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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62)화 (62/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62화

“콜록콜록!”

그 순간, 레일라와 소네트는 뒤쪽에서 들린 커다란 기침 소리에 놀라 떨어졌다.

소리가 들린 쪽을 본 레일라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네트 역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약혼 축하드립니다, 두 분.”

레이니어가 서 있었다. 평소의 의사 복장이 아닌, 정갈한 정장 차림으로.

“누가 너 같은 평민을 여기 초대했지?”

“내, 내가 했어. 소네트.”

레일라는 그런 적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했다.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레이니어에게 피를 받은 이후로 레일라는 제 건강해진 몸상태가 체감될 정도였다. 그런 레이니어에겐 앞으로 피를 더 받아야 했다.

황족의 피가 특별한 건 사실인 게 분명했고 그녀는 그 피가 필요했다.

그리고 레이니어가 매번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걸 보아 그도 제게 바라는 게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고 필요한 존재.

그녀는 차라리 그런 관계가 낫다고 생각하며 레이니어의 편을 들어주었다. 소네트도 어차피 제게 진심이 아닐 테니까.

“연회장에서 브루스 후작님이 기다리시더군요.”

레이니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몸을 돌려 나갔다.

“다시 둘만 남았는데…….”

소네트가 다시금 분위기를 잡으려 하자, 레일라가 먼저 걸음을 떼며 말했다.

“나 후작님께 잘 보이고 싶어. 내 시부모님 되실 분이잖아.”

그녀는 그렇게 웃으며, 레이니어 때문에 한껏 부르튼 입술을 무시하려 했다. 입술이 아직도 따가웠기에.

“아, 응.”

소네트가 레일라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연회용 테이블에 둥글게 앉아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레일라와 소네트는 제일 먼저 브루스 후작 부부에게 가야 했다.

레일라는 원작을 보았기에, 소네트의 지금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친모가 아닌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브루스 후작 부인은 본래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박색인 사내 한 명은 브루스 후작 부인을 몹시 닮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새아가구나, 식이 너무 급하게 결정돼서 내 너를 이제야 보는구나.”

브루스 후작은 레일라가 아주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 레일라는 몸이 약해요. 그렇게 사내처럼 험하게 대하시면 안 됩니다.”

“허허. 그래,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살살 했단다. 그치, 새아가?”

“네, 전 좋았어요.”

레일라는 아직 결혼도 전인데 새아가라고 부르는 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소네트와 정말 결혼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소네트의 부끄럽지 않은 짝이 될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일부러 브루스 후작 부인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러자 후작 부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서둘러 약혼한다길래 배라도 부른 줄 알았구나.”

“배는 곧 부르지 않을까요? 곧 식사를 할 테니까요.”

레일라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대꾸하자 후작 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듣자 하니 아프다던데.”

“이제는 괜찮습니다.”

“아픈 새아가에게서 손주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후작 부인의 말에 소네트가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약혼한 날부터 초치는 걸 보니 새어머니께선 여전히 눈치 따위는 개나 줘 버리신 모양입니다.”

“허, 소네트?”

“이래서 평민 출신은 안 된다고 한 겁니다, 아버지.”

브루스 후작은 소네트와 제 부인이 서로를 노려보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레일라를 향해 말했다.

“새아가는 우리 소네트가 어디가 좋았더냐?”

그러자 소네트의 눈이 일순 부드러워졌다.

“소네트는 정말 다정해요. 제게 매번 배려해 주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말에 소네트가 고개를 떨구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 그를 본 후작 부인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 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영애는 좋으시겠습니다?”

그러자 브루스 영식이 삐뚤어진 표정으로 레일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참, 그래요. 귀족으로 태어나면 남이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만지며 태어나는 게요. 그게 당연하신 분들끼리의 약혼이라 그런지 부내가 납니다.”

비아냥이 분명했으나 아닌 척하는 말에 레일라는 모른 척하며 웃었다.

“귀족은 특권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특권을 누리는 만큼 누구보다 의무도 무겁죠. 소네트도 어릴 적부터 전쟁터에 나가지 않나요? 소네트의 첫 출정이 열다섯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자 소네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란 표정의 그는 이내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평민의 열다섯은 소학교에서 기술을 배울 나이죠. 귀족의 열다섯은 첫 출정의 나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중 절반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죠.”

“크흠.”

“브루스 영식도 열다섯에 전쟁터에 다녀오셨으니, 잘 아시겠네요.”

그러나 소네트와 달리 그는 그러지 않았다. 평민으로 지냈다가 그 후에 입적된 것이었으니까.

레일라가 모르는 척하며 그렇게 말하자 소네트가 픽 웃었고, 브루스 후작은 그녀가 마음에 든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현명한 새아가가 들어왔구나.”

“제가 보는 눈이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소네트가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귀족답게요.”

소네트는 그렇게 제 새어머니를 비웃은 뒤 레일라를 데리고 아비에르 백작가의 테이블로 갔다.

“아버지, 어머니.”

“레일라. 오늘 무척…… 아름답구나.”

아비에르 백작은 레일라가 제 친어머니의 결혼식 때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껄끄러웠다. 마치 제 치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결혼 전부터 카르멘과 만나 정을 나눴던 걸 만천하에 다시 알린 것처럼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시베르가 제 친자식이란 걸 알고 있었다. 시베르를 입적할 때만 하더라도 그 사실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레일라의 결혼식이라 그런지 그 아무렇지 않던 사실이 마치 흠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제 친딸에게 몹쓸 짓을 한 아버지라는 게 실감이 났기에 그랬다.

그가 사랑 없이 레일라의 어머니와 결혼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던 그녀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다는 말을 몇 번 무시하고, 보고 싶다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던 게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어 버린 건 제 탓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당화하려 했다.

하지만 레일라를 보는 순간 모든 게 불편해졌다. 마치 스스로의 변명에 자신도 부끄러워하는 것같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결혼하고 후작위를 잇게 되면, 우리 레일라는 후작 부인이 되겠군.”

“네, 그렇습니다.”

백작은 머지않아 자신보다 더 높은 작위를 가질 소네트를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백작위는 시베르에게 물려줘야겠어.”

“어머, 왜요?”

레일라가 웃으며 제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일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처럼 굴며 사랑을 받고 싶었던 그녀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렇기에 순진한 척하는 표정 아래에 싸늘하고 냉소적인 그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저랑 소네트 사이에서 나올 아이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 아버지에게 어떤 미련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 저 정말 아파요! 제발 제대로 된 의사를 불러 주세요!’

또 그런 소리냐! 이제 그만 좀 하거라! 아픈 걸로 관심을 끌어 보려하다니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구나!’

저 정말 아파요…… 아버지…….’

‘하. 지긋지긋해, 정말.’

그녀는 일순 제 아버지가 이전 생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그게 정말이야, 레일라?”

그러다가 소네트의 붉어진 뺨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그럼. 못 해도 셋은 낳아야지. 우리 가문에서 후작도 백작도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니까.”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고는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작도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넌 참 욕심이 많구나, 레일라.”

“어머니, 오늘따라 화장이 너무 과하시네요. 눈에 멍이 든 줄 알았답니다.”

“뭐?”

레일라는 자신을 비꼬는 제 새어머니에게 똑같이 반격하며 웃었다.

“세상에 드레스 코드가 파랑이라고 했는데, 누가 눈에 파란색을 바르고 온답니까?”

아비에르 백작은 레일라의 행동을 꾸짖으려 했으나, 소네트 브루스가 보고 있어 그러지 못했다. 둘의 결혼에 소네트 브루스가 약속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걸려 있었으니까.

아비에르 백작은 그 광산이 지참금으로서 레일라의 명의가 되는 순간 가질 생각이었다.

어차피 브루스 후작가는 중앙 귀족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에 시집간다면 레일라도 다이아몬드 광산 정도는 양보할 것이다. 길러준 정이 있을 테니까.

그는 그렇게 오만하게 생각하며 흐린 눈으로 제 아내가 모욕당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약혼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레일라를 아나시스 황태자의 측실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러게. 오늘따라 당신 화장이 너무 과하군. 누가 보면 내가 자네를 때린 줄 알겠어.”

그렇게 백작은 돈에 눈이 멀어 레일라의 편을 들고 있었다.

“여, 여보……!”

백작 부인이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레일라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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