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0화
레일라는 오페라를 보는 내내 찝찝했다.
소네트가 정말로 정부가 있었다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납득이 가는 것도 이상했다.
하긴 그러니까 몇 번 보지도 않은 제게 약혼하자 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몇 번 만나 보지 않은 상대에게 제 진심을 다 주고 미래를 약속하고 약혼까지 했던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녀는 사랑을 했다기보단 절박함이 더 강했다.
이전 생에서의 레일라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득했었다. 죽고 싶지 않았고, 그러려면 백작가의 사람들에게 거슬려선 안 됐다.
그렇기에 피를 토하면서도 공부를 하고 지식을 익혔다. 그래야 사람들이 대화를 해 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공부하고 노력하고 아픈 걸 숨기려 해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그녀를 더 우습게 여겼었고.
상대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모른 척해야 했다. 그 상대가 떠나는 게 두려워서.
그녀는 그때마다 진심이었다. 상대를 사랑한 건지는 지금 와서는 모호했지만, 그때 당시엔 그랬다. 어쩌면 그녀는 내면에서 그렇게 금방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소네트에 대해 단정 짓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딜 가지?”
레일라는 오페라가 중반부쯤 되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다 마셔서요. 더 받아올게요.”
“시종을 시키지.”
아나시스가 레일라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레일라가 해사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먼저 나갔다.
그녀는 그렇게 술이 든 찬장으로 향해서 한 병을 꺼내 그대로 문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소네트와 그 정체 모를 여인이 갔던 방향으로 갔다.
소네트도 정체를 숨기고 있었으니 VVIP석에 있을 것이다. VVIP석은 총 두 개. 그중 하나를 레일라 일행이 이용하고 있었으니 다른 하나는 바로 옆에 있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 옆의 VIP석은 옆 칸의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으니까.
레일라가 살금살금 다른 VVIP석으로 향했다. 그러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티켓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안에는 이미 두 사람의 자리가 차 있었다. 그래서 두 명의 직원은 레일라가 잘못 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레일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분홍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을 보니, 반대쪽 VVIP석을 예약한 황태자 일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오페라 극장에선 황태자가 온다는 말 때문에 직원들이 오픈 세 시간 전부터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요.”
레일라가 그렇게 티켓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역시나라는 표정으로 그들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 직원이 고객님의 이동에 도움을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곤란했다. 레일라는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기에.
-딱!
그 순간 직원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레일라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도둑고양이 놀이라도 하시는 거랍니까?”
그곳에는 레이니어가 서 있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알려 주면 파혼하실 건가요?”
“파혼하면 알려 주나요?”
“당연하죠. 파혼하신다면 물어보는 모든 걸 대답해 드리죠.”
레일라는 웃으며 다가오는 레이니어를 보며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아직 레이니어를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행동은 매번 헷갈리게 했고. 자신과 키스하는 것도 좋아하면서 왜 감정은 아니라고 하는 건지.
어쩌면 정말로 소네트에게 원한이 있어 이런다고 보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게 볼일이 끝난 뒤엔 피도 안 줄 것이고, 저렇게 봐 주지도 않겠지.
“사양할게요.”
그녀는 간단히 거절하고는 이내 문을 열었다. 그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뜬 눈으로 잠이 든 건지 직원들은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레일라는 그런 그들 사이로 당당하게 문을 열고선 들어갔다.
이내 VVIP석이 있는 곳 근처까지 걸어가기 위해 구두도 벗어 손에 들고 한 팔에는 럼주를 안은 채 걸었다.
그런 그녀를 웃는 듯 보이지만, 실상 전혀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선 따르는 사람은 레이니어였다.
“아…….”
“또 왜 그래?”
“저, 눈에 뭐가 들어갔어요. 좀 빼 주시겠어요?”
“그냥 기다리면 알아서 빠질 텐데 굳이 그래야 해?”
소네트의 목소리는 묘하게 불친절했다.
“네, 빼 주실 순 없을까요? 눈이…… 너무 아파요.”
소네트의 일행인 여자는 소네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소네트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러고는 ‘후!’ 하고 아주 강렬하게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제야 괜찮아진 듯 환하게 웃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고마워요.”
“오페라나 봐.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한 거잖아.”
“네, 정말 감사해요. 너무 기뻐요. 이렇게 같이 와서 더요.”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말투 때문인지 레일라는 그녀가 정말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연기할 때의 목소리와 비슷해서.
어쩌면 소네트가 제게 반한 듯 굴었던 그 연기는 실상 정부라는 저 여자를 보고 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의 힘이 풀렸고.
-쨍그랑!
들고 있던 럼주 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그와 동시에 레이니어가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는 레일라가 다치지 않는 데에 온 신경을 썼기에, 유리 파편이 저 멀리로 튀어 나가게 했다. 그러느라 기척을 숨기던 마법은 순간적으로 풀리고 말았다.
“누구야!”
“아…….”
레일라는 빨리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맨발로 달리기엔 바닥에 유리가 너무 많았기에 구두를 재빨리 신어야 했다.
그녀가 구두를 신고 움직이려던 찰나.
“레일라?”
소네트에게 들켜 버렸다.
“아…… 소네트. 사실 내가 저, 저기 VVIP실로 가야 하는데…….”
“……레일라.”
“실수로 이리로 와 버렸네. 미안.”
레일라는 제게 시선이 돌아오게 하며 소네트가 레이니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 했다.
“날 미행한 거야?”
“……아니, 정말 실수야.”
레일라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녀는 바닥을 나뒹구는 럼주의 파편이 구두에 부서지는 게 느껴져 온몸이 긴장했다.
“그보다 그분은 누구야, 소네트?”
“레일라, 감히 날 미행한 것도 모자라 내 일행도 추궁하는 거야?”
레일라는 소네트의 차가운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아니, 나는…… 네 약혼자기도 하니까. 네가 누구랑 있는지 궁금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행이라니. 실망이야, 레일라.”
“소네트, 나는…….”
“나가 줘.”
“말이 심하시군요.”
그 순간, 애써 감춰 주려던 레일라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레이니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정체를 드러내며 말했다.
“당신…….”
소네트는 어두운 불빛을 등지고 나오는 레이니어를 보고 잠시 몸이 경직되었다.
레이니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대체 왜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오금이 저리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그 위의 다른 무언가, 상위 포식자의 먹이로 던져진 기분이 들었고.
“당신은 왜 여기에…….”
“저를 아십니까?”
레이니어가 웃으며 말하자 소네트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귀족도 아닌 평민이 어떻게 이런 고급 오페라를 보러 온 거지?”
“저는 귀족이 맞고요. 그러는 당신은 고작 소후작이면서 왕세자인 제게 말이 무례하군요.”
“왕세자?”
“루텐베르크 왕국의 페르난도입니다.”
그 순간, 근래에 들렸던 루텐베르크 왕세자에 대한 이야기가 소네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 그리고 생각보다 박색인 얼굴을 가리기 위해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쓴다고 했다.
거기에 그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 취향이라고 했다. 심지어 남자를 찾는 빈도가 더 높다고도 했지.
그 순간 소네트야말로 불쾌감을 누그러뜨렸다. 레이니어인 줄 알았을 때는 적대감으로 공포도 잊었건만.
“여기에 온 건 제가 다른 VVIP실로 와 보자고 해서랍니다.”
레이니어는 충격받은 레일라의 어깨를 안고선 말했다.
“실례했군요. 저희는 그럼 저희 자리로 가 보겠습니다.”
“둘이 온 건가요?”
소네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일라, 나한테 허락도 없이 다른 사내와 둘이 오페라를 보러 온 거야?”
“둘 아니야. 황태자 전하와 공녀님도 같이 오셨어.”
“……그래.”
레일라의 말에 소네트는 다시 누그러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오지 말랬잖아. 다시 들어가.”
그때, 소네트에게 팔짱을 끼며 흘끔거리던 여인이 레일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레일라는 그녀가 자신이 같은 눈동자 색을 가졌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소네트 저 분은…….”
“지금은 설명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그는 한숨을 쉬며 제 팔을 끌어당기던 여인과 함께 다시 VVIP석으로 가 버렸다.
레일라는 레이니어가 이끄는 손에 잡혀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VVIP석으로 향할 즈음 직원들이 정신이라도 든 건지 제대로 서는 모습을 보았다.
복도에 둘만 남자, 레이니어가 레일라를 보며 말했다.
“세상엔 남자가 많습니다.”
“……무슨 뜻이죠?”
그러자 레이니어가 거침없이 말했다.
“세상엔 아가씨를 상처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을 남자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자기 목숨보다 아가씨를 귀하게 여길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레일라는 그가 말하는 사람이 그 자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