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96화
“가끔 영애의 본가가 한미한 백작가라는 게 아쉬울 때가 있어요.”
황후는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기선을 제압하고선 후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이, 레일라가 이미 납작 엎드리며 황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 아나시스도 거드는 듯했고.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제가 아무것도 없는 백작가 영애라도 이렇게 전하 곁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말 전하를 낳아 주신 황후 폐하께 감사드려요.”
레일라의 말에 황후는 콧구멍에 콩도 들어갈 정도로 기쁜 걸 숨기기가 어려웠다. 마치 살면서 듣고 싶었던 말을 다 해 주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일라는 비위를 잘 맞추고 있었다.
황궁 내에 있는 어릿광대도 하지 못한 일을, 영민한 영애라 그런지 쉽게 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나저나, 제가 준 저택은 둘러봤나요?”
“아, 사실…….”
레일라는 사실 그곳에 가 보지 못했다. 소네트가 시베르와 다녀온 후로 이상해져서.
“가 봐야 하는데 아직이요.”
“어머, 어째서요?”
“거기 가면 정말로 결혼해야 한다는 게 느껴져서요. 물론……! 전하를 위해서는 브루스 후작 부인이 되는 게 가장 적합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가진 않아서요.”
“저런.”
“소네트가 전하처럼 완·벽·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레일라가 ‘완벽’이란 말을 강조하듯 말하고는 슬프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아나시스가 세상에 단 한 명이라 어쩔 수 없긴 하죠.”
황후가 호호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레일라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시스 황태자는 둘이 대화하는 걸 흘려들으며 레일라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들떠 있어서 그런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둘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열띤 목소리를 내는 게.
“레일라야말로 정말 아름답죠. 저는 레일라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레일라 영애가 어여쁘긴 하죠.”
하지만 황후는 그 말에 조금 기분이 상한 듯 한쪽 눈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신분에서 오는 위엄과 카리스마를 가지려면 고결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한테는 없는 고결함이요.”
레일라가 그렇게 덧붙이자 황후는 다시 누그러들었고.
이제 본론을 꺼내도 되겠다 싶었던 황후가 레일라를 빤히 보며 말했다.
“요새 사업을 한다고요?”
“아, 네! 몬트와 비셔스 은행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볼래요?”
레일라는 슬쩍 아나시스를 흘끗했고,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실상 그의 반응 따위 살필 생각이 없었으나, 혹시 레이니어가 또 누군가를 조종할 때처럼 근처에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눈을 살핀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나시스 황태자는 여전히 금안이었다.
“레일라가 긴장했나 봐요.”
“아…… 사실 황족이 신의 후손이란 게 갑자기 떠올라서요.”
그 말에 레일라는 제가 말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원작에서 본 황족은 피로 모든 걸 정화하는, 유일한 특수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레이니어는?
그도 황족이니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정말 지크문드 제국의 핏줄이 신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가 부리는 이상한 능력들도 다 그런 것에 포함되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런. 긴장 풀어요, 영애.”
황후가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자 레일라는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아이참. 황후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더 긴장할 거 같아요.”
레일라가 격식을 잊은 척하며 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아나시스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턱을 괴며 응시했고.
황후는 바이마르 공녀와 그녀를 속으로 비교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딱딱하고 우직한 바이마르 공녀에 비한다면 이렇게 귀여운 정부라니.
훗날 공평하게 대해야 할 텐데, 벌써 마음이 가는 것 같아서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매 대에 황제들은 정부 때문에 골치를 썩였으니.
제 아들이 황제가 된 후에는 레일라 이외에 어떤 정부도 두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다.
“오랜만에 참 즐겁네요.”
아나시스는 제 어머니가 기뻐하자 또 웃었고.
“사, 사업 계획서를 가져왔습니다.”
레일라는 품에 가지고 있던 사업 계획서를 황후에게 건넸다. 황후는 그것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이 모든 건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도와주셔서 이룬 거랍니다. 그리고…… 그래서 저는 꼭. 전하께 모든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그 답례로 영애는 뭘 받고 싶나요?”
“저는……. 첫 아이는 꼭…… 전하의 아이를 받고 싶습니다.”
레일라는 아나시스 황태자의 욕망과 황후의 계략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황후는 제게 목줄을 채워 이용하길 바라는 사람이었으니까.
일부러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아나시스 황태자가 함부로 제 방에 들락거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가치를 이렇게 높여 둔다면.
“호오. 그래도 첫 잠자리는 소후작과 하도록 해요. 부부관계가 좋아야 할 테니까요.”
“그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레일라가 슬프다는 듯 말하자 아나시스 황태자가 저도 모르게 찻잔을 꽉 쥐었다. 그 바람에 손잡이가 떨어졌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찻잔을 내려 두었다.
“그래도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겐 이렇게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그제야 아나시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제게 향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조금 안도한 듯 말했다.
“그대만 건강하면 열 명도 낳게 해 주지.”
“호호.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꾸나.”
황후는 그렇게 둘 마음이 없었다. 레일라가 바라는 게 아이라면 그리 쉽게 허락해선 안 됐다.
뭣보다 브루스 후작가의 아이로 자라더라도, 언젠가는 황족으로 필요할 수도 있을 테니까.
“몬트의 매출이 엄청나군요. 이 정도면 황궁에서 채굴하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한 달 치와 맞먹겠어요.”
“과찬이십니다.”
“칭찬이 아니랍니다. 사실이지. 그리고 비셔스 은행 건도 그렇게요. 이자를 대폭 늘리고 주 단위로 줘서 신규 고객이 몰리는 게 보이네요.”
“네, 딱 3개월만 그렇게 하려고요. 은행의 특성상 한 번 돈을 유치하면 다른 곳으로 한 번에 빼는 일이 많지 않으니까요.”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자 황후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곧 큰돈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도울게요.”
“그래 줄래요? 중앙은행은 황가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제 비자금을 넣기엔 불안하거든요. 저는 언제든 뺄 수 있는, 융통이 쉬운 큰 금액이 필요합니다.”
실상 황후와 펜들턴 공작가의 돈은 해외에 묶여 있었다. 그것은 제국의 돈으로 바꿔 사용하는 데는 시간과 절차가 필요했기에 문제였다.
여차해서 황제가 불시에 죽는다면? 그때 쓸 군사들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거기에 10퍼센트라니.
조금만 넣어 두어도 막대하게 돈이 불어날 게 뻔했다.
“우선, 이 정도만 예치해 볼까 해요.”
“세, 세상에……!”
레일라는 황후가 종이에 쓴 액수를 보며 놀란 척하며 입을 벌렸다.
“이건 너무 과합니다……!”
“어려울까요?”
“아…….”
레일라는 고민하는 척했다. 액수가 큰 건 어차피 레이니어의 부담이었고. 실상 그리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몬트도 있었고, 비셔스 은행은 지금 신규 고객들로 넘쳐나고 있었으니까.
그저 황후에게 보여 주는 연기일 뿐이었다.
“제, 제가 이걸 받으면 정말로 전하께 큰 도움이 되겠죠?”
“물론이에요. 여기에 이만큼을 더 넣을 생각이랍니다.”
황후는 저가 가진 비자금을 전부 적어서 보여 주었다. 레일라는 생각보다 변변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놀란 척하며 손을 떨고 있었다.
“제, 제가 꼭…… 도움이 된다면…….”
레일라는 마치 아주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아나시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그런 행동 덕분인지, 황후에게는 정말로 레일라가 사업 수완은 좋고 돈은 잘 불리나 철없고 사랑에 눈먼 영애 정도로 보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고.
“그럼 잘 부탁할게요. 서류는 내일 중으로 보내죠.”
“네,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레일라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자 그런 그녀가 귀여웠던 아나시스 황태자가 픽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비자금은 레일라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