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53화
아나시스 황태자는 어쩐지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 잠시 본 레이니어는 아주 냉정한 사람이었다. 사람이라기엔 기계 같았고.
커서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어릴 적 보았던 이미지 그대로였고.
그러나 어머니가 그를 죽이기 위해 여인들을 종종 보낼 때마다 그는 간단하게 죽여 버리고는 종적을 감췄었다.
레이니어를 놓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지만.
예전이라면 제 머리색과 눈색을 숨기며 살았을 그는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흔치 않은 검정 머리카락, 거기에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붉은 눈까지 내놓고 다니고 있었다.
물론 자연적으로 붉은 눈이 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그렇기에 아나시스 황태자는 두 가지의 희귀한 색을 모두 가진 레인이 레이니어라고 확신했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미모만큼은 빛이 났다. 어릴 적처럼 눈부신 그 모습을 보니 부정할 수도 없었고.
“전하?”
그리고 레일라가 아무리 하찮은 백작가 영애더라도 얼굴은 봐 줄 만했다.
아니, 그동안 남의 거라 생각해 부정했지만 실상은 그녀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거의 없었다.
“애도 못 낳는 몸인 건 유감이군.”
“……갑자기요?”
그는 레일라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외적으로는 아주 훌륭했다.
연한 분홍색의 머리카락은 마치 작약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에 지금껏 분홍 머리카락이 조롱거리가 됐던 건 그 머리색이 어울리는 영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일라의 분홍색은 무언가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듯했다. 연한 하늘색 눈동자까지.
마치 수채화로 그려 둔 사람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굴곡진 몸매까지.
“가문도 한미하고.”
아나시스 황태자는 대놓고 레일라를 조롱했다. 레일라는 그가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서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그가 재밌다는 듯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
제게 호감이 있어 이렇게까지 하는 거라는 걸 알자 우습기도 했고.
뭣보다 그는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제게 목을 매는 여인을 한둘 본 게 아니었다.
레일라처럼 발목의 부상을 감수하고도 안기려던 사람은 이미 흔할 지경이었고, 매일 편지를 쓰며 구애하는 여인들도 많았다. 거기에 제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물 쓰듯 쓰는 바이마르 공녀도 있었고.
“브루스 후작 부인이 되고 싶다고 했던가?”
“네.”
그는 그녀가 제게 혼신을 다하면서 여전히 소네트 브루스를 쥐고 있는 사실 역시 마음에 들었다. 브루스 후작가라면 중앙 귀족들 중에서도 꽤 이름난 사람이었으니까.
이참에 그녀가 정말로 소네트 브루스와 결혼하면 아이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됐다. 남편이 있는 채로 황실의 정부가 되는 귀부인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뭣하면 소네트 브루스와 함께 즐겨도 괜찮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자 레일라가 정말 제 손안의 마리오네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 협조 잘해.”
거기에 다른 영애들과는 다르게 레일라는 몹시 순종적인 여인이기도 했다. 그런 부분이 만족스럽기도 했고.
“……그럴게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알아.”
다만 그녀를 이용할 곳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밝히는 사람이 있어서 문제였지만.
하필이면 제 배다른 형이 남자를 밝힐 줄이야.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렇게 오해하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