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44화
“이게 왜 개수작이에요?”
레일라는 레이니어가 제 종이를 구길 것만 같아서 얼른 챙겨가 뒤로 숨겼다. 그러자 레이니어가 웃었는데, 또 가짜로 웃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가 가짜로 웃을 때는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가씨는 사랑하지도 않는 분과 첫 키스를 하게 되는 게 아무렇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는 억지로 웃을 때마다 입이 한쪽만 올라간다. 그냥 웃기만 할 때는 티가 안 나는데 말할 때는 확실히 삐딱해 보여서 티가 났다. 지금처럼.
“전에도 말했지만, 귀족은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아요. 그건 레인도 잘 알지 않나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황족인데 왜 몰라요?”
“제가 근본도 없이 밖에서 자라서 모릅니다.”
레일라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서 더 따지면 부모님 욕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러자 그가 그녀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브루스 소후작이 정말 영애와 하는 게 첫 키스일까요?”
“……그렇겠죠?”
“순진하시네요.”
“저도 처음이 아닐 수도 있죠.”
“처음도 아닌데 그렇게 긴장하실 리는 없죠.”
그녀는 그가 생각보다 눈치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회귀 전에도, 그리고 전생에도 키스해 본 적이 없긴 했다.
“그러는 레인은요? 순결하니까 안 해 봤겠죠?”
“예.”
“그럼 첫 키스가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어떻게 알아요? 안 해 봤다면서요.”
그가 싸늘하게 입을 다물고는 또 눈만 웃고 있었다.
“안 해봐서 더 잘 알죠.”
그녀는 물기를 털어내는 걸 멈추고 헝겊을 한 손에 쥔 채 레이니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소네트 브루스랑 키스하지 마시죠.”
“그건 레인이 참견할 바는 아니에요.”
“예, 그렇겠죠. 그래도……. 안 하시면 좋겠습니다.”
레일라는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헝겊을 뒤집어 들고 그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다시 허리를 낮추며 그녀가 저를 만지기 쉽게 숙였다.
“소네트에게도 원한이 있다고요?”
“예.”
“그래서 하지 말라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그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맞추었다.
레일라는 그의 새빨간 눈을 보자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저 멀리, 방 안에 있던 괘종시계가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소리에 묘하게 레이니어의 심장 소리가 섞여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그럼요?”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처음도 마지막도 좋아하는 사람과 하십시오.”
그녀는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에 놀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았던 원작에서 그는 시베르를 유혹하기 위해 적극적이었던 직진남이었다. 그런 그가 제게 이런 감성적인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안 생기면요? 그리고 저는 그럴 상황도 아니에요.”
그래서인지 그녀는 솔직하게 반응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그리고 살아남았을 때 걸림돌이 될 시베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시베르는 이미 소네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이제 해가 떠 가는 중이니 곧 그들은 레일라의 방에서 눈을 뜰 것이다.
레일라는 그래서 그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 보았던 레이니어도, 직접 본 레이니어도 대의를 위해서는 그런 일 같은 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원작에서는 그러다가 시베르를 만나 변했다. 그러니 지금의 그는 변할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변한 것만 같아서 더 이상했다.
“그럼 저랑 처음을 교환하시죠.”
“뭐라고요?”
“아가씨께 첫 키스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제게 넘기시죠. 대신 아가씨께서 바라시는 걸 제가 하나 들어드릴 테니까요.”
그녀는 그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건 눈치채고 있었다.
“레인, 혹시 저 좋아해요?”
“아뇨.”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런 걸 거래하려고 해요?”
“브루스 소후작이 싫어서요.”
레일라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변한 것 같기도 해서.
“그래요, 그럼.”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일라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헝겊을 잡아 내린 뒤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레일라는 그가 젖은 손에 묻어 있던 물기를 제 뺨으로 옮기는 게 그리 싫지 않았다. 그는 비를 맞았음에도 몸이 뜨거워서 물기마저 따스했다.
그 물기가 그녀의 볼에 녹아들 즈음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그녀는 정말 이렇게 키스하게 되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레일라는 정말로 첫 키스 같은 게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고작 키스였고, 없던 일로 치면 그만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 목숨이었다.
이대로 키스한다면 레이니어에게 자발적으로 피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는 입술에 닿을 말캉한 감촉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숨결이 제 볼에 있는 솜털을 간지럽게 할 정도로 가까웠음에도 입술은 닿지 않았다.
레일라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인 것은 그의 호기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울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고뇌하듯이.
그래서 그녀는 그가 이 거래를 망설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키스 한 번에 목숨!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까치발을 들었다.
“……!”
오히려 놀란 건 레이니어였다.
“방금 뭘 한 겁니까?”
“키스요.”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자 레일라가 그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었다.
“이게 무슨 키스죠?”
“키스죠. 입술이 닿았잖아요. 약속대로 거래해요.”
“사기꾼이셨군요.”
레이니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인상을 찌푸린 게 눈에 잘 안 보일 정도였다.
“레인, 정말 처음이었어요?”
“……예.”
“그럼 이게 키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어느 누가 입술만 닿았다 떨어지는 걸 키스라고 합니까.”
레일라는 그가 생각보다 똑똑해서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의 그는 동정이었는데도 몹시 절륜하고 뭐든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키스를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잠자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사기꾼에게 사기치려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듯했기에.
“그럼 마저 하죠.”
“……지금은 싫습니다.”
“왜요?”
레일라는 몹시 붉어진 레이니어의 귀를 보며, 그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작 키스가 뭐라고.
“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녀는 저보다 그가 더 긴장한 듯 보여서 저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준비가 다 되면 하나요?”
“예.”
“그럼 키스만 하면 무조건 어떤 소원이든 하나 들어주기예요?”
“……예.”
그녀는 그가 맹세하듯 대답하는 걸 보며 픽 웃었다. 만약 그에게 자발적으로 피를 받을 수만 있다면 소네트와도 더 쉽게 손절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