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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8)화 (78/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8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나시스 황태자 전하께 여러모로 도움을 받는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전하의 능력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까는 당황해서 잠시 잊었지만요.”

레일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나시스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죠, 전하?”

“……그래. 레일라는 내 능력을 알고 있어. 내가 직접 말했으니까.”

그의 말에 황후는 턱을 당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누가 범인인 건지 찾으려는 듯.

“그런 제가 독을 사용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죠.”

“네가 직접 독을 마시고 황태자 전하의 주의를 끌려던 거겠지!”

“언니, 그런다고 제게 무슨 이득이 있죠?”

“뻔하지. 소네트와 약혼하니까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온 거 아니니? 더 멋지고 더 잘생기고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

시베르의 말에 다른 귀부인들이 정말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레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레일라에 대한 소문을. 사교계의 뼈다귀나 다름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제 언니의 남자들을 가로채고 약혼까지 했다가 번번이 파혼당하는 영애. 그게 레일라였다.

그녀가 사교계에 나타나지 않고 병색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 것도 그 소문에 불을 붙였었고.

“제 가문을 걸고 말하지만 레일라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 순간, 오히려 바이마르 공녀가 나서서 말했다.

공녀는 지금껏 레일라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일을 떠올리자 시베르에 대한 적의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제 감정을 충동질하며 참을 수 없게 만든다는 걸 깨닫지는 못했다.

“이, 이 자리에서 말하기 부끄러우나 저는 레일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이마르 공녀는 제 입에서 마치 짠 듯이 말이 술술 나오고 있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했지.

“제가…… 전하를 오래도록 흠모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자 그녀의 용기에 놀란 다른 귀족들이 조용해져 적막이 흘렀다.

“이 티파티에 함께 와 준 것도 그래서입니다! 제가…… 제가 전하와 이어지게 해 달라고 레일라에게 부탁했습니다!”

오히려 그 말에 라미엘라 황후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라미엘라 황후의 사가인 펜들턴 공작가. 그리고 바이마르 공작가까지 합세한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 되어 제 아들을 황제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테니까.

“그런데 레일라가 무엇을 알고 어떻게 그런 일을 꾸미겠습니까?”

“공녀님.”

“이리 와요, 레일라. 그렇게 주눅 들지 말아요.”

레일라가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 몸을 떨자 바이마르 공녀가 그녀의 손을 잡고선 말했다.

“시베르 영애야말로 정말 너무하군요. 어떻게 자매끼리…… 감싸 주진 못할망정, 이런 일에 범인으로 지목하다니요!”

그러자 시베르가 잠시 당황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동안 레일라는 저와 친분이 있던 모든 사내들을 유혹했었습니다. 그 중 몇 번은 약혼도 했었죠. 그러다가 불리해지면 아픈 척을 했고요.”

시베르가 조용히 대답하자 레일라도 응수했다.

“언니, 나는 정말로 아팠어. 그리고 언니 눈에 내가 아팠던 게 아픈 척으로 보였었구나. 잘 알겠어.”

레일라는 불쌍한 척 눈썹을 내리깔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일의 범인은……. 제렌 남작님이라고 생각해.”

레일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제렌 남작에게로 향했다.

“무, 무슨! 저는 아닙니다!”

“황후 폐하, 제렌 남작은 저희 가문의 보좌관입니다. 거기에 제렌 남작가는 화훼 농장을 하고 있죠.”

“꽃에 대해 해박할 사람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레일라는 바이마르 공녀의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두려운데 말하는 척 몸을 떨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제렌 남작이…….”

레일라가 여전히 무서운 척 눈을 질끈 감고는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의 잔에 차를 따를 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봤습니다.”

레일라는 다시금 주전자를 보았다. 모양이 특이한 주전자의 손잡이 부분에는 버튼이 두 개 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자마자 알았다. 지난 생에서 죽기 전에 제 새어머니가 자신을 이걸로 농락했었으니까.

‘자, 이거 봐요. 제가 먹으니 멀쩡하죠?’

‘하지만 정말로 약이 이상해요, 아버지!’

‘또 그러는구나. 카르멘이 먹었을 때는 멀쩡한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더냐!’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 났다. 그땐 가족의 사랑이 뭐라고 그렇게 매달렸던 건지.

“이해가 어렵군요. 자세히 말해 봐요, 영애.”

황후의 말에 레일라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주전자를 잡았다.

“제가 오늘 이 주전자를 잡은 걸 본 사람이 있습니까?”

시베르도 잠시 위세에 눌려 대답하지 못했다.

“이 주전자는 여기 보시면 버튼이 두 개 있죠. 이 중 하나를 누르면 일반적인 차가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벨라돈나가 든 독차가 나올 겁니다.”

“세상에.”

레일라가 그것을 황후에게 건넸다. 그러자 황후가 기꺼운 기색을 숨기며 주전자를 확인했다.

“궁의.”

“예, 황후 폐하.”

황후가 손짓하자 궁의가 가지고 있던 여분의 은으로 된 침을 가져와 건넸다. 황후가 그것을 받아 들고 있던 주전자의 뚜껑을 열며 웃었다.

“확실히 두 개로 나뉘어 있군요.”

그러고는 더 많은 차가 남은 쪽에 침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은침이 부식하듯 변해 가기 시작했다.

“레일라 영애의 말이 맞군요.”

“그, 그것만으로 제론 남작님이 범인인 건 모르지 않나요?”

시베르의 말에 레일라가 재빨리 대꾸했다.

“이 일은 저희 아비에르 백작가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저 우둔한 언니가 아는 분이라고 감싸는 것뿐입니다.”

“…….”

“제발 저희 가문을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레일라가 황후에게 고개를 조아리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제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레일라라면 믿어도 됩니다, 어머니.”

“황후 폐하, 제 공녀의 지위를 걸고 맹세합니다. 레일라는 절대 황후 폐하를 독살하거나, 이 자리에서 스스로 독을 먹는 일을 꾸몄을 사람이 아닙니다.”

“저 또한 맹세할 수 있습니다. 루텐베르크의 명예를 걸고요.”

레일라는 레이니어와 비슷한 표정으로 말하는 윌리엄을 보며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나자 주위의 흐름이 바뀌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의심하던 이들이 그의 말에 호의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처럼.

“레일라는 어머니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아나시스 황태자의 말에 황후가 이제는 웃었다.

“영애를 어찌 벌하겠습니까? 저를 구하고 빠른 대처를 했죠. 거기에 우리 아나시스의 기지를 보여 주는 기회도 되었고요.”

황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싸늘하게 제론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 아니 저는……!”

“그리고 시베르 아비에르 영애. 그대는 왜 자매에게 누명을 씌우려던 거죠?”

황후의 말에 이번엔 바이마르 공녀가 의기양양해져 말했다.

“지금껏 시베르 영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진실과 거짓이 반반씩 섞여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공녀?”

황후는 순간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그 위세가 대단한 공녀를 어떻게 구워 삶았길래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 나서서 열변을 토하는 걸까 싶어서.

“지금껏 레일라가 시베르 영애의 남자들을 빼앗는다는 소문은 전부 거짓입니다.”

“공녀님.”

“레일라는 가만히 있어요. 다 괜찮을 거예요.”

공녀는 레일라를 안심시키고 말했다.

“저는 레일라와 가까워지기 전에 진실을 조사했었죠. 하지만 모든 진실은 시베르 영애가 자신과 레일라를 뒤바꿔 말한 것이더군요.”

“고, 공녀님!”

시베르가 다급하게 말하자 공녀가 더 크게 말했다.

“얼마 전 휴고 로날드 소백작이 저희 가문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무례하게 군 걸 빌었죠. 그때 모든 걸 털어놓았습니다.”

“세상에나.”

“자매끼리 어떻게…….”

“저쪽은 친자매도 아니지 않던가요?”

“아, 그러고 보니 시베르 아비에르 영애 쪽이 평민 출신이었던가?”

“아아. 그렇죠. 평민이라면…….”

“평민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요.”

“주제도 모르고 귀족을 시기했던 모양이에요.”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레일라는 순간 윌리엄인 척하는 레이니어를 보았고. 그의 눈에 빛나는 붉은 기운이 사람들 주위를 지나다니며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레일라를 보는 순간.

‘쉿.’

모른 척해달라는 듯 검지로 제 입을 막았다.

“오히려 시베르 영애야말로 레일라를 질투해 그 모든 헛소문을 지어냈다는걸요! 그리고 레일라의 약혼자들에게도 그럼 파렴치한 행위를 했다는 것까지요!”

레일라는 공녀의 말에 바이마르 공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바이마르 공녀의 눈도 붉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레일라 뿐인 듯했다.

“어머니, 저는 공녀의 말을 지지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바이마르 공녀라면 아무 때나 나서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아나시스 황태자가 제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바이마르 공녀를 두둔했고, 황후는 레일라의 수완과 행동력에 감탄한 심정을 감추며 말했다.

“레일라 영애를 봐서 아비에르 백작가는 처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황후의 손짓에 다른 기사들이 티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용인들을 잡아들였다.

“이 일은 사용인들의 증언도 들어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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