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41화
“마셔, 레일라.”
시베르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커다란 컵에 호박색의 럼주를 가득 따라 주었다.
“그렇게 많으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렇지, 레일라?”
“아, 응.”
아무래도 시베르는 레일라에게 술을 많이 먹여 재우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텀블러 정도 되는 크기의 잔에 가득 따라진 럼주를 보며 기분이 묘했다.
대답은 했지만 정말 이걸 다 마셔도 될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컵의 크기가 꽤 커서, 이럴 거면 럼주를 병째 마시라고 하지 그러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일에는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대신 마실까?”
“아냐, 소네트. 고마워.”
소네트의 말에 레일라가 빙긋 웃으며 시베르가 건넨 잔을 받았다.
“언니랑 이렇게 게임 하니까 예전 생각나고 좋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거짓말을 했다. 소네트가 시베르를 좋게 봐야 하니까.
“나도 그래, 레일라.”
시베르가 착한 척하며 그렇게 말하자 레일라는 술도 아직 안 마셨는데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애써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받은 술을 들이켰다.
오히려 한 번에 쭉 마시려고 하자 마실 수 있었다. 벌컥벌컥 마셨는데 어찌나 잘 넘어가는지 마치 오묘한 맛의 물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레일라는 자신이 술을 이렇게 좋아한다는 걸 이번이 두 번째 느끼는 거라 그런지 익숙하게 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건강했다면, 술을 자주 마셨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도 하면서.
이내 컵이 다 비워지자 시베르가 멋있다며 안주를 건네주었다. 레일라는 그녀가 건네준 초콜릿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둘 중 누구든 1등 하면 좋겠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얌전히 앉았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더라도 한꺼번에 많이 마시면 안 되는 건지, 슬슬 어지러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레일라가 어지러운 듯 인상을 쓰자 소네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제 어깨로 기대게 했다.
“나 조금 어지러워.”
“기대고 있어.”
소네트가 웃으며 말하자 레일라도 똑같이 웃었다.
“그럼 방해될 거 같은데.”
“방해 안 돼. 오른손으로 할 거니까.”
레일라는 소네트의 왼쪽 어깨에 얌전히 기대고 있었다. 술이 알딸딸해서 그런지 그저 기분이 좋기만 했다. 어지럽긴 했지만
“소네트, 꼭 이겨.”
방금까진 둘 중 누구든 이기라고 해 놓고,
레일라는 귓속말하는 척하며 소네트에게 속삭였다. 시베르를 도발하고자 한 말이었다. 아까부터 시베르가 미친 사람 같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응.”
소네트는 레일라의 속삭임에 다짐하듯 그렇게 대답하고는 레일라의 입술을 적시고 있던 럼주를 엄지로 훑으며 웃었다.
“내가 먼저 할게, 소네트.”
어느새 성을 다 쌓은 시베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진정이 되었는지 평소와 같은 눈이었다.
레일라는 시베르의 저런 표정을 이제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술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머리도 잘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소네트의 단단한 팔을 끌어안듯 기대며 이내 손으로 쓸었다. 그러자 소네트가 당황한 듯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시베르의 반응은 아주 볼 만했다. 블록을 빼야 하면서도 레일라가 소네트의 팔을 만지자 시선이 레일라 쪽으로 향했으니까.
레일라는 시베르가 이기게 해야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기에, 더는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시베르가 이기면 소네트에게 허튼수작을 할 소원을 빌 테니까.
“소네트 차례야.”
시베르가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으며 술잔을 마셨다.
이미 진 레일라는 둘의 술잔을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좀 마셔도 되겠다 싶었기에 아까 그 커다란 잔에 반 정도 채운 뒤 홀짝거렸다.
“더 마셔도 되겠어?”
“술이 너무 맛있어. 소네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레일라가 해맑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뺨을 만졌다. 그녀는 그가 픽 웃으며 똑같이 그의 뺨을 만졌다.
“다음.”
시베르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웃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재빨리 다음 차례를 넘겼고.
“아, 네.”
소네트는 차례를 넘겨받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블록을 쌓았다.
그렇게 얼마나 차례가 지났을까.
이제 거의 새로 쌓은 것들 이외엔 블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레일라는 이 독한 두 인간이 언제까지 이럴까 싶을 정도로 지겨워져 있었다.
둘은 서로 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소네트는 아주 섬세하고 부드럽고 천천히 블록을 빼서 쌓은 뒤 여유롭게 술을 마셨다.
그러자 시베르는 그것보다 더 느리고 섬세하며 미칠 듯한 집중력을 보이며 뽑은 블록을 위태위태하게 쌓아 올렸다.
마치 성에 이가 다 나간 듯 보일 정도로 황량해지자 레일라는 차라리 저가 재채기로 다 날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젠 정말 누가 숨만 크게 쉬어도 성이 무너질 것 같았다. 레일라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소네트가 블록을 빼려는 순간 말했다.
“소네트가 1등 하면 어떤 소원 빌 거야?”
그대로 소네트의 왼손을 살며시 잡으며 속삭였다.
“……우리가 약혼하기로 하면, 받기로 한 거.”
레일라는 그 순간 그가 키스를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꼭 시베르가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건만.
-와르르르!
시베르가 술에 취해 움직이다가 성을 쓰러뜨렸다.
“아, 제가 이겼군요. 시베르 영애.”
“아…….”
시베르는 알딸딸하면서도 기분이 나쁜 건지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다.
“마시죠.”
소네트가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시베르에게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시베르는 애써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가 술잔을 전부 비우고 소네트를 보았다.
“2등에겐 어떤 소원을 빌 거야?”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3등에게만 받도록 하죠.”
소네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시베르를 바라보았다.
“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소네트의 말이 바뀌자 시베르가 짜증스럽던 표정을 다시금 해맑게 바꾸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 방에서 나가 주시죠. 저는 레일라와 둘이 있고 싶으니까요.”
“……술 마신 남녀가 둘이서만 있는 건 위험해요.”
“저흰 약혼했습니다.”
“저는 레일라의 언니인데요.”
레일라는 술을 홀짝홀짝 마셔서인지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었다.
“셋이 있자.”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자, 소네트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소원은 나중에 빌어도 됩니까?”
소네트가 그녀에게 존대하자 레일라가 픽 웃었다.
“오늘 아니면 끝이야, 소네트.”
시베르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에 누워 버렸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고민하듯 레일라의 뺨을 쓸었다. 레일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약혼하고 받고 싶은 게 뭔데?”
“아닙니다. 둘만 있을 때 말하고 싶어서요.”
그러자 소네트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도 술에 취한 건지 반말하기로 한 걸 잊어버렸다.
소네트의 말에 그녀는 역시 그가 바라는 게 제 예상과 같다고 생각했고.
이내 시베르가 취한 듯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네트가 시베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보는 사람이 없으면 해도 될 것 같긴 하네요.”
“뭘?”
“첫 키스요.”
소네트가 이내,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로 레일라의 턱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닿을 듯 가깝게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퍽!
소네트는 그대로 목 뒤를 맞고 옆으로 쓰러졌다.
레일라는 그를 때린 사람이 누군지 곧바로 보여서.
“하하하.”
저도 모르게 웃었다.
“레인.”
“하.”
레이니어가 한숨을 쉬며 레일라를 둘러멨다.
“아…….”
레일라는 그가 저를 업고선 이동하자 머리가 아주 어지러웠다. 그녀는 그의 허리 근처에서 대롱대롱 움직이는 제 손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이윽고 방 밖으로 나가 복도에 도달하자 그녀가 말했다.
“저 또 울었어요?”
“예.”
“그렇구나.”
그녀는 눈가가 말라 있었건만,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지러운데.”
그러자 그가 그녀를 내려 주는 듯했다. 그녀는 제 다리가 땅에 닿았다가 이내 다시 들리자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덜 흔들리게 안아 들었다는 걸 깨닫고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우는 건 레인인데요?”
“예.”
그의 표정을 본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고는 픽 웃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물건은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물었다. 그러자 그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물건은 곧이요. 장소는 마련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에 안도하며 그를 더 꼭 안았다. 곧 휴고에게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거기에 휴고뿐만 아니라 아나시스 황태자를 골탕 먹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레인은 왜 울었어요?”
레일라가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생각하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시베르의 방으로 옮겨졌고, 침대에 눕혀졌다.
“대답 안 할 거예요?”
그녀가 팔을 안 풀며 말했기에, 그는 그녀와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한 거리에서 엎드리고 있었다. 마치 키스할 것처럼.
“대답하면 제 소원을 들어주실 겁니까?”
레일라는 그의 숨결이 얼굴에 난 솜털을 간질여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뭔지 들어보고요.”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제 소원인 피도 받으면 그와 자신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