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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7)화 (77/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7화

“어머니!”

아나시스 황태자가 당황한 듯 그대로 테이블로 달려갔다.

“욱, 컥……!”

라미엘라 황후는 피를 토하면서도 제 아들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일라도 당황해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궁의를 불러오세요!”

레일라가 소리치고 윌리엄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는 레이니어가 아니라 본래의 숙맥인 윌리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당황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디에 독이 들어 있었죠?”

레일라가 물어보자 저 너머에 넘어진 찻잔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갔다.

“어머니! 정신 차리십시오! 어머니!”

“아나시스…….”

레일라는 황후가 여기서 죽는 걸 레이니어가 바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녀가 몬트에서 비정상적으로 제 편을 들었던 때 보았던 그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정말.

레이니어가 독살 같은 치졸한 방법을 쓴 걸까?

레일라는 당황해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윌리엄도 당황하면서도 자신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차를 토하게 해야 합니다.”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엎드린 황후의 등을 퍽퍽 두들겼다.

“우욱……!”

황후는 마셨던 차를 피와 함께 토해냈다.

“황후 폐하!”

겁에 질린 건지 당황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궁의들이 달려와 황후의 상태를 살핀 뒤 말했다.

“침실로 옮겨야 합니다.”

“어머니는 괜찮은 건가? 뭐에 중독된 거지?”

“정말 독인가요?”

“세상에.”

“누가 감히 황후 폐하를……!”

레일라는 걱정하는 듯 제 어머니를 꼭 잡고 있는 아나시스를 보자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전하, 얼른 황후 폐하를 침실로 모시세요. 그리고 궁의. 얼른 어떤 독인지 찾아내세요. 그리고 빨리 해독제를!”

레일라는 오래도록 독에 중독되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이 상황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아나시스 황태자가 가지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제 손바닥을 찔렀다.

그러더니 제 어머니의 입을 벌리고는 그 안으로 피를 가득 떨어뜨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이 입술을 타고 흘러넘칠 정도였다.

“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의 숨이 돌아왔다.

“아……. 황족의 피가…….”

레일라는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여전히 불안해하다가 이내 제 어머니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자 진정했다.

상황이 진정되자마자 황태자는 레일라를 확인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정말로 안도한 듯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궁의! 전하의 손을 치료해 주세요!”

레일라는 그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렇게 소리쳤다.

“뭐 하는가, 궁의.”

그녀의 말을 바이마르 공녀도 거들었다. 궁의는 이내 독이 아니라 황태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갈팡질팡하다가 붕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놓거라, 아나시스.”

“어머니……. 하지만 방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니.”

황후는 싸늘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조금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내 멀쩡한 사람처럼 일어났다.

황족의 피는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다. 황후는 후천적으로 황족이 된 사람이지, 황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아끼는 아들, 아나시스 황태자는 황족의 피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감히 나를 독살하려 든 괘씸한 자가 누군지 찾아야겠구나.”

황후는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았다. 그녀의 상의에는 핏자국이 둥그렇게 남아 있었다.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하겠습니다, 아비에르 영애.”

“네?”

“그대가 기지를 발휘해 주었기에 궁의들이 빠르게 왔습니다.”

“아, 네. 과찬이십니다.”

레일라는 아까까지 격식 없이 얘기하던 황후가 황후답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내리깐 목소리로 얘기하는 상황이 어색했다.

“아나시스, 역시 내 아들이구나.”

“어머니……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방으로 가시죠.”

“아니. 나는 이 일을 여기서 처리해야겠구나.”

황후의 말에 아나시스 황태자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마치 열 살짜리 아이가 된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까 제가 마신 차에 독이 들었다고 소리친 사람이 누구입니까?”

황후의 말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시베르 옆에 있던 제렌 남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 접니다.”

“제렌 남작이로군요.”

황후가 턱짓하자 궁의가 재빨리 은으로 된 막대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쓰러진 찻잔에 남은 차 위로 그것을 찔렀다. 그러자 끝부분이 녹이 슬 듯 변하는 걸 보고는 황후에게 말했다.

“차에 독이 들었던 건 확실합니다.”

그러자 황후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차는 저와 다른 테이블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셨을 때는 멀쩡했습니다, 황후 폐하. 심지어 아나시스 황태자 전하께서도 드셨습니다.”

레일라는 황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실상은 윌리엄의 레이니어 같았던 표정이 떠올라서였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에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그랬다.

레이니어는 황족이었다. 그리고 아나시스 황태자도 황족이었고.

레이니어는 원작에서도 그렇고 지금 그녀가 겪는 현실에서도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런 그가 통하지도 않을 독을 사용해 황후를 죽이려 했을 리는 없었다.

레일라는 당황해서 그를 잠시 의심했던 순간이 창피해 없던 일인 듯 머리에서 지우려 했다. 만능 해독제가 근처에 있는데 범인은 대체 왜, 굳이 독살을 했을까.

그렇다면 범인은 아나시스 황태자의 능력을 직접 본 적 없는 사람일 것이다.

“범인은 중앙 귀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황후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레일라의 말에 픽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아비에르 영애?”

“저는 아나시스 황태자 전하의 능력을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은 황족의 피로 해독이 된다는 걸 그저 소문으로만 여깁니다.”

“그리고요?”

황후가 흥미롭다는 듯 레일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혹시 어떤 독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레일라의 말에 황후가 턱짓했다. 그러자 궁의가 입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벨라돈나 독입니다, 황후 폐하.”

“벨라돈나라면 화살촉에 쓰일 정도로 강력한 독이죠. 그걸 쓸 줄 안다면 꽃에 대한 지식도 해박한 사람일 겁니다.”

레일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그, 그럼 레일라. 네가 범인 아니니?”

다만 그녀의 생각은 시베르의 말에 의해 끊겼다.

“무슨 말이죠, 시베르 아비에르 영애?”

황후는 둘이 배다른 자매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둘의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알고 있었고.

“사실 아까 황후 폐하께서 앉아 주신 그 자리는 레일라의 자리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레일라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뭐든 하는 아이라서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자세히 말해 보아요, 영애.”

시베르는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울상을 짓고선 말했다.

“어쩌면 레일라가 스스로 마시려던 독을 황후 폐하께서 마신 게 아닐까 합니다.”

“감히 제가 여는 티파티에서 그런 짓을 하려 했다는 겁니까?”

“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전에도 이런 짓을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레일라 아비에르 영애?”

황후의 싸늘한 목소리에 레일라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독을 넣은 사람이 제렌 남작이라 생각했다. 그는 황실로 납품하는 화훼 사업에 눈독을 들일 정도로 커다란 화훼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꽃이 가진 맹독에 대해 잘 아는 사람, 거기에 중앙 귀족이 아니면서 중앙 귀족에 들고 싶은 사람은 제렌 남작밖엔 없었다.

비록 아비에르 백작의 보좌관이었지만, 그는 언제든 제 아버지를 배신할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모함입니다.”

“그럼 레일라.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니? 너는 황후께서 쓰러지자마자 차를 토하게 하려 했어. 이건 대체 뭐니?”

시베르가 추궁하듯 물었다.

레일라가 그것을 아는 이유는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인어의 눈물〉이란 독을 복용해서였다. 그녀는 지난 생에서 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먹었던 독을 토해 내곤 했었다.

그게 의외로 효과가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건 기본적인 상식이니까요. 누군가 독을 마셨다고 소리쳤으니 토해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일라는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는 아나시스 황태자도 보았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정말 제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레일라의 말에 시베르가 이제는 웃는 걸 숨기지도 않고는 말했다.

“전하께 잘 보이고 싶었던 거겠지요. 안 그래도 레일라가 하는 사업에 전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성황을 이루고 있지 않던가요?”

시베르는 주위 사람을 설득하려는 듯 입을 열었고.

“이 참에 전하께서 독을 마신 레일라를 구해 줬다는 소문까지 난다면 몬트는 더 날개가 달린 듯 흥하겠죠.”

레일라는 그녀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나 봐?”

“솔직하게 말해, 레일라. 네가 잘못한 거 아니니?”

그리고 시베르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 일은 아비에르 백작가와는 무관합니다! 레일라만 벌해 주십시오!”

그러자 레일라가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이 일의 범인을 밝혀 낸다면 황후 폐하께서 제게 상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겠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레일라는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든 뒤 시베르를 하찮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일의 공범이 시베르 언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이용한다면 백작가도 제 수중에 떨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한 레일라는 웃지 않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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