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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6)화 (76/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6화

“치기 어린 사랑으로 결혼하려는 거라면 한심하네요.”

브루스 후작 부인이 레일라를 조롱하듯 그렇게 말했다.

“듣기로는 약혼도 이미 여러 번 파했다던데. 우리 소네트와도 그렇게 될지 어떻게 알아요, 여보?”

후작 부인의 말에 브루스 후작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레일라는 후작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원작에서 언급되는 부분이 거의 없었으니까. 원작에서는 소네트가 후회하기 시작할 즈음에 그는 이미 작위를 넘겼었다.

그때는 소네트가 결혼하지 않아도 후작이었던 것 같았는데. 그 이유도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았었다.

“그 사람들과 소네트는 달라서요. 저는 누구보다 소네트를 믿어요.”

그러나 레일라는 말로 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져 주는 일은 있어도 지지 않아도 될 일에 져 줄 필요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약혼을 파했던 건 그 사람들도 저도 맞지 않아서였고요. 그리고 저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에 그렇게 된 거겠죠?”

브루스 후작은 레일라의 둥근 말투를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제 아내가 얼마나 뾰족하게 말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듣기로는 너는 조금만 잘해 주면 약혼한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아이히만 남작의 아이도 가졌었다지?”

“저는 순결합니다. 증명할 수 있도록 검사라도 받아다 드릴 수 있답니다.”

레일라는 온화하게 웃으며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은 레일라가 귀족답게 말하는 게 고까웠다. 고상한 척하며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기에.

“흥. 안 그래도 곧 검사받으라는 요청을 하려 했는데 잘됐구나.”

“저야말로요.”

레일라가 다시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화하자 이번엔 브루스 후작이 말했다.

“소네트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더냐?”

“소네트는……. 음…….”

레일라는 소네트의 좋은 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레스를 지원해 주는 점이 있었다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고.

제 방 앞에서 휴고와 나눴던 대화, 그리고 제게 처음 세레스에 대해 숨겼던 것과 계속 시베르를 만나는 걸 보면 좋은 사람은 분명 아닌데.

“안 좋은 부분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좋은 점이 너무 많아서 뭘 말해야 할지 곤란하네요.”

“허허허. 그럼 나쁜 점을 말해 보겠느냐?”

브루스 후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레일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너무 잘생겼어요. 소네트가 이렇게 잘생겼다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똑같겠죠. 그래서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려요.”

“하하하.”

브루스 후작이 레일라의 말에 기껍게 웃었다. 그는 레일라의 표정을 보며 안도하듯 말했다.

“그놈이 철이 좀 없어. 여인도 가까이하질 않아서 잘 모를 때도 많을 게다.”

“괜찮아요. 소네트는 언제나 제게 최선을 다하는걸요.”

“그래. 그래도 네가 서운할 수 있단다. 그때마다 가르쳐주렴. 우리 소네트는 어릴 적부터 사내놈들이랑만 지내서 여인들을 잘 모른단다.”

그러자 레일라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저는 소네트의 모든 부분이 정말 좋아요. 서툰 부분까지도요.”

레일라의 발그레한 표정에 후작은 기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고. 시베르는 웃고 있었지만 싸늘하게 눈을 뜨며 레일라를 노려보았다.

시베르는 그 순간 저와 똑같은 표정으로 레일라를 보는 후작 부인을 발견했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묘한 동질감과 함께 적대감이 완화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적대감은 오롯이 레일라에게 향했고.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나시스 황태자가 어느새 레일라의 근처로 왔다.

“전하? 공녀님은요?”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턱짓했다. 그 턱짓이 가리키는 곳에는 라미엘라 황후와 그 측근들이 바이마르 공녀를 둘러싸고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전하도 저기 계셔야죠.”

레일라는 아나시스 황태자가 왜 제 쪽으로 와서 대화에 끼어드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왜요? 제가 끼면 안 됩니까?”

아나시스 황태자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여전히 예의 바른 척하기 위해 존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이상하게도 태도만큼은 예의 바른 모습과 거리가 있었다.

“아뇨. 저야 너무 기뻐서 그렇죠.”

그러나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자 황태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언니, 저 멀리로 앉아. 전하 앉으셔야지.”

“어? 아, 어…….”

시베르는 레일라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옆으로 비켜야 했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황태자가 앉겠다는데 어떻게 뭐라 할 수 있을까.

“전하는 루텐베르크 저하 옆에 앉으시면…….”

“페르난도, 옆으로 가.”

“네.”

루텐베르크 왕세자로 위장한 윌리엄은 옆으로 한 칸 밀려났다. 결국 레일라의 파트너 자리에 아나시스 황태자가 앉았다.

“하던 얘기, 저도 끼고 싶군요. 마저 해 보시겠습니까?”

아나시스 황태자의 말에 브루스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를 가까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매일 그러지 않습니까.”

“뵐 때마다 영광이죠.”

아나시스 황태자는 제게 깍듯한 브루스 후작의 태도에 또 기분이 나아져 갔다.

“사실 저희 며느리가 될 아이이기에 제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답니다.”

“그렇군요.”

“맞아요. 사실 제가 소네트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씀드렸어요.”

그러나 두 사람의 말에 나아져 가던 황태자의 기분은 또 바닥으로 처박혀 그를 억지로 웃게 만들고 있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 웃느라 눈꼬리는 내려가 있었으나 눈썹은 화난 사람처럼 좁아져 있었다.

“그런가요? 얼마나 좋아하는 겁니까?”

“소네트가 좋은 사람이라 좋아하는 거고……. 저는 사실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그래야 매일 볼 테니까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소네트를 보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레일라가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히며 연기하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삐딱하게 그녀를 보았다.

“아, 그렇군요.”

브루스 후작은 한술 더 떴다.

“소네트와 네가 얼른 손주를 안겨주면 좋겠구나. 나도 결혼식을 당기는 건 언제든 찬성이란다.”

“정말요, 아버님?”

레일라는 어느새, 아직 법적으로 얽히지도 않은 브루스 후작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론이란다. 결혼 선물로 아이를 데려와도 좋단다. 그리고 검사는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우리 소네트가 좋다면 네가 천민이라도 환영할 거란다.”

“아버님…….”

“나는 그 아이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브루스 후작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소네트에게 부채감이 컸기에.

“엄연히 제국에도 법이 있는데 혼인 전에 아이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브루스 후작.”

오히려 그들의 단란한 듯 보이는 분위기를 깬 것은 아나시스 황태자였다.

“아……. 역시 그렇겠죠?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합니다, 아버님.”

“아니란다. 괜찮단다. 저야말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아버님. 저야말로 너무 생각이 없었어요. 저도 소네트를 닮은 아이라면 빨리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서요.”

“허허.”

브루스 후작은 그동안 손자를 바랐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 기뻤다. 그래서 아나시스 황태자 앞인 걸 잊을 만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브루스 후작이 사실 잘 모르기도 했다. 아나시스 황태자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어차피 귀족파의 실세는 황후였고, 브루스 후작은 황후의 신임 받는 가신이었다.

황후의 사가인 펜들턴 공작가에서도 인정하는 측근이었고, 그런 그가 다른 귀족들처럼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조아릴 처지도 아니었기에.

“어떻습니까. 전하의 명령이라면 결혼식을 당기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브루스 후작이 부탁하듯 말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가 저보다 제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왜 그걸 내게 말하는 겁니까?”

“그야 전하께서 말하신다면 황후께서도 승낙해 주실 테니까요.”

브루스 후작은 훗날 아나시스 황태자가 황제가 되더라도 그 뒤에 있을 라미엘라 펜들턴의 힘은 여전할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들은 펜들턴 공작가를 두려워했다. 그들의 힘과 정보력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으니까.

그리고 그 공작가의 오른팔인 브루스 후작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자를 너무 밝혀서 그렇게 안 보일 뿐이었지.

“아니면 펜들턴 공께 직접 부탁해도 되고요.”

브루스 후작의 말에 아나시스 황태자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머니께 말해 보죠.”

그러나 아나시스 황태자는 정말로 말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보였다.

“레일라.”

“네, 전하.”

“저쪽으로 같이 가지. 둘이서 할 말이 있는데.”

“네, 전하.”

레일라는 그가 다시 웃길래 기분이 좋아진 줄 알았다. 그렇기에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사람들을 지나 구석 쪽으로 갔다. 테이블 위의 음료를 고르는 척하며 황태자가 먼저 말했다.

“결혼은 왜 서두르려는 거지?”

순간 레일라는 어느새 황후가 브루스 후작과 자신의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웃는 걸 보았다.

“저도 빨리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말이 나온 것뿐이에요.”

레일라의 말에도 여전히 분노가 삭혀지지 않았던 아나시스 황태자는 그녀의 눈이 또 자신이 아닌 제 어깨 너머의 무언가에 향하는 걸 깨닫고는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웁……!”

황후가 차를 마시던 잔을 떨어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꺄아아악!”

“누가 차에 독을 탔나 봐요!”

그 순간, 레일라는 황후의 옆에 앉아 있던 윌리엄의 표정이 레이니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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