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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91)화 (91/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91화

“이상하네요. 아가씨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레이니어는 그가 바라던 대로 황제가 되어 그녀를 가지려 하면, 레일라는 번번이 살해당했다.

처음에는 독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눈앞에서 총을 맞았고.

첫 생에서나 둘째 아이를 가질 때까지 함께했었지, 다음부터는 그와 약혼만 강행해도 죽었었다.

그렇다고 그가 황좌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그녀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면, 레일라는 스스로를 팔듯 소네트 브루스와 이어지곤 했었다.

소네트 브루스가 아닌 적도 있었다. 휴고 로날드였던 적도 있었고.

그녀가 헤어졌던 그 무수한 사내들 중 하나일 때도 있었다.

그 머저리들은 레일라가 부자가 되면 돌아와 사랑한다 말했고, 레일라는 그때마다 그들을 믿어 바보같이 결혼해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쉽게도 그녀의 마음을 얻었건만.

레이니어가 처절하게 고백할 때마다 그녀는 한 번을 받아 주지 않았었다.

‘폐하, 저 좋아해요?’

‘어,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그러나 부유해진 레일라는 제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제게 황위를 넘기라면 넘길 수도 있었는데도.

그에게 더는 황좌 따위는 어렵게 얻는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해야 다시 복권하고 황제가 될 지도 명확했다.

그렇지만 황좌를 택했을 때엔 그녀가 죽었고.

따져 보면 지금은 정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매번 사랑한다고 들러붙던 기생충 같은 사내들에게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며 울던 레일라였건만.

지금 그녀는 정말로 소네트를 사랑하는 듯 보이지도 않았고.

‘정말 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레이니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녀는 오히려 제 감정을 확신하는 듯 보였다.

수긍하는 순간마다 그녀는 사고에 노출되어 크게 다칠 때가 많았다. 심지어 이번엔 죽을 위기도 있었고.

그러니 그는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에겐 레일라가 제 눈앞에서 죽어 버리는 것보다, 제 머리를 쏴 버리는 일이 더 쉬웠다.

“소네트 브루스를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는 떠보듯 물어보았다. 그러자 레일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엄청. 그래도…… 목표가 조금 바뀌어서요.”

“어떻게 바뀌셨습니까?”

“결혼하지 않고 홀로 부자로 살고 싶어요.”

그 말에 레이니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굳은 채로 레일라를 보기만 했.

맞다. 그는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본 그녀의 무수한 미래 중에 홀로 살아가는 미래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레일라는 매번 유약한 몸을 사내에게 의탁하려 들었다. 스스로를 사랑하기보다는 타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제게도 돌아오길 바라는 안쓰러운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다음 순간 레이니어는 깨달았다.

제일 처음.

레일라를 사랑하게 되었던 그 생에서.

그때의 생에서도 레일라는 지금처럼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제가…….”

그는 홀린 듯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황제가 된다면 아가씨를 공작으로 만들어 드리죠.”

“고, 공작은 싫어요!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럼 후작?”

“남작이면 충분해요!”

“그건 너무 지위가 낮죠. 공신을 어떻게 그리 대우하겠습니까.”

레일라는 레이니어가 자신과 거래하는 부분에서 항상 후하다는 걸 알았지만, 갑자기 공작 작위를 약속해서 당황했다.

지금껏 원작을 여러 가지 바꾸었더라도,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다가 정말 공작이 된다면 두려울 것 같았다. 공작은 만만한 작위도 아니었고, 작위에 따른 책임도 큰 자리였으니까.

“그럼 백작……?”

“좋습니다. 그래도 역시 공작이…….”

“백작이 제일 낫네요. 저는 백작가 영애이기도 하니까요.”

공작 작위를 기어코 안기려 드는 레이니어를 그녀가 가로막았다.

천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처음 생의 실마리를 찾은 것만 같아 레이니어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울어요? 제가 백작이 좋다고 해서 우는 건가요?”

“……예. 아가씨가 제 성의를 무시해서요. 제가 대공으로 만들어 드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참 매정하시네요.”

“아니, 레인…….”

마침내 찾아낸 깨달음 때문인지 이번 생에서는 부디 그녀가 죽지 않길 바란다는 간절함 때문인지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아가씨는 정말 잔인하십니다.”

“제가 좀 그래요.”

“제게 특히요.”

“그건 아니지만…… 안 그러도록 해 볼게요.”

그녀가 무심하게 달래 줄 뿐인데도 행복해 미칠 것 같다는 게.

불공평하다 생각하면서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이며 레이니어는 웃었다.

“아량이 넓은 제가 봐 드리는 겁니다.”

“그래요. 너무 고맙네요. 레인이 최고예요.”

“예, 제가 좀 최고죠.”

그렇게 레일라와 레이니어는 비셔스 은행을 이용해 황태자와 황후의 자금을 묶어 두기로 했다.

그럼 레이니어가 부황이 죽은 그 날 혁명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저쪽은 용병이나 기사를 구할 돈이 없어 레이니어의 군에 밀리게 될 테니까.

뭣보다 황군은 이미 레이니어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들로 꾸려져 있었기에.

“그럼 그때까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뻗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은 그 순간.

“읍…….”

불안함을 달래려는 듯 입을 맞추는 레이니어를 받아들였다.

그가 또 피를 내는 걸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키스를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상은 모든 생에서, 그를 처음 만나 피를 받은 그 시점에 그녀의 모든 병이 나았다는 걸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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