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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37)화 (37/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37화

“아……!”

“누구…….”

아나시스 황태자가 돌아보려 하자 레일라가 당황해 그대로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나는 추진력만 있고, 몸에 힘은 하나도 없어 그대로 아나시스 황태자의 머리통을 감싼 채 기대고 말았다.

“뭐 하는 거지, 영애?”

“저, 전하께서 너무……. 콜, 록……! 윽……!”

레일라는 변명하려 했으나 목이 너무 아파서 말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레일라를 부르는 레이니어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레일라를 떼어놓으려 했다.

“놓지. 무거운데.”

“저, 전하…… 께서…… 너무 잘생기셔서요.”

“……뭐?”

레일라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레이니어에게 빨리 나가라고 눈짓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는데,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 저렇게 태연하게 있는 건지.

정말로 정신을 잃을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전, 하께서는……. 윽……. 제가 어릴 적부터 꿈……. 커윽…….”

“…….”

“꾸던 이상형인…… 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오기 시작하자 더는 말도 나오질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에 고인 눈물도 닦지 못했다.

닦으려면 팔을 풀어야 했는데, 아나시스 황태자를 안은 팔을 풀면 그가 뒤에 있던 레이니어를 볼 것이고. 그럼 자신이 레이니어에게서 얻을 피는 이 자리에서 전부 밖으로 흘러나오겠지.

아, 왜 자발적으로 주는 피여야 하는 걸까. 그냥 강탈해도 되는 걸로 하지.

그녀는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영애는 보는 눈이 있는 편이군.”

“윽……. 네…….”

레일라가 레이니어에게 사라지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러나 레이니어는 다 쓰러져 가면서도 아나시스 황태자를 끌어안고 있는 레일라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팔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더 꽉 아나시스의 머리를 안고 있었다.

레일라는 간신히 목을 가다듬으며 큼큼거렸다.

“레일라.”

“예, 전하.”

겨우 목소리를 되찾은 레일라는 레이니어가 사라지지 않아서인지 제 가슴팍에서 들려오는 아나시스 황태자의 목소리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이 모든 건 살기 위해서였다.

“혹시 브루스 후작부인이 아니라, 황비가 되고 싶진 않나?”

“네?”

아나시스 황태자는 일전에도 이런 식으로 영애들에게 헛바람을 넣어 이용했었다. 그가 약혼자가 없던 이유는 그의 약혼자 자리에 누구라도 설 수 있다는 여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 헛된 희망을 이용해 제 입지를 견고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니까.

물론 실상은 황후의 권력이 워낙 대단해 그 어떤 영애를 아내로 맞이해도 황후와 견주지 못했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그 황제는 지금 노환이 들었고. 아나시스 황태자는 제 어머니의 입맛에 맞는 대신들의 딸들과 가깝게 지내며 재고 따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얻어 보려던 여인들은 많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갑자기 애정행각을 보이는 레일라에게도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내가 나중에 황제가 되면, 영애를 꼭 황비로 맞도록 하지.”

하지만 백작가의 영애가 황후가 되는 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아나시스 황태자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사실 황비 또한 대단한 것이다. 황후에 견줄 수 있는 자리이니까.

아이만 낳는다면.

“아니, 저는…….”

레일라는 그 말에 레이니어가 있던 곳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라?”

그녀는 팔을 놓고는 방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마치 무언가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방 안엔 둘만이 있었다.

“아……. 몰라.”

한계였다. 레일라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고, 그렇게 기절했다. 안 그래도 아픈데 없던 체력까지 끌어다 썼기에.

“레일라?”

“…….”

“고백이 그렇게 좋았나? 기절할 만큼?”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녀를 비웃으며 침대에 바로 눕혀 두었다.

“브루스 후작부인이 되고 싶다던 건 역시 거짓말인가 보군.”

그는 문득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운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분홍색 머리카락은 색이 밝았지만, 그녀의 피부색을 어둡게 보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도 이렇게 밝은 분홍빛 머리카락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거기에 지금은 감겨 있어 보이지 않지만 아파서 물기 어린 푸른 눈은 꽤나…….

“미인이긴 하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황궁에도 미인은 많았다. 레일라 정도 되는 미인은 없었지만.

그는 그녀가 제 언니보다 자신이 낫다는 걸 인증하기 위해 이런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건, 그는 그녀를 어떻게 이용하든 레이니어만 죽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물론 방을 나올 즈음엔 어차피 오래 못 살 거, 정말로 황비로 맞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든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아이도 못 낳을 만큼 약한 여자였으니까 데리고 놀다 버리기엔 안성맞춤이기도 했고.

“그래, 그렇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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