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34화
“아, 미안해요. 미끄러져서…….”
본래의 계획이라면 레이니어의 손을 밀어서 티스푼은 물론, 다른 손에 있던 약이 든 찻잔까지 떨어뜨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팔이 엇갈린 바람에 그녀는 그의 가슴팍으로 미끄러졌을 뿐,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천천히 떨어지며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약, 드시죠.”
“알겠어요.”
레일라는 화가 난 것처럼 몹시 붉고 인상을 찌푸린 그의 얼굴을 보자 장난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인이 처방하는 약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던데요. 혹시 뭐가 들었나요?”
“약.”
“알겠어요. 먹을게요.”
그가 인상을 더 깊게 찌푸리며 약을 건넸다. 그리고 눈을 피했는데, 그녀는 그가 원작처럼 누군가에게 닿는 걸 싫어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원작의 그는 꽤 까다로운 사람인지라, 여주인공인 시베르를 제외하고는 누가 닿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반응을 납득하고는 찻잔을 받았다. 그리고 정말 먹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가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로 붉었고, 그의 표정은 마치 분노를 참듯 미간이 좁고 눈꼬리는 치켜올라가 있었다. 거기에 새빨간 눈동자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눈을 볼 때마다 제 생각을 읽히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그리고 어차피 인어의 눈물엔 중독될 대로 중독된 상태였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정도로.
운 좋게 황족이 자발적으로 준 피만 얻는다면 다시 건강해질 것이고.
게다가 요새는 저가 쓸모 있다고 생각해 약을 중화시켜주는 건 아닐까 싶던 차였으니. 어쩌면 이번 약은 꽤 좋은 걸지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왜 안 드십니까?”
“레인이 너무 잘생겨서요. 눈을 볼 때마다 약 먹어야 하는 걸 잊었어요.”
그녀가 그렇게 변명하며 빙긋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았기에, 더는 그의 화를 돋우면 안 된다고 생각해 약을 들이켰다.
그녀가 약을 전부 마시고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렸다.
약을 모두 마시자 레이니어의 표정은 다시 온화하게 바뀌어 있었다. 언제 화가 났던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게 거짓 미소를 띠고 있었으니까.
“오늘 광장으로 갈 거죠?”
“네.”
레일라는 그가 제 제의를 거절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서 계획은 있나요?”
“만들어야겠죠.”
레일라는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를 죽이기 위해 이런 계획을 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를 광장으로 불러낸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광장은 밤이 되더라도 사람이 많은 곳이니까.
“제가 보기엔 제 능력을 시험하려고 레인을 불러낸 거 같거든요?”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그럼 나가지 않는 건 어때요?”
그녀는 아까라면 아나시스 황태자의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레이니어의 일이니까 정보만 전달하고 저는 이득만 취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에게 자신이 쓸모 있다는 걸 입증하려면 그것보단 더 나은 방법이 있을 듯했다.
“그럼 아가씨께 위험할 텐데요.”
“안 위험하게 하면 되죠. 레인은 제가 위험하면 나타날 건가요?”
그러자 그가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 안 해도 알겠네요. 그러니까, 서로 좋게 가자는 거죠. 제가 미끼가 될 수 없다는 걸 저쪽에서도 알아야 하고, 거기에 쓸모는 있는 사람이란 걸 입증해야 하는 거니까요.”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요.”
레이니어가 웃으며 말했는데, 그녀는 그가 여전히 여우처럼 웃으면서도 진심으로 웃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평소의 거짓 웃음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해 다행인 것 같았다.
“제가 몇 번 실패하는 걸로 하죠.”
“그럼 아나시스가 아가씨를 괴롭힐 겁니다.”
“단번에 성공하는 것보단 여러 번 실패하고 겨우 해낸 걸로 해야죠.”
레일라는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자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아무래도 그는 눈을 피할 때마다 의심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기에.
“그래야 저도 레인을 불러내는 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겠죠.”
“그렇군요.”
“네, 그리고 어쨌든 불러는 냈으니까 능력 면에서는 인정도 받고요.”
그녀가 눈을 안 피하자 이번엔 그가 피했다. 그녀는 그가 또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자 안도했다. 믿어 주는 것 같기도 해서.
“그래요. 아가씨 뜻대로 하죠.”
그렇게 레이니어는 그녀의 말대로 광장으로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