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88화
“네?”
레일라가 당황하며 바이마르 공녀를 바라보자, 공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청혼하고 나서는 좋았어요. 그런데……. 청혼하고 나니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바이마르 공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레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공녀가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일라는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자세히 말해 주세요.”
레일라의 걱정하는 표정을 보자 바이마르 공녀는 역시 말을 꺼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그녀에게 레일라 같은 친구는 없었다.
공녀로서 사귄 측근들은 말 그대로 측근이자 아랫사람 같았다. 친구는 아니었고, 만약 자신이 공녀가 아니었다면 만나지도 못했을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은 바이마르 공작가의 힘을 기대하며 공녀에게 잘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제게 호의를 보이며 잘해 주려던 레일라는 달랐다. 그녀는 제 소문을 스스로 벗기려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공녀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달라붙는 사람도 아닌 듯 보였다.
레일라와 공녀가 보낸 시간은 정말 바라는 게 있었다면 이미 속내를 드러내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 부분은 공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할 뿐이었다.
하지만 레일라는 공녀가 아나시스 황태자를 볼 때마다 느낀 그 감정을 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원작에서처럼 아나시스를 밀다가 바이마르 공작가가 망하는 건 바라지 않기도 했다.
“사실 처음 황태자 전하를 봤을 때가 지금도 생생해요. 그 별 같은 머리카락이랑 달처럼 빛나는 눈도 그렇고.”
“전하께서 외적으로는 훌륭하시긴 하죠.”
“네, 그래서 첫눈에 반했죠.”
“어머나.”
레일라가 웃으면서도 바이바르 공녀가 안도할 수 있게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며 눈을 맞추었다. 무슨 말이든 해도 들어 주겠다는 듯이.
“그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좋아했답니다. 저희 공작가는 황제 폐하를 모시기 위해 중립을 오래도록 유지하기도 했고요.”
레일라는 공녀의 말을 듣기만 하며 눈을 맞추고 있었다.
“사실 가문 간의 결합으로 보기에도 좋잖아요? 저는 공작가의 적녀고 전하께서는 이제 유일한 황손이시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운명이 아닐까 종종 생각했었답니다.”
레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이마르 공녀가 나이답게 수줍은 듯 웃다가 레일라를 보았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생각했던 전하가 조금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레일라가 잡은 손을 바이마르 공녀가 다른 손으로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해도 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였고.
-똑똑.
‘차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아, 레인.”
레이니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능숙하게 트레이에서 차를 내린 뒤 과자도 두었다.
“그나저나 루텐베르크 왕세자 저하께서 왜 하인들이나 하는 일을 하는 건가요?”
“저는 루텐베르크 왕세자가 아니랍니다. 그저 일개 사용인이죠.”
그가 트레이를 비우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녀가 멍하게 바뀌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라의 저택에는 잘생긴 사용인이 많네요.”
이내 그 멍하고 탁한 눈에 빛이 돌아오더니 다시금 원래의 표정이 되었다.
레일라는 그가 또 신기한 능력을 쓴다 생각하며 레이니어 쪽을 봤다. 그리고 그는 비밀이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대며 웃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죠.”
“아, 네. 레인도요.”
“예.”
레이니어는 그렇게 나가 버렸지만, 레일라는 그가 근처 어딘가에서 말을 주워듣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공녀에게 집중하며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결혼하게 되면 레일라처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었어요.”
“어머나.”
“이상하죠? 귀족이 누가 그렇게 결혼한다고.”
“그게 뭐가 이상하죠? 귀족은 행복하면 안 되나요?”
레일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제국의 전통을 자신의 행복보다 아래에 두는 듯한 레일라의 발언은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경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공녀는 그녀의 말을 듣자 가슴이 묘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공녀야말로 그런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위치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저는 그래요. 법도 중요하지만 제가 행복해야 한다고요.”
레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공녀의 손을 꽉 잡았다.
“공녀님은 혹시 이 결혼이 행복하지 않을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
“……네. 사실 전하와 약혼하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젠 잘 모르겠어요.”
“……아.”
“제가 청혼한 날에도 급한 일이 있다며 가 버리셨고……. 그것도 황후 폐하의 허락을 받겠다며 가신 거라서요.”
레일라가 놀란 듯 눈을 뜨자 공녀는 이내 부끄럽다는 듯 손을 떨며 말했다.
“그마저도 허락을 받으신 후에는…… 쉬다가 늦게 오셨어요.”
“아…….”
실상은 그 후 레일라를 보러 왔었다. 레일라는 그가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어서 놀랍지도 않았고.
“사실 저는 레일라 이외에도 다른 영애들에게 전하께서 제 이야기를 하신다는 걸 많이 들었었어요.”
“정말요?”
“예. 그렇기에 레일라에게서도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쁘면서도 아직 전하와 저의 마음이 같구나, 생각한 거였어요.”
공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레일라의 하늘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전하께서 바라시는 게 저인지, 아니면 바이마르 공작가인 건지요.”
“공녀님껜 그 두 가지가 다른가요?”
“저도 예전엔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가문은 흥할 수도 있고 쇠퇴할 수도 있죠. 그럼 가문과 저를 동일시하는 사람과 만난다면 저의 노력과는 별개로 애정이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레일라는 역시 바이마르 공녀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한 그대로 공녀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그녀는 원작에서는 레일라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조언하는 사람은 없었을 확률도 높았다. 거기에 황태자비라면 귀족의 정점을 찍는 신분이었을 테니 더욱 그랬겠지.
황족이 되는 것은 일반 귀족으로 남는 것과는 결을 달리하는 일이었다. 그깟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공녀의 이런 고민을 우습게 여겼을 것도 뻔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건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네요.”
“그럼 공녀님은 어떠세요? 만약 아나시스 황태자 전하께서 일개 평민이었다면요?”
“그렇다 해도 좋아했을 거예요. 제가 반한 건 전하의 우아한 태도와 성품이었으니까요. 외모는 덤이고요.”
레일라는 오히려 그 말에 공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공녀님, 제가 너무 주제넘게 나서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요. 그래도 말하고 싶은데, 용서해 주실래요?”
“레일라, 뭐든 좋아요. 저는 레일라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온 거랍니다.”
바이마르 공녀가 그녀의 말을 경청하려는 듯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레일라가 몇 분을 망설이다가 입술을 달싹이던 걸 멈추고는 말했다.
“어떤 선택이든, 누구와 결혼하든, 본인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레일라.”
“제가 공녀님과 전하를 이어 주려 한 건 공녀님께서 전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녀님이 행복하지 않으시다면…… 저는 이 관계는 놓아야 한다고 봐요.”
공녀는 레일라의 눈을 보자 털어 놓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녀님은 황태자비의 자리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세요. 저는 지금껏 공녀님처럼 위엄 있고 자애로운 분을 못 봤어요. 그리고 능력도 있으시죠.”
“레일라…….”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행복하려고 돈도 있는 거고 능력도 키운 거라고 생각해요. 불행하면 그 모든 게 쓸모없다고 생각합니다.”
레일라의 말에 위안을 받은 듯 공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다가 영원히 아무랑도 결혼 못 하면 어떡하죠?”
공녀가 고민하듯 그렇게 말했다. 황태자와의 약혼이 깨지면 누구도 공녀에게 청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혼만이 행복의 수단은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공녀와 달리 레일라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오히려 황태자를 놓아야 바이마르 공작가도 살 것이다.
“그리고 저는 숱한 파혼을 맞이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소네트도 만났죠.”
이어지는 레일라의 말에 공녀가 확신을 얻은 듯 웃었다.
“그건 레일라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닐까요?”
“공녀님이 훨씬 아름다우세요! 저는 공녀님처럼 지적인 미인이 되고 싶은걸요!”
레일라가 진심을 담아 말했고, 공녀는 레일라의 말에 확신을 얻었다.
“공녀님?”
“아…… 미안해요.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레일라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뺨을 닦아 주었고.
“공녀님.”
“네, 레일라.”
레일라는 바이마르 공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행복해지세요. 저는 어떤 결정이든, 공녀님의 행복을 위해 내리시면 좋겠어요.”
바이마르 공녀는 어쩐지 레일라의 말이 제 아버지가 했던 말과 비슷하게 들려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레일라.”
그렇게 레일라는 의도치 않았지만 레이니어의 복권을 돕게 되었다. 아나시스 황태자의 막강했을 한쪽 날개를 꺾어 버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