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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51)화 (51/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51화

“말씀하신 대로 1층의 다기를 전부 구매하신다면, 곧장 4층으로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레일라가 바이마르 공녀에게 그렇게 말하자 바이마르 공녀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전부 사겠네. 그리고 결제는 이걸 가져가서 내 가문으로 전해. 그럼 바로 금화로 줄 걸세.”

공녀가 낀 차기 가주 반지를 받은 레일라는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럼 4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레이니어는 벗었던 가면을 쓰기 전, 바이마르 공녀와 그 측근들을 한 번씩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은 총 여섯 명이었다. 그 여섯 명은 전부 바이마르 공녀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레이니어가 다시 가면을 쓰자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공녀를 따라 올라갔다.

“참고로 귀빈실은 1층에서 승강기를 타실 수 있습니다, 공녀님. 그리고 영애분들.”

“승강기는 필요 없겠어. 워낙 눈이 즐거워서.”

바이마르 공녀의 말에 레이니어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4층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그들이 올라가는 모습을 본 레일라는 1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내려가는 내내 발목과 허벅지가 당길 지경이었다. 레일라는 내려가는 행위에도 무릎이 아플 수 있고 허리가 뻐근할 수 있고, 종아리가 당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또각또각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흰색의 아름다운 계단은 손잡이도 훌륭했다. 게다가 바닥에 깔린 붉은 주석으로 된 카펫도 몹시 고급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오늘 힘 주어 꾸미는 바람에 구두 굽도 높았고, 치마는 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길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머리와 귀걸이의 장식도 치렁치렁했고.

그녀는 그렇게 온 신경이 다리로 가던 중 그만.

“꺅!”

발목을 접질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이런.”

그런 그녀를 안아서 넘어지지 않게 해 준 사람은.

“전하!”

아나시스 황태자였고.

“꽤 귀여운 술수였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를 놓아주었다.

“생각보다 가볍네. 정말 아파서 자주 굶는 건가?”

“그게 무슨…….”

아나시스 황태자는 제게 안기기 위해 넘어지는 척하는 여인들을 아주 많이 봤었다. 그렇기에 그런 술수를 쓰는 레일라가 그저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온다니 이렇게 화려하게 꾸민 것도.

그리고 안겼을 때 묘하게 가벼운 것도 신기했다. 드레스의 무게가 상당한 걸 감안하더라도, 저렇게 굴곡진 몸이 어찌 이렇게 가벼운 건지.

“전하, 정말 기뻐요. 이렇게 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정말 모든 게 계획대로 돼서 너무 기쁘네요.

레일라는 뒷말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감격한 표정을 본 아나시스 황태자는, 역시 그녀가 브루스 후작 부인보다는 예비 황비의 자리를 더 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쁘겠군. 내가 와 줬으니.”

“네, 무척이나요.”

레일라가 환하게 웃으며 황태자를 맞이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나시스 황태자 뒤에 있던 영식들과 일행으로 온, 황후의 측근 귀족의 영애들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나.”

다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국보급 명화를 보며 감탄했다.

“이런 비싼 그림들은 어디서 구한 거죠? 백작가의 수익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영식 중 한 명이 감탄하듯 말했다.

“제 동업자가 아주 부자라서요.”

레일라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내 아나시스 황태자에게 귀를 빌려달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토끼처럼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귀여웠는지 픽 웃더니 귀를 대주었다.

“제가 그 의사를 4층에 데려다 놨습니다.”

레일라가 충성스러운 척하며 속삭여 왔다. 그 순간 아나시스 황태자가 거만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대는 정말 귀엽군.”

그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레일라를 귀엽게 보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뭐든 좋게 보였으니까.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턱턱 쓰다듬으며 마치 애완동물처럼 귀여워하자, 주위에 있던 영식들과 영애들이 눈빛을 교환하다가 말했다.

“역시 전하의 안목답게 아주 훌륭하군요.”

“그러게요. 역시 전하세요.”

“전하께서 보증하시는 곳이라 그런지 수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럽네요.”

다들 그렇게 칭찬해 왔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는 곧 거슬리는 레이니어도 죽이고, 첩이 될 사람에게도 아량을 베풀어 줄 생각에 기쁘게 웃고 있었다.

“4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리를 삔 것 같던데.”

“네. 전하를 맞으러 너무 급히 오다 보니.”

레일라는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녀의 귀 뒤로 분홍색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승강기가 있다고?”

“네, 저쪽…… 앗…….”

그 순간 그가 레일라를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다른 이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으니까.

황태자가 그녀에게 아무리 다정하더라도 다들 알고 있었다.

황태자비의 자리는 실리가 있을 여인의 자리라는 걸. 아무리 관심을 보인다 해도 기껏해야 후궁 정도라는 걸.

그래서 그리 의식하진 않고 따라갔다. 황태자가 하는 행동은 어차피 제 어머니인 황후에게 허락받은 일일 테니까.

“내, 내려 주실 수 있을까요?”

“발목도 아픈데 굳이.”

하지만 레일라는 달랐다. 그녀는 그의 거절에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 4층까지 간다면 바이마르 공녀가 볼 테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를 놓지 않은 채 승강기에 올라탔다.

“4층 귀빈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윽고 승강기를 움직이는 직원이 층수를 누른 뒤 레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천히 올라간 승강기는 4층에서 띵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전하?”

“아, 바이마르 공녀.”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녀를 보며 반가운 듯 웃었다. 그러고는 레일라를 붉은 소파에 내려 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앞을 보고 다녀요.”

“네, 감사합니다.”

아나시스 황태자가 픽 웃더니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사나운, 새빨간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를 챘겠지. 가면을 써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인상 깊은 얼굴이었으니까.

“전하, 이쪽은 제 동업자입니다.”

레일라가 눈치껏 레이니어를 소개하려 했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레일라를 아주 잘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레이니어에게 말했다.

“반갑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니어는 시침을 떼며 아나시스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바이마르 공녀는 레일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레일라는 바이마르 공녀도 신경 쓰였지만, 황태자가 더 신경 쓰였다. 이대로 레이니어에게 곧장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렇고.

“다리가 많이 아픈가요?”

바이마르 공녀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자 레일라가 애써 웃으며 드레스를 살짝 걷었다.

“저런.”

그녀의 부은 발목과 너덜거리는 구두 굽을 본 바이마르 공녀는 화가 좀 누그러든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꾀병으로 아나시스 황태자에게 안기는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까.

그러나 레일라 아비에르는 정말로 다리를 다친 것처럼 부어 있었다. 거기에 굽까지 만신창이였고.

물론 그 굽은 레일라가 치마를 걷기 전에 부러뜨린 것이었다. 혹시나 변명할 때 필요할까 해서.

바이마르 공녀의 표정을 본 레일라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4층 자체는 넓었지만 귀빈실이었기에 한 방당 정원은 스무 명이 한계였다. 두 그룹으로 나눠진 그들은 황태자의 그룹과 공녀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따로 방을 사용했다.

황태자는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루텐베르크 왕국의 왕세자가 와 있다더니, 그대인가 보군요.”

레이니어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아, 이건 극비사항이었군요. 미안합니다.”

레이니어는 여전히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가 황제가 숨긴 레이니어 황자라는 걸 확신했다.

세상에 몇 없는 붉은 눈, 그리고 황제의 젊은 시절에 보았던 그 새까맣고 풍성한 머리카락까지.

가면을 벗으면 젊은 시절 황제의 얼굴을 그대로 박아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 그리고 가면 너머로도 느낄 수 있는 지고한 미모까지.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 친우들은 입이 무겁답니다.”

방은 달랐으나 황태자를 주시하는 바이마르 공녀의 오른팔, 페날든 자작 영애가 근처 복도에서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말해 보시죠. 제 예측이 맞습니까?”

루텐베르크 왕세자가 신분을 숨기고 지크문드 제국에 와 있다는 건 극비사항이었다. 다만 실상은 루텐베르크 왕세자가 레이니어를 위해 그렇게 꾸며 준 것이었고, 정작 루텐베르크 왕세자는 제 아버지를 위해 몰래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제국에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고.

“예, 맞습니다.”

그것은 아나시스 황태자도 알고 있었다. 황후는 결코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이곳은 내 친우들과 함께 쓰려 하는데.”

그런데도 아나시스 황태자는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대가 맞이해 주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그것은 아나시스 황태자의 입장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레이니어도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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