 폐하가 누구를 불러들이려고 그런지 알 것 같네요.”
“네. 아마도 저를 의심하고 있는 듯합니다.”
“확신은 아닌 건가요?”
“확신은 아닙니다. 확신이었다면 아가씨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객을 보내 저를 죽이려 했겠죠.”
그의 담담한 말에 레일라는 그가 걱정되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럼 저도 아가씨를 돕겠습니다.”
레일라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의 피가 필요했으니까.
“좋아요. 그럼 우리 협력하죠.”
레일라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레이니어가 잡아끌었다. 그리고.
“앗…….”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아, 네…….”
레일라는 악수 대신 손등에 입을 맞춘 그의 행동에 놀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가까이서 보니 더 비현실적인 미모였다.
그렇게 그들은 한 시간이 아닌,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낡은 궁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