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69화
오페라는 일부러 통째로 대관하지 않았다.
“머리를 좀 썼군.”
아나시스 황태자가 레일라에게 넌지시 그렇게 말하자 레일라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늘 전하를 위해 생각하니까요. 신하로서요.”
레일라가 그렇게 마지막 말을 강조하며 말하고는 뒤따라 걸었다.
오페라 극장을 통째로 대관하면 훨씬 비쌌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한다면 황태자가 바이마르 공녀와 오페라를 봤다는 소문이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다.
레일라는 이 일이 커지길 바랐다. 소문 속 둘의 사이가 정말 견고해 보인다면.
조급해진 바이마르 공녀 쪽에서 먼저 청혼하게 될 테니까.
레일라는 바이마르 공녀가 어떤 사람인지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사랑을 이루고 나면 자신을 찾을 사람이었다.
외사랑의 부질없음은 남이 알려 주는 것보다는 스스로 깨닫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황태자는 공녀에게 사랑받을 가치도 없었고.
공녀가 품은 마음에 비해 아나시스 황태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심조차도 전해지기 어려운데, 그 마음이 거짓이라면 더더욱. 거짓인 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레일라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머,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일반 귀족들이 앉는 곳은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와 공녀, 그리고 레일라와 루텐베르크 왕세자로 변장한 레이니어는 1층과 2층의 사이에 있는 내부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그 귀빈석은 무대가 아주 잘 보이는 장소였고, 악단과도 가까워서 무대를 즐기기엔 확실히 좋은 곳이기도 했다.
“참고로 저희 앞에 있는 유리는 특수한 재질입니다, 전하.”
레일라가 미리 알아 본 정보를 말해 줬다.
“여기선 뭘 해도 관객석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군.”
레일라의 말에 아나시스 황태자가 웃었다. 그는 레일라의 토끼 같은 모습을 보며 싱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공녀를 이끌고 자리로 갔다.
자리는 공녀, 아나시스, 레이니어, 레일라. 이런 순서로 앉게 되었다.
의자는 두 개였다. 기다란 의자는 마치 둘씩 앉으라는 듯 되어 있었다.
“술을 좀 드시겠습니까?”
“좋네요.”
레일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난 레이니어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공녀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레일라.”
“그럼 전하께서는 어떤 게 드시고 싶으세요?”
“나도 사양하지.”
아나시스 황태자는 레일라가 일부러 제게 두 번째로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공녀에게 잘해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듯 굴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글픈 걸 숨기는 듯 웃는 모습 때문에 심기가 계속 불편했다.
“저쪽으로 가면 VVIP 전용 안내원이 있더군요.”
“그렇군요. 한번 가 봐요.”
레일라는 레이니어의 말에 적당히 동조하며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실상은 일부러 둘만 있는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다.
둘이 밖으로 나가서 문을 열고 안내원을 보자마자 말했다.
“저기 지금 황태자 전하와 바이마르 공녀 단둘이 계시니 절대 방해하지 말아요. 절대요.”
“예, 알겠습니다.”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닫은 뒤 술이 잔뜩 진열된 진열장 근처로 이동했다.
레이니어는 그런 그녀의 허리를 안듯이 팔로 감싸고 있었고.
“페르난도 저하께서는 뭘 드실 건가요?”
“저는 다른 술을…….”
“입술. 이런 말이면 금지요.”
“…….”
“이런 아저씨 같은 말장난은 어디서 배운 걸까요?”
“천재라고 했잖습니까. 배우지 않아도 아니까요.”
레일라는 그의 말에 픽 웃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곧 오페라가 시작할 즈음이라 직원들은 전부 자리에 가 있어야 했다.
VVIP실은 종을 울리기 전까진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술이 든 진열장도 VVIP실에 있었기에 그랬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아까 황태자와 공녀가 있던 VVIP석이 나온다.
“이제 몇 번 남았죠, 우리?”
“‘우리’는 이제 많이 남았죠. 한 만 번 정도?”
“350번대였던 건 기억해요. 사기꾼.”
레일라가 술병을 꺼내서 안아 들자 레이니어가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두꺼운 팔 사이로 레일라를 가두며 웃었다.
“위협적으로 느껴지십니까?”
“위협적인 외모긴 하네요. 그런데 가면을 써서 잘 모르겠기도 하고.”
레일라가 놀리듯 말하자 레이니어가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언제 봐도 놀라울 정도로 찬란한 미모였다.
“저는 아가씨가 저를 이렇게 봐 줄 때마다 가슴이 뛰더군요.”
“이렇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못 들은 걸로 할게요.”
“피는 안 필요하십니까?”
그녀는 그의 말에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레이니어가 픽 웃으며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대답하면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그녀의 근처에 있었다.
“피가 없는데요.”
레일라는 키스할 듯 가까우면서도 말캉해 보이는 입술에서 피가 나지 않자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레이니어가 잠시 떨어지더니 제 손을 깨물었다. 레일라는 제 엄지를 깨물어 낸 피를 입술에 발라 붉게 만드는 그를 보고는 먼저 입술을 댔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349번이죠?”
“이럼 348번이겠군요.”
그가 다시 제 입술에 피를 발랐고, 레일라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피를 마셨다.
레일라는 그가 짓는 묘한 표정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더 바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술 틈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가 제게 장난치듯 구는 건가 싶어서 눈을 보았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밀착시키며 입 안을 탐하기 시작했다.
“읍…….”
그녀는 잠시 놀란 듯 몸을 떨다가 이내 그의 키스에 화답하듯 움직였다.
그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욕망을 자제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격렬하게 탐하기 시작했다. 더운 숨이 그녀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의 표정은 레일라를 만족스럽게 하고 있었다. 레이니어는 황홀한 듯 서글픈 표정이었다.
“저 먼저 갈게요.”
“……예.”
그는 고개를 숙였고, 레일라는 들고 있던 병을 안고선 VVIP석으로 가려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우리 자리는 여기가 아니네.’
‘그럼 저쪽이에요?’
‘어, 그러네.’
그녀는 두 목소리 중 남자 쪽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소네트였다.
‘그 새끼 정부가 있다니까!’
휴고의 말 때문인지,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소네트를 확인하기 위해 병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가서 아주 살며시 문을 열어 계단의 상황을 보았다.
“저 보닛을 좀 풀고 싶어요.”
“안 된다고 했지.”
“그럼 다시 하고 싶어요. 끈이 헐거워서 귀가 아파요.”
소네트의 대화 상대는 여인이었다.
이내 소네트가 계단 중간에서 한숨을 쉬다가 보닛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여인의 머리카락이 촤르르 흩어지며 어깨를 감쌌다.
“머리나 묶어.”
“네, 감사해요.”
그렇게 분홍 머리카락의 여인이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제 머리를 묶었다.
그러자 소네트가 그녀의 머리 위로 보닛을 씌우고선 묶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자를 쓰며 말했다.
“이제 가지. 우린 저 옆이야.”
“네.”
그렇게 여인은 소네트보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꽤 가깝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레일라는 문득, 소네트의 팔에 묶인 손수건이 제게서 가져갔던 거라는 걸 깨닫고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역시 애인이 있나 보네요.”
레일라는 제 뒤에서 그렇게 말하는 레이니어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뜬 것 같아서 이상했다.
“기뻐 보이네요.”
“그럴 리가요. 저는 아가씨가 걱정돼서 슬픈 상태입니다.”
“그럴 거면 입부터 가려요.”
레일라는 제 화장을 먹어서 붉어진 레이니어의 입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고에게 몇 번 들었던 일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눈으로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소네트가 제게 보였던 모습은 역시 가짜였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시베르에게 넘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 모든 전개가 원작과 너무 달라져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약혼자가 다른 여인이랑 있으니까요.”
“그러는 아가씨는 다른 사내와 있으시죠.”
“저는 비즈니스죠.”
“비즈니스로 키스까지 하시다니. 앞으로 남편 되실 분이 속이 좀 썩겠습니다.”
“레인은 아닐 테니 다행이죠?”
그러자 레이니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속상해도 좋으니 그런 남편도 해 보고 싶군요. 제가 잘하면 한눈도 안 파실 거 압니다.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죠.”
그녀는 그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내 이해하고는 못 들은 척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술병을 안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레이니어가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놀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기분 나쁘게 하려던 것도 아니고요.”
“왜 갑자기 사과예요?”
“제가 너무 기뻐서 잠시 선을 넘었습니다.”
레일라는 그의 말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에게 말했다.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네.”
“그런데 제 약혼자가 다른 여자가 있다니까 왜 기뻐요?”
“소네트 브루스에게 아가씨는 너무 과분하거든요.”
레이니어는 또 말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들고 있던 술병을 가져가며 가면을 다시 썼다.
“레인은 저를 과대평가하네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홀로 먼저 VVIP석으로 가 버렸다. 레이니어는 기쁜 걸 감추지 못하는 사람처럼 다른 곳을 보며 표정을 숨기려 하고 있었다.
“제 눈은 정확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