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52화
“내가 자네를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하겠나?”
아나시스 황태자의 말에 레이니어가 웃으며 말했다.
“레인으로 불러 주십시오.”
“레인.”
아나시스 황태자는 제 애칭을 가명으로 사용하는 레이니어가 우스워서 저도 모르게 픽 비웃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레일라는 어디 있지?”
“옆 방에 있습니다.”
“그렇군.”
아나시스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위에 있던 제 부하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다들 차 마시면서 기다려. 나는 저쪽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오십시오, 전하!”
“다녀오세요!”
다들 황후를 두려워했기에, 그들은 황태자에게도 아주 공손했다.
“레인과도 즐겁게 보내고.”
“그것도 좋네요.”
레이니어는 넉살 좋게 웃으며 베로나 백작 영애의 옆으로 앉았다. 베로나 백작이 황후의 최측근인 걸 떠올리며.
“저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레이니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목과 팔목에 돋은 소름을 긁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는 누군가 제 옆에 닿을 때마다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머나.”
베로나 백작 영애가 볼을 붉히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런 레이니어를 두고선 아나시스 황태자는 곧장 레일라에게 향했다. 그는 복도로 나가자마자 제 신하에게 말했다.
“광장으로 가던 인원을 늘려. 오늘 처리한다.”
“예, 전하.”
그러고는 레일라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4층이 얼마나 넓은지 반대편 방으로 향하는 데만 한참이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바이마르 공녀가 있는 방문 앞에 섰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사용인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와요.’
바이마르 공녀의 말에 아나시스 황태자가 곧장 들어갔다.
“꺄악!”
그 순간 레일라가 제 허벅지까지 올린 치마를 내리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다른 영애들에게 보여 주며 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뭐야!”
“아…… 전하? 왜 전하께서…….”
아나시스 황태자가 놀라서 곧장 몸을 돌렸다.
-똑똑.
‘아가씨! 접니다!’
“어? 들어와!”
그러자 바이마르 공녀와 그 무리가 정말로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아나시스 황태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선 공손한 척하는 말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눈꺼풀 아래로는 흰 다리를 내놓고 있던 레일라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마치 인어에게 다리가 생긴 것처럼 희고도 쭉 뻗은, 기다랗고 아름다운 다리였다.
그는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레일라 영애가 발목을 심하게 다쳐서요. 저희 가문 의사를 불렀습니다.”
바이마르 공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제 앞에 서 있던 여성 의사를 손으로 불렀다.
“드레스를 좀 걷어야 합니다.”
남자는 밖에 있으라는 말이었으나 아나시스 황태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대로 등을 돌린 채 벽을 보며 서 있었다.
“네, 걷어 주세요.”
레일라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이내 의사가 그녀의 발목을 보며 말했다.
“많이 부었군요.”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일라의 발목을 손으로 짚었다.
“꺄악! 아파요!”
“다행히 뼈는 무사합니다. 다만 근육이 조금 놀란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아나시스 황태자가 그 말에 대신 대답하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레일라에게 할 말이 많았기에.
“아파요…….”
레일라는 의사가 제 발목을 집으며 뼈에 이상이 없는지 꾹꾹 눌러대는 게 힘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은 이미 젖어서 언제든 눈물이 흘러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나시스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궁에 미인은 많았다.
그녀의 옆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바이마르 공녀도 박색은 아니었고. 다만 레일라의 옆에 있으니 미모가 덜 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하께서는 아비에르 영애와 친분이 두터우신가 보군요.”
바이마르 공녀가 짝사랑하는 사람답게 아나시스 황태자의 감정을 떠보았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는 곧장 이성이 돌아왔다. 어머니가 정해 준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레일라에게 브루스 후작 부인이 되게 도와주겠다고 했거든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바이마르 공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공녀의 측근들도 표정이 밝아졌고.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네, 바이마르 공녀는 레일라와도 친한가 보군요. 역시 사교계의 꽃답습니다.”
아나시스 황태자가 사람을 홀리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바이마르 공녀를 향해 웃었다.
이상했다. 바이마르 공녀 정도면 어여쁜 사람이었건만, 우는 레일라의 옆에 있으니 시든 잎처럼 볼품없이 느껴졌다.
“어머, 과찬이십니다.”
“제가 레일라와 둘이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레일라를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레일라의 다리에 붕대를 감던 의사의 손길이 빨라졌다. 붕대를 다 감은 의사가 그래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참 몸도 약하군요.”
아나시스 황태자가 손을 내밀자 레일라가 어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복도로 나갔다.
두 방 사이에는 긴 복도가 있었고, 그 복도에는 테라스도 있었다.
레일라는 자신을 테라스로 데려가는 아나시스 황태자를 얌전히 따라갔다.
테라스에 도착한 황태자가 레일라를 보며 말했다.
“레인을 광장으로 불러내. 오늘 밤 9시에.”
“노력할게요.”
“노력 말고 확답을 해.”
아나시스 황태자는 둘만 남자 레일라에게 하대하며 명령했다. 레일라는 그가 정말 가면을 잘 쓴다고 생각하며 불쌍한 척 눈꼬리를 내린 채 말했다.
“사실 이렇게 데리고 오는 것도 힘들었어요. 얼마나 요리조리 잘 피하던지…… 제 지참금을 다 털어서 함께 사업하자고 한 덕분에 이렇게 부를 수 있던 거예요.”
“…….”
“저 사람, 정말 경계심이 너무 심해요.”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녀를 좀 더 추궁하려 했다. 그러다가 아직도 눈물이 그녀의 분홍색 속눈썹에 매달린 걸 보자 그러지 못했다.
“참 자주 우는군, 한심해. 쓸모도 없고.”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녀의 눈가에 있던 눈물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비웃었다.
“바이마르 공녀님 앞에서 너무 제게 편하게 구시면 안 돼요. 그럼 제가 전하를 도와드리기가 너무 어려워져요.”
그녀가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투정처럼 느껴져서인지 그저 우스웠다. 발목이 부러질 걸 각오하고 넘어지는 척 제게 안겼던 여인이, 정말로 제 관심을 바라지 않을 리는 없었으니까.
“바이마르 공녀는 그저 황태자비 용인 거지.”
“예?”
“내게 사랑받을 후궁의 자리는 비어 있다고.”
그가 레일라에게 적선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레일라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인상을 찌푸리다가 그가 저를 빤히 보길래 반사적으로 웃었다. 그녀는 그가 마치 제 안에 있던 욕이 한가득한 마음의 소리를 들었을까 봐 걱정했다.
“알아들었으면 협조 잘해.”
“네? 아,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일라는 그렇게 거짓말하며 계속 저를 감시하듯 보는 그를 향해 헤실헤실 웃어야 했다.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파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