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60화
“어디까지 했지?”
“네?”
“소네트 브루스랑 어디까지 했냐고.”
아나시스 황태자는 일전에 몬트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휴고가 와서 난동을 부렸던 그때. 황태자는 기품 있는 척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이 상황을 알려 주었으니까.
‘휴고 로날드가 그동안 뿌리고 다녔던 소문이 거짓이라고 소리치던데요?’
‘어떤 소문?’
‘레일라 영애에 대한 소문들이요.’
아나시스 황태자는 제 어머니가 사교계의 가장 막강하면서도 권위 있는 사람이었기에, 별의별 소문을 다 들었다.
레일라에 대한 소문도 꽤나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난잡하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저 천박하고 지조 없는 여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보니, 불쾌했다. 저렇게 미색이 대단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와 말을 섞기 싫어했던 건, 말을 깊게 섞으면 마음도 섞일까 하는 경계심에서 보이던 태도였었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제게 이렇게 다가오자 그는 이미 제 마음도 꽤 그녀에게 섞였다는 걸 깨달았다.
뭣보다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제겐 그리 나쁘진 않았다. 제 정실 부인이 될 것도 아니었고, 고작 애인으로 둘 테니까.
거기에 아무리 부정하고, 흔하다고 치부하려 했지만, 레일라처럼 화려한 미인은 제국 내에 없었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제 어머니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고 세뇌당했다. 여태까진 실상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러나 레일라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가 부정하는 걸 그만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기에 그가 좋아하는, 온화하면서도 가시 돋친 장미 같은 성품까지.
비록 이곳저곳 사내들과 엮였던 건 불쾌했지만, 그게 진짜더라도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못하겠지.
그리고 저와 공공연한 비밀스러운 사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더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소네트 브루스는 그 관계를 평생 모르겠지만.
“뭐가 말씀이세요? 소네트랑요?”
레일라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싶어서 바라보았다.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자리는 했어?”
“아뇨. 아직 결혼 전인데요.”
“키스는?”
“안 했어요.”
“포옹은?”
“안 했어요.”
“손은?”
레일라는 차마 손도 안 잡았다고 하려다가 휴고와의 일을 그가 알고 있을 테니 웃으며 말했다.
“손은 잡았어요.”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브루스 소후작에게 그대의 처음은 전부 넘겨주도록 하지. 그 정도 배려는 해 줘야 할 테니까.”
아나시스 황태자의 말에 레일라는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웃고 있었다. 마치 물건 취급을 당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고기를 보며 등급을 매기는 듯한 그의 눈빛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다.
“키스는 어차피 나랑 먼저 해도 모를 텐데.”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의 턱을 잡았다. 레일라가 오늘따라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약혼을 위해 입은 푸른 드레스, 거기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하늘색 눈동자, 화려하게 반묶음한 뒤 장식을 달고 있는 분홍 머리카락까지.
“그게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후회할 텐데?”
레일라는 그가 묘하게 감정이 상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자 당황했다. 대체 왜 이런 오해를 한 걸까.
게다가 불쾌한 사람 취급하고 이용할 때는 언제고 애인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냉정하게, 그가 제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계산해야 했다. 그렇기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당연히 후회하겠죠.”
“그럼 왜 거부하는 건데?”
그의 표정은 불쾌함이 풀어지고,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 표정을 읽은 레일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전하를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해서요. 저는 브루스 후작 부인이 될 테고, 전하께선 지고하신 황제 폐하가 되실 거잖아요.”
그러자 그가 팔짱을 끼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러려면 전하께서는 차기 황태자비가 되실 분과 처음을 나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분수도 모르고 전하에 대한 마음을 키울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단 말이야?”
“……네.”
레일라가 눈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몰래 살짝 하품을 해 눈을 적신 뒤 장갑으로 찍어냈다.
그러자 그녀가 우는 줄 착각한 아나시스 황태자가 픽 웃더니 말했다.
“꽤 귀여운 생각이야. 바람직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레일라의 턱을 다시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선 말했다.
“이건 상이야. 기특해서 내리는 상.”
“아……. 가, 감사…….”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밀칠 뻔한 걸 참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이따 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유롭게 방 안을 빠져나갔다.
레일라는 불쾌함에 볼을 벅벅 닦아냈고, 그렇게 약혼식의 준비를 다시 진행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