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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9)화 (79/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79화

제렌 남작이 그 주전자를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많았다. 다만 그는 시베르가 그 잔을 레일라에게 줄 줄 알았지, 황후에게 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차를 타 온 건 제렌 남작가의 여식입니다!”

수사는 착실히 진행되었고.

차를 내온 건 제렌 남작가의 셋째 딸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황궁의 시녀로 들어온.

“차에 대해 워낙 잘 아는 영애라……!”

“끌고 오거라.”

황후는 제렌 남작 영애를 향해 손짓했다.

“꺅!”

황후의 명령에 기사들이 제렌 남작 영애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땅에 주저앉게 했다.

“내 너를 꽤 아꼈건만, 이런 짓을 했더냐?”

“아, 아니 저는……! 저는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제렌 남작 또한 황후의 손짓에 의해 기사들이 결박해 땅으로 내리눌렀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앉은 뒤 소리쳤다.

“실은 이 모든 일이 시베르 영애가 꾸민 겁니다!”

그 순간 수군거리던 목소리가 일제히 잦아들었다.

“시베르 영애가 본인이 마시겠다고 해서……!”

“아니에요! 저 말은 거짓입니다! 아니라고요!”

“본인이 마시는 게 아니라면 레일라 영애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렌 남작도 살아야 했다. 황후 독살 미수죄보단 일개 영애의 놀이에 동조한 게 나았으니까.

“그게 정말인가, 제렌 남작?”

“예! 제 가문을 걸고 맹세합니다! 절대 황후 폐하께 누를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제 상단의 지분을 시베르 영애가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그런 겁니다!”

시베르는 휴고 때문에 지참금을 말아먹었지만 에클레르를 판 돈이 있었기에 오히려 흑자였다. 그 돈으로 제렌 남작가에서 운영하는 화훼 농장의 지분도 샀었기에, 제 아버지의 보좌관인 그를 이리저리 이용할 수 있었다.

“제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시베르 영애께서 황태자 전하의 눈에 들고 싶다고……!”

제렌 남작 영애도 합세했다.

실상 제렌 남작 영애는 시베르를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황후를 독살하려다가 들켰다고 한다면 남작가는 파산할 것이다.

파산이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평민으로 강등, 더 최악이라면 노예로 강등되어 온 가족이 팔려 다닐 것이다.

“모함입니다!”

시베르는 당황해 손을 부들부들 떨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엔 여전히 분노가 차올랐다.

그러나 레일라의 계략대로 바이마르 공녀는 제 아들에게 청혼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렇다면 지참금은 처음 내걸었을 때의 몇 배는 뛰었을 것이다.

어차피 가장 높은 지참금과 협력을 줄 가문에 제 아들을 줄 생각이었기에.

“시베르 영애의 짓이 확실하군요.”

“황후 폐하!”

황후는 마치 보증 수표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말했다. 독을 마셨던 분함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기에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레일라 영애를 봐서 크게 혼내지는 못하겠군요. 그만큼 우리 아들이 잘난 것도 사실이니.”

그녀는 시베르의 허튼수작 덕분에 제 아들의 몸값이 올라간 것마저 기꺼웠다.

“어머니.”

“우리 아들 아나시스, 네가 너무 잘나서 이 어미는 걱정이구나.”

“……송구합니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시베르가 정말 그랬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간 레일라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떠올리자 질투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하지만 우습군요. 저는 어머니였기에 제 피를 드린 거지, 일개 영애 따위에게 줄 피는 없습니다.”

“호호호. 역시 내 아들이군요.”

황후가 기껍게 말하며 시베르를 바라보았다.

“레일라 영애를 봐서 이번 일은 사고로 넘어가 드리죠.”

“가, 감사……!”

“하지만.”

제렌 남작의 말을 끊은 황후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다른 추가 증거가 나온다면 제렌 남작가의 영지는 몰수입니다. 그리고 제렌 가문 전원을 노예로 강등하죠.”

“황후 폐하!”

“만약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고. 정말로 시베르 영애만을 도운 거라면.”

제렌 남작과 남작 영애가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선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5년간 작위를 몰수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

황후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다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시베르 영애는 황궁의 출입을 금합니다. 앞으로, 영원히.”

“아…….”

“우리 아들을 위해서요.”

“화, 황후 폐…… 하…….”

“내 아들이 참석하는 사교 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들의 신변을 위해서요.”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후 폐하.”

먼저 감사를 표한 건 레일라였다.

“멍청한 언니에 비해 동생은 참 잘 컸네요.”

황후가 일부러 조롱하듯 그렇게 말하고 레일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앞으로 제가 여는 티파티엔 항상 참석하도록 해요, 레일라.”

그녀의 이름에서 ‘영애’라는 호칭이 떨어진 걸 들은 그 자리의 모두는, 레일라 아비에르가 황후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그렇게.

레일라의 입지는 견고해져 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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