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83화
“제가 지금까지 종합해 본 게 있거든요.”
“예, 말씀하시죠.”
레일라는 제 옆에 누우려는 레이니어를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저는 네글리제만 입었는데 레인은 그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눕겠다고요?”
“왜요? 싫으십니까?”
“옷이 빳빳해서 닿을 때 별로일 것 같은데요.”
그녀는 잘 때는 푹신한 베개와 보드라운 천만 닿길 바랐다. 그래야 잠도 잘 오니까.
소파에서 선잠만 들고 깊게 못 잔 것도 그래서였다. 요새 워낙 잘 자서 그런지 조금만 불편해도 잠이 잘 안 왔고.
“벗어도 됩니까?”
“겉옷만 벗어요.”
“예.”
그러자 레이니어는 뻣뻣한 겉옷을 벗고 레일라의 옆에 누웠다.
그가 팔을 뻗자, 레일라는 그의 말대로 팔베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누였다.
“와……. 너무 딱딱해요. 돌도 이것보단 말랑하겠어요.”
레일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팔 위로 베개를 댔다. 그러자 윗머리는 베개에, 목 아래는 그의 팔이 닿아서인지 꽤 괜찮아졌다.
“팔 저릴 텐데 괜찮아요?”
“하루 종일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됐어요. 아, 졸리다.”
레일라는 전혀 졸리지 않았음에도 졸린 척했다. 그가 얇은 셔츠와 바지만 입어서 그런지 신경 쓰였다.
셔츠 아래에 있던 그의 커다란 가슴과 잘 나눠진 복근이 떠오르는 것도 같아서.
“누워 보니 저도 불편하군요. 상의는 좀 벗겠습니다.”
“……그래요.”
그녀는 머리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은 허락을 뱉고 말았다.
“벗겨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혼자 잘 벗을 것 같은데요.”
“아, 속상하네요. 역시 인간 같지도 않아서 옷도 벗겨 주기 싫으신 걸까요.”
레이니어의 말에 레일라가 묘하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벗겨 주면 그 말 그만 할 거예요?”
“당연하죠.”
그의 말에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허리를 세웠다. 그러자 레이니어도 따라 일어나 그녀를 보았다.
레일라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재빨리 그의 셔츠 아래를 잡았다. 그러고는 단추를 하나씩 푸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셔츠 아래에 불룩 솟아 있는 가슴을 보자 그녀는 모른 척하면서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제일 아래의 단추를 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한테 허튼짓하면 저, 확 혀 깨물고 죽어 버릴 거예요.”
“아가씨가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거짓말이죠?”
“마음이 죽는다는 거니 사실이죠.”
그녀는 그의 뻔뻔한 대답에 픽 웃고는 다음 단추를 풀었다.
“아까 아가씨께 어떤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파렴치한 짓을 할 것 같습니까?”
“이미 충분해서요. 다음 단계도 있을 줄 알았죠.”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고는 거침없이 단추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나시스처럼 아가씨를 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요.”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졌다.
“오히려 저야말로 위협을 느껴야겠네요.”
“무슨 소리예요?”
“아가씨 눈빛이 워낙 위험해 보여서요.”
그는 웃고 있었고, 레일라는 제 눈빛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얼굴이 뜨거웠고 귀도 불탈 것 같았다.
레이니어의 몸은 언제 봐도 참 훌륭했다. 그의 목덜미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잘 나눠진 흉근을 타고 복근으로 내려간 뒤 완벽하게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마치 이미 물길을 내고선 물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한 방울도 허투루 새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상체였다.
“레인이야말로 조심해요. 제가 눈 뒤집혀서 덮치면 어쩌려고.”
“그럼 저를 책임지시면 됩니다.”
“그거 정말 구닥다리 같은 소리네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요.”
그녀는 어쩌면 그 말이 힌트가 아닐까 싶었다.
“마저 벗어요, 레인.”
그녀가 단추를 다 풀자 그가 어깨에서 상의를 걷어내고는 이내 바닥에 대충 던져두었다. 그러고는 유혹하듯 그녀를 바라보며 제 입술을 깨물었다.
“해독하실래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
그러자 그가 아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다시 그의 팔에 목을 대고는 누운 레일라는 마주 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등을 대고 돌아누웠다. 그러자 허리에 닿는 단단한 팔 때문에 풀렸던 긴장이 다시금 들고 있었다.
등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박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다는 것도 그렇고.
레일라는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가까우면서도 더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는 것에 당황했다. 그는 그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듯 손을 대고는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녀도 그렇게 잠에 들려 했다. 그러나 등 뒤로 느껴지는 심박과 제 긴장한 박동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가 살며시 뒤돌아 눕자 그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초승달처럼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자장가라도 불러 드릴까요?”
그의 입술에 옅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노래 잘해요?”
“아뇨.”
“그럼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려 줘요. 그리고 여기 좀 조용히 시켜요.”
그녀가 그의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그걸 조절할 수 있으면 제가 사람이 아니죠.”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눈을 떠 그를 바라보자 그는 정말로 웃는 사람처럼 기뻐 보였다. 레이니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옛날이야기를 해 드리죠.”
“좋아요. 듣다가 재밌으면 해독도 해요.”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레이니어의 말에 레일라가 픽 웃었다. 그녀는 그의 몸이 이렇게 위협적이고 커다랗다는 걸 직접 보고 느끼고 있음에도, 그가 자신을 강제로 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거기에 그가 욕정 때문에 제게 함부로 굴지 않을 것도.
“옛날에 어떤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레일라가 눈을 감았다.
“그 황제는 정말 외로웠습니다. 황제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으니까요.”
“왜 없어요?”
“황제의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황제를 낳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죽었거든요.”
레일라는 묘하게 황제의 배경이 레이니어와 비슷하다 생각하며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황제가 된 후로도 황제는 매일이 외로웠습니다. 황제가 되면 모든 걸 다 이루어서 행복해질 줄 알았거든요.”
“신하들이 있잖아요.”
“신하들은 부하죠. 외로움을 달래주진 못합니다.”
레일라는 천천히 레이니어의 근처로 밀착해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던 중 무도회에서 어느 아가씨를 만나게 됩니다.”
“…….”
“그 아가씨는 황제의 취향은 아니었어요.”
“못생겼나 봐요?”
“아뇨, 예쁜데 화려해서요. 황제는 수수한 사람을 더 좋아한답니다.”
“정말요?”
“아뇨.”
레일라는 그가 한 말에 눈을 떴다.
“화려한 미인을 좋아한다는 거죠?”
“예.”
그가 픽 웃으며 레일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일라가 다시 눈을 감았다. 방금 한 대답에 만족한다는 듯이.
“황제는 쓸쓸하게 후원을 걷던 중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아가씨와 내기를 하게 되죠.”
“어떤 내기인가요?”
“꽃 이름을 맞추는 내기였습니다.”
“누가 이겼나요?”
“아가씨가 이겼죠.”
레일라는 그가 생각보다 이야기를 잘 지어낸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래서 황제는 아가씨와의 내기대로 사업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 아가씨는 어떤 사업을 했는데요?”
“꽃을 워낙 좋아해서, 꽃집을 차리려 했습니다.”
“그럼 꽃집을 차렸나요?”
“결국엔 살롱을 차리고 직접 플로리스트 일을 했죠.”
“하긴, 그쪽이 더 장사가 잘되긴 하겠네요. 황제를 이용한다면요.”
“그렇죠.”
그녀가 저도 모르게 사업적으로 생각하며 말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려고 듣는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것 같기도 해서.
“황제는 아가씨와 사업을 하며 재미를 느꼈습니다. 사업은 날로 발전했고, 돈은 막대하게 쌓여 갔으니까요.”
“황제는 이미 부자 아닌가요.”
“부자여도 유흥은 즐기고 싶죠. 거기에 돈도 많이 번다면 생산적인 유흥 아니겠습니까.”
“맞네요. 그런 황제는 참 마음에 드네요. 건실하고 부자고.”
“참고로 아주 잘생겼답니다.”
“아, 네. 그래요. 동화가 그렇죠, 뭐.”
레일라가 문득 눈을 떠 바라보자 레이니어는 또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표정을 보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업을 함께 하던 황제는 그 아가씨와 결혼했답니다.”
“그게 끝이에요?”
“아뇨.”
동화라면 거기서 끝이 나야 맞건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되나요? 아이도 여럿 낳고 잘 사는 건가요?”
“첫 아이를 가진 후 황제는 매일 행복했답니다.”
역시 동화대로 가는구나 싶었던 레일라는 시시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