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5화
붉은 기가 도는 검정 머리카락, 그리고 우아하지만 살이 없어 비쩍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매, 거기에 레일라와 닮은 하늘색 눈동자.
“레일라?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아, 제국의 작은 태양을…….”
“인사는 됐습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가면을 쓴 사람처럼 웃으며 손짓했다.
“전하께서 레일라를 데려오신 건가요?”
“아뇨, 제가 데려왔어요. 시베르 아비에르 영애.”
바이마르 공녀가 제게 인사하지 않은 시베르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그럴 만했다. 아무리 황태자가 옆에 있더라도 공녀를 무시하고 인사하지 않은 셈이었으니까.
“바이마르 공녀님! 어머! 정말로 두 분……!”
그러나 공녀의 화는 시베르가 호들갑 떨지 않기 위해 애써 자제하는 강아지처럼 굴자 조금 누그러들었다.
“세상에! 너무 잘 어울려요!”
“그, 그래요?”
바이마르 공녀가 저도 모르게 기뻐하며 웃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네! 그나저나 레일라와 함께 와 주시다니, 감사해요. 우리 레일라가 조금…… 부족하지만 착한 아이예요.”
시베르가 마치 부족한 동생을 부탁하는 착한 언니인 듯 말하자 바이마르 공녀의 표정이 다시 나빠졌다.
“레일라는 부족하지 않아요. 제겐 짧은 시간이지만 절친해진 영애고요. 그건 그만큼 우리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제가 말하는 부족함은 사회 경험을 말하는 거랍니다! 레일라가 어릴 적부터 아파서요. 밖으로 자주 나오질 못했답니다.”
시베르는 수습하듯 말하며 아나시스 황태자를 흘끔 보았다. 레일라는 그런 시베르가 자신이 아나시스 황태자를 갖고 싶어 하는 건지 확인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혼은 이미 소네트와 했고, 세간의 소문도 잘 퍼진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레일라가 정말로 아나시스 황태자를 바이마르 공녀와 이어주기 위해 이러는 것 같다고 판단하자 시베르의 눈은 다시 평소처럼 바뀌었다.
“레일라에게 제가 사교계에서 있던 일이나 그런 것들을 매일 알려 주곤 했어요. 그렇지, 레일라?”
레일라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웃기만 했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이 대화가 지루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선 말했다.
“어머니가 기다리실 테니, 이쯤하고 가죠.”
“예, 전하.”
그렇게 시베르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이동할 수 있었다.
티파티는 정말이지 화려했다.
결혼하지 않은 영애와 영식은 아주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이미 황실에서 한자리하는 대신들이었고, 대부분이 귀족파였다. 그리고 수장인 황후에게 우호적인 중립파.
레일라는 그 사람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레이니어가 훗날 황제가 된다면 이들은 제 고객으로 쓸모없을 인간들이었으니까 기억해 뒀다가 거르는 게 좋겠지.
원작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게 있었다. 그것은 레이니어가 황제가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원작에서도 이맘때쯤에는 이미 레이니어의 복권은 기반이 다 잡혀 있었었다.
아비에르 백작저에 온 것도 여유가 있어서일 게 뻔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레이니어의 복권은 멀지 않았다.
레일라는 레이니어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필이면 제게 맨몸을 보여주며 청초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서.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자꾸 제게 유혹적으로 굴었다. 예전이라면 쉽게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 키스한 후부터는 그것도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처음이라더니 키스는 너무 잘했다. 할 때마다 마치 제 머릿속을 읽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하아.”
그녀는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또 레이니어 생각을 했다는 게 분해서 일부러 입을 열었다.
“소네트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레일라는 시베르가 제 주위를 서성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시베르가 이곳에 올 수 있던 이유도 보였고.
제렌 남작은 아비에르 백작, 그러니까 레일라의 아버지의 보좌관이었다. 그는 보좌관이면서도 보좌관의 일만 하지 않고 중앙 귀족으로 진출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건 제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중앙 귀족이 되려면 줄을 잘 서야 했다. 귀족파에 섰다가 아나시스 황태자가 황제가 못 된다면 전부 쓸려나간다.
반대로 황제파에는 미는 황자가 없었다. 몇 년 전에는 대외적으로나마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현황후인 라미엘라 황후가 전부 암살해 버렸기 때문에.
황위 계승권이 남은 사람은 아나시스 황태자와 살아 있다는 소문만 있을 뿐, 실제로 생존을 확인한 이는 없는 레이니어뿐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이 귀족파로 몰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일라는 제 아버지가 직접 오지 못하고 제렌 남작을 시킨 것도 이해가 됐다. 제렌 남작이 먼저 귀족파에 눈에 든다면 그의 상사인 백작은 더 쉽게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약해져 가는 황제파가 언제 어떻게 판을 뒤집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귀족파에 발을 걸쳐두고 싶었기에 부하를 보낸 것이겠지.
그리고 황후는 그런 그들의 허영심을 이용해 중앙 귀족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려는 척 귀족파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비에르 백작가가 아무리 백작가 중에선 평범하다 해도 귀족이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레일라가 루텐베르크 왕세자와 동업하는 몬트라는 살롱이 얼마나 잘 되는지도 모를 수 없었고.
레일라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녀의 언니라는 자리. 그 모든 게 합쳐져서 시베르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소네트가 요새 서운해하더라, 레일라.”
시베르는 역시 레일라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
“응. 네가 요새 너무 바빠서 안 만나 준다고.”
“그렇구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나랑 자주 만나. 네 얘기도 많이 하고. 시간도 자주 보내고 해.”
“그렇구나. 우리 사실 어제 봤는데.”
레일라가 지지 않고 말하자 시베르의 표정이 쌜쭉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자애로운 언니인 척하며 말했다.
“응, 알아. 소네트의 동생을 본 거지?”
레일라는 그 순간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나는 그녀가 소네트에게 직접 들었거나, 혹은 휴고 로날드에게 들었거나.
후자라면 휴고가 알면서도 제게만 거짓말을 한 것이고, 전자라면 둘의 관계가 수상했다. 자신보다 언니에게 먼저 말하다니.
“어. 어떻게 알았어?”
그래서 레일라가 물었다.
“사실 소네트가 그 일로 내게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한다고 했었거든. 내가 사실대로 말하라고 조언했는데 그 말을 듣고 너한테 말한 것 같더라고.”
“아, 그렇구나.”
레일라는 묘하게 가슴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제 주위 사람이 시베르에게 넘어가는 일은 흔했다. 그래서인지 레일라는 누구에게도 정을 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전 남자들처럼 시베르에게 휘둘리는 소네트를 봐도 사실 그리 상처받진 않았다. 불쾌하긴 했지만.
원래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는데 화가 날 게 있을까?
“잘됐네. 소네트가 언니와 친해지면 나야 좋지. 어차피 가족이 될 사람인데.”
레일라의 말에 시베르도 싸늘하게 웃으며 노려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묘한 기류를 읽은 윌리엄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제렌 남작은 파트너인 시베르를 두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기에, 이쪽을 전혀 보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녀는 아나시스 황태자와 즐기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먼 자리로 그를 데려갔고.
이내 시간이 되자.
“늦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
라미엘라 황후가 티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일이 고돼서 늦었지 뭡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을 볼 생각에 힘을 내서 처리하고 왔답니다?”
황후가 격식 없이 말하자 주위에 있던 귀족파와 귀족파에 우호적인 중립파 귀족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으며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저는 저만큼 뛰어난 제 아들 아나시스가 부디 가장 합당한 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그 말인즉슨, 황태자 아나시스가 황제가 될 때까지 잘 모시라는 말이었다. 자기애적 칭찬은 덤이었고.
“도와주실 거죠, 여러분?”
그러자 주위에 있던 극성 귀족파의 수장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들도 박수를 쳤는데, 장갑을 낀 손과 끼지 않은 손의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그렇게 티파티는 성황리에 시작이 되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레일라는 문득 시선이 느껴지자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레일라는 황태자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그러자 그가 더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공녀 쪽으로 몸을 돌렸고.
레일라는 그가 대체 왜 저러나 싶었으나 지금 그녀는 옆에서 짜증나게 구는 시베르만으로도 벅찼다.
“브루스 후작님, 저희 레일라를 잘 부탁드려요.”
브루스 후작도 역시 귀족파의 측근답게 와 있었다. 다만 옆에 있는 것은 소네트가 아니라 제 부인이었고.
그리고 브루스 후작 부인은 레일라를 아주 고깝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까 레일라가 그러던데, 소네트가 안 와서 너무 아쉽다고 하지 뭐예요?”
“허허. 그렇구나.”
어떻게 보면 브루스 후작에게 빨리 자리에서 물러나고 소네트에게 작위를 넘기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귀족파의 측근들이 초대받은 자리였으니까.
레일라가 재빨리 대응했다.
“요새는 소네트와 조금만 떨어져도 너무 답답해요. 저 정말 소네트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브루스 후작의 경직되어 억지로 웃던 입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우리 소네트가 그리 좋으냐?”
“네, 정말 많이요. 저는 소네트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레일라가 시베르를 약올리듯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날 시베르는 몰랐다. 제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레일라는 더 이상 자신이 아는 멍청하고 가녀린 이복동생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