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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58)화 (58/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58화

“저 좋아하지 말라니까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은 제 마음인 거니, 아가씨께서 명령하실 수 없습니다.”

레일라는 그가 여우처럼 웃으면서도 실상은 웃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명령하면 듣긴 하나요?”

“아뇨, 제 명령도 안 듣는데 아가씨 명령이라고 듣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레일라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아주 얇은 네글리제만 입었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만 부끄러움보다는 묘한 안도감도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 이런 모습을 자주 본 레이니어는 자신이 진심으로 싫다고 하면 어떤 짓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그가 보였던 행동들이 그랬으니까.

“오늘은 안 불렀는데 어떻게 왔어요?”

“오고 싶어서요.”

“약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서요?”

“네.”

레일라는 그가 가져온 사업 서류들을 다시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소네트가 좋아요.”

그녀가 그의 눈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소네트에게 어떤 감정도 없었다. 소네트가 정말 진심이었다면 저를 헷갈리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자신이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몬트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소네트 브루스는 아가씨께서 저와 사업하는 도중에 매일 이 저택에 왔다고 합니다.”

“……알아요.”

“그가 누굴 만났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시베르 언니와 제 약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나 보죠.”

“방에서 단둘이요?”

레이니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레일라가 그를 보았다.

“우리도 지금 둘이서만 있네요.”

그녀의 말에 레이니어는 기쁜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레일라를 직시하고 있었다.

“제가 주기로 한 게 있지 않습니까?”

레일라는 그가 아직 피를 주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며 바라보았다.

“네, 주기로 한 게 있네요.”

그러자 그가 제 엄지를 손으로 물었다. 그러고는 피가 나자 레일라의 눈을 보며 웃었다.

레일라는 설마 그가 제 손에서 핥아 먹으라는 걸까 싶어서 바라보았더니.

“세상에.”

그가 제 입술에 피를 바른 채 말했다.

“드리죠.”

“약혼 전까지만 하기로 했던 거 잊었나요?”

“아직 약혼식 전입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묘하게 납득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저것만 먹으면, 그가 자발적으로 준 황족의 피만 먹는다면.

매번 복용해 몸이 약해지게 만든 원흉, 〈인어의 눈물〉도 효력을 잃을 것이다. 그럼 이제 정말 칼이 박혀도,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몸이 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린 듯 걸어갔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레일라는 제 쪽에서 이만큼 다가갔는데, 그가 키스하지 않는 게 이상해서 멀뚱히 바라보았다.

입술을 붉게 물들이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요사스럽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도 그의 붉은 눈 때문에 종종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데 지금은 입술마저 붉어서 그런지.

“무셔도 됩니다. 입술에서 피가 나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가 여유롭게 기다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일라는 까치발을 들어야 그의 어깨에 팔을 뻗을 수 있었다.

“꺅!”

“쉿. 밖에서 다 듣습니다.”

그 순간, 레일라는 그가 자신을 갑자기 안아 들자 놀랐다.

그러나 그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자, 어딘지 모르게 또 안심이 되고 있었다. 올려다 볼 때엔 조금 불안했으나 내려다보니 평소의 레이니어인 것 같기도 해서.

“왜 안 하십니까?”

그녀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거든…… 읍…….”

그녀가 고민하자 그가 그녀의 목을 눌러 입술이 닿게 했다. 레일라는 비릿한 내음과 함께 입 속으로 들어오는 말캉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비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비릿한 맛이 덜 날 때쯤 되어서야 입술을 떼어냈다.

“다 먹었는데요.”

그러자 그가 제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나게 했다.

“이래도요?”

그 말을 마친 뒤 다시금 레일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레일라는 그의 입술 위에 달라붙은 피가 제 입술에도 닿는 게 느껴졌다. 거기에 입 안을 온통 헤집는 그 묘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는 그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가 어찌나 격하게 움직였는지, 그녀는 잠시 숨이 막혀 어지러웠다.

그렇게 또 한참을.

그녀는 그에게 잡아먹히듯 키스하고 있었다.

“하으…… 이제 그만.”

그녀는 어찌나 턱이 뻐근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떨어졌다. 눈시울이 젖어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위가 너무 잘 보였다.

“저도 이제 건강해지겠네요.”

숨을 돌린 뒤 레일라가 신이 나서 그렇게 말하자 레이니어가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참고로 황족의 피는 계속 마셔야 효과가 있습니다.”

“뭐라고요?”

레일라는 자신이 본 원작을 떠올리며 그의 말을 의심했다.

원작에선 시베르가 〈인어의 눈물〉을 마시고 죽을 뻔했을 때 레이니어가 제 피를 줘서 그녀를 살렸다.

“아가씨 정도의 몸 상태라면 앞으로 매일, 적어도 1년은 드셔야겠죠.”

“거짓말이죠?”

“제가 아가씨께 거짓말을 왜 합니까?”

“거짓말 많이 하잖아요.”

“거짓말은 안 합니다. 아가씨께는요. 말을 안 하는 건 있어도.”

그의 말에 레일라는 어딘지 모르게 속은 듯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매일 1년이라고요?”

“예.”

그가 여우처럼 웃으며 레일라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반년만 있는다면서요.”

“그렇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글쎄요? 앞으로 저와 매일 보는 사이가 되시면 되겠죠?”

레일라는 그가 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네.”

“그런데 매일 보고 싶어요?”

“네.”

그의 대답이 곧장 이어지자, 레일라야말로 당황했다.

“정말요?”

“네.”

키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키스하는 내내 숨이 모자랐기 때문인지 심장이 너무 펄떡거려서 얼굴이 뜨거웠다. 거기에 지금은 귀도 너무 뜨거워서, 그의 눈을 볼 때마다 귓가에서 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도 들고 있었다.

“이제 내려 줘요.”

“한 번 더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365번 중 364번이 남을 텐데요.”

그의 말에 레일라가 고민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제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낸 뒤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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