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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80)화 (80/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80화

“저 약혼도 했는데요?”

레일라는 그가 자신을 끌고 가는 곳이 침대라는 걸 깨닫고는 그의 팔을 당겨 멈추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힘을 무시한 채 아주 세게 당겼다.

“앗……!”

이윽고 그녀의 몸이 추락한 곳은 침대 위였다.

“하지 마, 결혼.”

“왜요? 제가 브루스 후작 부인이 되어야 전하께 도움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랬지, 전에는.”

“아비에르 영애인 저는 쓸모가 없, 없어요……!”

그녀는 아나시스 황태자가 크라바트를 풀어서 대충 던지는 걸 보고는 기겁하며 말했다.

“어머니께선 그대의 사업 수완을 눈여겨보고 있더군.”

“그, 그건 전하께서 도와주셔서……!”

“어. 그런 식으로 내가 도와주면 영애는 브루스 후작가의 도움은 필요 없겠지.”

“하지만 그럼 전 영원히 백작가 영애인데요!”

“내가 황제가 되면 그대에게 백작 작위를 따로 내려 주지. 백작이 별로면 후작위도 내려 줄 수 있어.”

“네?”

“내 아이만 낳는다면 후작위 정도는 어렵지도 않아. 아니면 여공작이라도 할 텐가?”

“……네?”

레일라는 그가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황제가 되겠다는 말이야 사석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도 못한 미래에 대해 그가 이렇게까지 생각했다니.

“우리 아이가 생기면 그대도 황위에 자식을 올리고 싶을 테니까.”

“하, 하지만 전 계속 정부고……! 바이마르 공녀님을 황후로 앉히시겠다고 했잖아요! 그분에게서 난 아이를 황태자로 삼으셔야죠……!”

레일라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횡설수설 말했다. 그러면서도 제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나시스 황태자가 두렵게 느껴져 몸이 떨렸다.

“그러려고 했어. 오늘 일이 있기 전에는.”

“앗, 잠, 시만요……!”

“내 눈에 거슬리려고 작정하지만 않았어도.”

레일라는 턱을 잡는 아나시스 황태자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브루스 후작 부인? 그딴 건 하지 마.”

“소네트와 결혼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려고 했지. 네가 그런 식으로 내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제가 언, 언제 경고를…… 꺅!”

레일라는 그가 다른 손으로 제 허리를 꽉 끌어안자 놀라서 소리쳤다.

“우선 아이부터 만들어. 그럼 내 어머니께서도 널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안 된다고 하시면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황제가 돼.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

레일라는 아나시스 황태자가 원작에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아 그에 대해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소네트나 휴고보다 훨씬 쓰레기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답답함에 화가 날 것 같았다.

만약 아이를 가진다고 치더라도. 마마보이인 그가 잘도 자신을 황비로 앉히겠다. 게다가 설령 황비가 된다 해도 그 삶이 행복할까?

그리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 그가 변심이라도 한다면? 이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에게 평생을 휘둘리며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리고 아무리 소네트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애초에 레이니어가 있는 이상 아나시스가 황제가 될 일은 절대 없었고.

“전하.”

“이름으로 불러. 둘이 있을 때는.”

그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레일라는 더 슬퍼졌다. 하필이면 얼마 전까지 레이니어와 키스했기 때문인지 아나시스의 얼굴을 봐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분명 잘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레이니어의 외모를 봐 오던 레일라는 제 눈이 높아졌다는 걸 깨달으며 실망하지 않은 척하려 애써야 했다.

“조금 실망이네요, 아나시스 님.”

그러자 그가 행동을 멈추었다.

“뭐?”

레일라는 그와 여전히 가까운 상황이라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레일라가 아까 일 때문에 불안할 거라 생각해서.”

거짓말이었다. 불안함을 달래 주러 왔다는 사람이 오자마자 억지로 끌어안고 키스하려 달려들 리는 없었으니까.

“황후 폐하께서 독차를 마시고 쓰러지셨었어요. 정말 위험했었고요. 그런데……. 전하께선 여기 계시네요.”

“그 독차는 그대가 마실 뻔했어. 잊었나?”

“그래도 저는 안 마셨죠. 진짜 마신 건 황후 폐하이시니까요.”

“…….”

“저는 황후 폐하께서 저를 미워하실까 봐 겁이 나요.”

그녀는 가련한 척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하찮게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그가 꼼짝도 않고 그녀를 더 꽉 안으며 노려보았다.

“아이가 생기면 예뻐하실 거야. 어머니는 언제나 손주를 바랐으니까.”

“그건 제가 아니라 바이마르 공녀님에게서 난 아이겠죠.”

“난 그런 추녀는 싫어.”

“공녀님은 추녀가 아니세요. 그분도 미인이시라고요.”

레일라는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이마르 공녀에 대해 말하자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됐어. 아이는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예?”

“바이마르 공녀와도 아이는 낳아야 해. 그리고 내 후계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와 아이를 가져도 어머니께서도 넘어가 주시겠지.”

레일라는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걸까 싶어 한숨이 나왔다.

“아, 아니. 그렇지만…….”

“여기 올라올 때 백작 부인이 그러더군. 레일라는 싫다고 말해도 싫은 게 아니라고.

레일라는 새어머니가 자신을 증오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용인했다니 분노로 뒷골이 당길 정도였다.

“몇 번을 봐도 개소리는 여전하군.”

“악!”

아나시스 황태자는 크게 몸을 떨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그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레일라를 압박하던 힘이 사라졌다.

“흑…….”

레일라는 당황하고 걱정하며 두려워하던 것이 레이니어를 보자마자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왜 우십니까. 거기를 차 버리셨어야죠.”

“거, 거, 기요?”

“예, 여기요.”

레이니어는 아나시스 황태자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참에 못 쓰게 밟아 버리시죠.”

레일라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제, 제가 울, 어서 왔어요?”

“예.”

“레인, 사람 아니죠?”

“……사람 맞습니다.”

“그럼 어떻, 게 와요? 우는 걸로, 와요?”

레일라는 위협이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던 레이니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아가씨가 울면 옵니다.”

“흐윽, 윽…….”

그는 레일라의 흐트러진 모습을 빤히 보다가 손을 튕겼다.

“오늘 참 고생이 많았네요.”

그 순간 헝클어진 레일라의 머리카락이 아침에 준비하고 나갔던 상태로 단정하게 바뀌었다.

“윽…… 흐…….”

레일라가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내자 레이니어가 그녀의 손을 잡아서 무언가를 올려 두었다.

“이걸 끼고 손을 튕기시죠.”

“왜, 왜요……?”

“울지 않아도 저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혹시 악마, 예요?”

“제가 어떻게 악마입니까? 아가씨를 이렇게 돕는데.”

“그럼 천사……? 근데 천사라기엔 너무 악독, 한데요.”

레이라의 솔직한 말에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올려 두었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제 방으로 가시죠.”

“여긴 어쩌고요?”

“어쩌고요.”

그는 또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레일라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레이니어가 화가 난 듯 보였기에 안기면서도 눈을 계속 보았다.

“전하가 오실 거라면서요. 이런 것도 예상한 건가요?”

“이건 예상을 못 했습니다. 생각보다 미친 놈인 것도 예상은 못 했고요.”

“그럼 어떤 걸 예상했어요?”

“찾아와서 위로할 정도는 예상했죠. 참고로 아나시스와는 잠자리를 가져도 만족은 못 하실 겁니다.”

그녀는 그가 제 배다른 동생에 대해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게 제정신인가 싶어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이니어는 모욕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건조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비실한 몸으로 여인을 만족시킬 수 있을 리는 없죠.”

“……그게 무슨…….”

“제가 아는 아가씨라면 저런 놈으론 어림도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아, 네.”

레일라는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는 위협을 느끼면서도 아나시스의 외관을 보고 실망했었다.

“외모로 아가씨를 유혹하려면 저 정도는…… 읍…….”

“빨리 가요. 피곤해요.”

레일라는 레이니어의 말에 더 지칠 것 같아서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입술로 물었다.

그녀는 그가 제 손가락을 무는 게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이상했다.

“소네트가 정말로 황궁으로 갔는지 알아봐 주면 안 될까요?”

“아가씨가 얌전히 제 방에서 잠드시겠다고 하신다면요.”

그러자 그녀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저한테 무슨 짓 할 거예요?”

“지금 제게 아나시스처럼 파렴치한 짓을 할 거냐고 물으신 거라면, 제가 좀 상처 받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안도한 레일라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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