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94화
“그만 말하시죠.”
확신이 더해진다. 방금까지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울리던 밖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레이니어는 자신이 인간이라 했다. 어쩌면 시작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인간이라기엔 어딘가 많이 달랐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보는 표정을 볼 때면, 그 정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기게 됐다.
“왜요? 제가 말하면 기분 나쁜가요?”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두운 곳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붉었다. 그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 위해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달빛이 비치자 보이는 그의 귀마저 몹시 붉었다.
거기에 그의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나는 걸 보아 눈물이 고인 듯 영롱해 보였다.
“소네트 브루스는 제가 데려가죠. 아가씨는……. 쉬십시오.”
“레인.”
“또 위험해지면 제가 오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네트 브루스를 한 손으로 잡고선 테라스로 나가려 했다.
레일라가 그의 팔목을 잡았더니, 그는 그대로 멈추었다.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제 무지한 힘으로 그녀를 다치게 한다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제가 한 말 잊으면 안 돼요.”
“…….”
“잘 생각해 봐요.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놓았다.
그녀는 그의 상태를 살피느라 제 상태를 알지 못했다.
레이니어의 눈에 비친 건 분홍 머리카락만큼 붉어진 얼굴로 저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레일라였다.
“이걸 처리하고 돌아오면 키스해 주실 겁니까?”
“오늘은 오늘 치를 이미 한 것 같은데요.”
레일라는 피를 주는 걸 말하는 걸까 싶어 그렇게 말했다.
“피는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냥 키스가 하고 싶다는 거예요?”
“네.”
그녀는 그가 뻔뻔하게 대답하자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자 그가 소네트 브루스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고는 천천히 이동했다. 레일라가 잡은 손은 스르르 풀렸고, 그는 그녀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재빨리 밖으로 가 버렸다.
레일라는 방 안에 홀로 남았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동안 그가 실수인지 일부러 그러는지 입술에 피를 내지 않고 키스했던 적은 꽤 있었다.
그때는 눈감고 봐주는 실수 같은 느낌이었건만.
지금은 좀 달랐다.
“아…… 왜 이러지.”
그녀는 자신이 레이니어에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싶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가 빨리 오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가라앉질 않았다.
콩콩 뛰는 가슴이 얼마나 시간을 섬세하게 느끼는 건지, 고작 1분이 채 안 지났건만 족히 1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레일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서 레일라는 놀라서 그쪽을 보았다.
주위는 너무나 어두웠다. 그러면서도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레이니어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놀랍도록 선명한 붉은 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또 진정하질 못하고 콩콩 뛰고 있었다.
“저, 정말 키스하고 싶어요? 왜요? 레인은…… 읍…….”
그녀는 침대 근처에 서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등 뒤에 폭신한 감촉이 닿았다. 일순 느껴진 현기증에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읍…… 흐…….”
레일라가 움직이지 않자, 이내 레이니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지금은 부드러운 척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는 그의 행위를 받아들이다가 이내 안정을 찾자, 그녀도 그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의 반응을 보이면 그는 훨씬 크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레일라는 숨 쉬는 걸 잊은 듯 턱을 움직일 때마다 그가 틈을 벌려 숨을 쉬게 해 주려는 듯 잠시 떨어졌다가 더 깊이 침입했다.
이내 그녀가 코로 숨을 쉬자 그가 마주 닿은 콧날을 비볐다. 레일라는 그의 손이 제 어깨를 둥글게 쓸다가 이내 쇄골을 지분거리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몸을 떨었다.
결혼도 안 한 귀족 영애가 키스도 모자라 그 이상의 행위를 한다면 그녀는 정말로 누구와도 결혼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머리로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레이니어가 저를 만지는 데에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있었다.
그의 손이 쓰다듬는 것에 그녀가 가만히 있자, 이내 그는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애먼 곳을 만지면 욕을 하셔야죠.”
“그런 곳인가요?”
“……아뇨.”
그녀는 그가 엉망으로 만든 네글리제를 끌어 내렸다.
“소네트는 어쨌어요?”
“한 침대에 누워서 다른 사내의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제가 좀 잔인하잖아요. 무심하고.”
그녀는 그가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며 레이니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달라붙은 제 타액을 엄지로 닦아 냈다.
“전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겁니다.”
“방금 멈춘 사람은 레인인데요.”
레일라는 그가 여기서 뭘 더 하려 하는 걸까 싶었다. 아직 몸에 열기가 남아서 그런지 머리와 몸의 생각이 따로 노는 듯 그리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잠만 잘 겁니다.”
“아, 그렇죠.”
전에도 그렇게 잠만 자고 간 적이 있긴 했다. 그녀는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왜 실망한 표정입니까?”
“자만심이 크네요. 실망 안 했어요. 전 잘 거고요. 레인은 저쪽 소파에서 자요.”
“누가 소파에서 잔다고 했습니까?”
“그럼 어디서 잘 건데요?”
“같이 잘 겁니다.”
이 일도 처음 겪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까까지 분위기가 이상해서였을까?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에 그녀는 짐짓 큰 소리를 냈다.
“저번처럼 상의 벗어 주나요?”
“바지도 벗어 드릴까요?”
“됐거든요.”
그녀의 말에 그가 픽 웃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안 하려고 했지 않나요? 오늘은 왜 이래요?”
“오늘은 아가씨의 태도가 달라서요. 제가 말했잖습니까, 제게 제일 중요한 건 아가씨의 마음이라고요.”
그녀는 그의 말에 가슴이 또 뛰었다. 마치 정말로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아서.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제게 먼저 보여 주었던 믿음과 행동들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하면 제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부정하고 있었다.
“제가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요?”
“그래도 안 됩니다.”
“왜요?”
그러자 레이니어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는 첫 잠자리에서 아이가 생기거든요.”
“……예언이에요?”
“제 상상이요.”
상상이 아니고 이전에 있던 일을 말한 것이었다. 그때 그는 레일라가 곧바로 임신하는 바람에 신혼을 오래 즐기지 못했었다.
그 부분은 레일라가 불만처럼 토로하기도 했던 부분이었고.
“불민한 상상을 하시네요.”
“제가 좀 그런 부분은 특출납니다.”
“세상에.”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심술이 나서 레이니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벗을래요. 레인은 하나도 벗지 말아요. 절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이니어의 몸을 밀어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그대로 밀려났다.
그러고는 레일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네글리제를 벗어서 바닥에 두는 걸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숨을 들이켠 채 멈춘 것을 본 레일라는 그를 빤히 지켜보았다.
“고장 났어요?”
“머리가…… 고장 났나 봅니다.”
“그래요. 알아서 고쳐요. 잘 자요.”
그녀는 얼굴이 불탈 것 같았지만 그대로 침대로 들어갔다. 여름의 끝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더웠다. 그런데 시트를 덮자 더 더운 것 같았다.
그녀가 침대에 누운 채 시트로 가슴께를 가리자 레이니어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았다가 일어나는 통에 침대가 울렁거렸는데 레일라는 눈을 감고선 신경 안 쓰는 척하고 있었다.
“남자는 다 짐승입니다.”
레일라는 그의 말을 못 듣고 자는 척하며 가만히 있었다.
“저도 그렇고요.”
이내 스프링이 튀는 소리와 함께 레일라의 등 쪽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꺅!”
레이니어가 레일라를 시트째 둘둘 말며 말했다.
“이제 시트를 입으셨군요, 아가씨.”
“이 사람이……!”
그는 그렇게 레일라의 팔만 빼 준 뒤 말했다.
“좋은 꿈 꾸시죠, 레일라 아가씨.”
그러고는 그대로 레일라에게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베개에 머리를 댔다.
레일라는 제 목 아래로 뻗어 오는 그의 두꺼운 팔에 머리를 일부러 콱 찧었다.
그러자 그가 기쁘다는 듯 웃었고 그녀의 어깨로 체향을 맡는 듯 숨을 들이켰다.
“마주 보고 잘래요.”
그녀의 말에 그가 팔을 더 단단히 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못 잡니다. 아가씨도 못 자고요.”
“왜요?”
“그야 제가 말했잖습니까. 전 짐승이라고요.”
레일라가 꿈틀대며 몸을 돌리려 하자 그가 더 꽉 안으며 말했다.
“그러니 얌전히 주무세요.”
그녀는 그의 말에 픽 웃었다.
“그 짐승 좀 구경하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